소설, 수필, 미술, 음악, 역사, 철학, 심리학 등 잡식을 했고, 이 선배들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 보이기 위해 영어책을 붙들어 잡기 시작했다. 딴 건 모르겠고, 기존 영어 교육 방식대로 도서관에서, 그리고 집에서 외우고 또 외우는데, 영어 실력은 쉽게 늘지를 않는다.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답을 알려주는 사람도 없다.
말초 신경까지 온통 중국어로 도배하다가도,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짠’하고 다른 언어의 세계로 변신한다. ‘영어’ 교실이다. 이 여름학기 기간에 친구들 절반 이상이 영어권 친구들이다. 비록 중국어를 배우려 북경에 있지만, 역시나 영어 중요성이 어디 가리요. 다국어 회화자들이 상당수다. 부럽다. 부러우면 지는데 말이다. 나도 그날이 오겠지?
고구려, 발해는 우리나라의 역사이다. 만주를 호령했던, 주몽이 세운 고구려. 그리고 고구려의 후예라 칭하며 거대한 동북아를 지배했던 해동성국 발해. 역사를 10세기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 …독감으로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며, 몸이 한참 맛이 갔지만, 쇠를 끌어당기는 자석처럼 나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역사 현장으로 나의 마음은 이미 떠났다.
우리의 다음 목표는 발해 공주 묘이다. 고성을 찾던 방식과 동일하게, 마구잡이 식 수소문 통해 두 번째 목표를 찾아낸다. …심장 떨려 잘 못 걷겠다. 비 오는 언덕길을 걸어 올라간다. 발굴 현장은 이미 지하까지 파여있었고, 비를 막기 위해 검은 포장재로 허술하게 덮어 놓았다. 아, 속상해~! 역사적 발굴 현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난장판이다.
일본을 등에 업은 위만주국이 다른 이권을 받고, 대한민국의 동북 3성을 중국 쪽에 넘기는 협약을 한 장소가 이곳이란다. 어라? 그곳이 이곳이었던 거다. 감정이 묘해진다. 성질나기 시작한다. 울분이 생긴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 이래저래 어찌저찌 해서 이 협약이 체결되지 않았더라면 현재 대한민국의 국토 크기가 어마어마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남중, 남고, 군대, 그리고 공대, 전형적인 남자들만의 세상에 살다가 중국 유학을 온 뒤로는 그동안의 비운(?)을 액땜이라도 하듯이 주위에 여자가 넘쳐 난다. 이래서 세상은 공평한 것이다. 게다가 미인 천국이다. 꽃밭이라는 혜택을 받은 학습 환경으로 학습 능률이 배가 된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그냥 하고 싶어서.” 하고자 하는 의욕에 출발한 이 ‘하고 싶어서’ 공부는 학습 능률을 배가시킨다. 게다가 아침 이슬과 출근하고, 밤 별, 달을 보며 퇴근하며, 뼈 빠지게 열심히 번 돈을 투자해서 공부하게 되면 돈 아까워서라도 덜 졸게 된다. 아니, 잠이 확 달아나기도 한다.
다시 설렌다. 이 설렘의 묘한 매력은 내 심장을 또다시 쿵쾅쿵쾅 뛰게 한다. 마라톤으로 치면 이제 중간 반환점을 지났다. 돌아갈 때는, 걸어왔던 길이니 실수 좀 줄이고, 잘 달려보자. 또 시련 당할 각오하고 어디 찐한 사랑 있나 다시 한번 찾아보자. 사랑 없이 사는 청춘은 건조하다. 이젠 밥도 좀 많이 먹고, 씩씩하게 살아가자. 뜨거운 사랑도 나누어보자. 식욕은 성욕이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뜬다. 머리가 빠개진다. 기존의 두통들하고 차원이 다르다. 뇌를 뭔가가 계속 쥐어짜는 느낌, 그리고 뇌가 대부 정지되고 일부분만 동작하는 느낌. 띵하다. 얼굴 인상을 펼 수가 없다. 구역질 나올 정도로 두통이 심하다. 산소 부족이다. 고산 지대라 뇌에 공급되는 산소량이 줄어 버리니 뇌가 이상 반응을 보이고 몸도 즉각 반응한 게다. 미리 가져간 두통약을 먹어 본다. 시간이 지나도 두통은 여전하다. 고산병이다.
열 명 정도가 동행한다. 이제 걷는 것은 자신이 생겼다. 고산병 나은지 이미 오래되었고 히말라야 산길들 많이 걸어봤다. 격변 날씨에, 운동화도, 바지도 다 젖어간다. 다 젖고 산길이 험난해서 지칠만한데도, 우리 동행자 친구들은 힘든 기색이 없다. 다들 한 무게 하는 무거운 짐들을 메고 걸어가는데도, 불평불만 소리가 없다. 깔깔, 킥킥 웃음소리만 들린다. 크게 웃다 보면 웃음소리도 메아리쳐서 돌아온다. 이런 친구들과 함께라면 걸을 만하다.
외국어 학습은 몇 년 혹은 몇십 년간의 장기전이다. ‘영어 며칠 안에 정복하기’, ‘영어 이것만 알면 다 한다’ 따위 식의 광고로 책을 팔아온 저자들을 혐오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지나치게 책상에만 앉아서 우리의 뇌세포를 고문해 왔다. 앉아서 익힌 언어는 곧 잊는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 내려 준 최고의 선물.” 반복해서 많이 듣고 많이 말하자. 모로 가도 서울에 가면 된다. 기왕이면 지름길로 가보자.
유학 중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다들 삶에 지쳐서 그런가? ‘한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친구는 극소수이다. 어떤 친구들은 광기를 보일 정도로 한국을 싫어한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이렇게 부정적으로 생각되는 이유는 무얼까? 이 친구들에게는 한국은 참 살기 힘든 국가이고, 나쁜 나라이고 자신들을 배신한 나라이다. 우리의 모국은 타국에서 정작 주인들에게 홀 대접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이고, 모르겠다. 너무 딱딱하게 기계적으로 살아가고, 차가운 인간관계 숲에서, 새로운 것만 찾아 소화하다 보니, 먹은 밥이 체할 것 같다. 그냥 구수하게 낡은 중고품 써가면서 살아보련다. 한국 가면 이 중고 운동화 잘 수리해서 오래오래 신으련다. 그리고 싸웠던 친구들 다 불러서 쏘맥 한 잔씩 해야겠다. 인간관계 수리하는 데 쏘맥 보다 나은 건 없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