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 우리는 외삼촌의 집으로 옮겨갔다. 외숙모는 잠을 자지 못해 병이 났다. 우리가 외숙모의 잠을 쫓았다. 외숙모는 아침마다 토끼처럼 새빨개진 눈을 하고 미치겠어, 미치겠어,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우일이가 이불에 오줌을 쌌을 때에도, 내가 달력에서 예쁜 여자 배우들의 얼굴을 모조리 오려내었을 때에도 외숙모는 하루 종일 미쳤었다. 냄비도 프라이팬도 밥상 위의 그릇들도, 마룻장과 방문짝들도 미치겠어, 미치겠어, 큰 소리로 꽝꽝거렸고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외숙모의 조그만 딸도 덩달아 미치겠어, 미치겠어, 혀 짧은 소리로 제 엄마의 말을 흉내 내었다.
외숙모가 매일매일 미치기 때문에 우리는 외삼촌의 집을 떠나 큰집으로 살러 왔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지나고 여름, 가을이 지났다. 다시 겨울이 오고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왔다. 눈과 비와 바람과 햇빛이 엄마의 얼굴을 지웠다. 우묵한 눈자위와 불룩한 코의 자취도 스러지고 나지막한 한숨과 중얼거림, 머리숱이 좋아 아홉 가지 흉을 가릴 거라면서 내 머리에 한없이 빗질하던 손길도 차츰 사라졌다. 엄마의 얼굴은 뿌옇게 흐린 껍질 속으로 안타깝게 숨어버리고 삭지 않은 피멍으로 언제나 꽃이 핀 듯 울긋불긋하던 무늬, 엄마의 얼굴에 그려지던 그림만 남았다. 문득 훅 스쳐가는 친숙한 냄새, 희미하게 떨리는 가녀린 부름을 들은 것 같아 뒤돌아보면 햇빛, 바람, 엷어진 그림자 같은 것이 있었다. 누가 엄마의 얼굴에 그림을 그렸나? 슬픔의 그림을 그렸나?
---pp.9-10
우리가 사는 방은 네모나고 밥상은 둥글다. 햇빛은 따뜻하고 얼음은 차갑다. 나는 크고 우일이는 작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 단단하거나 물렁물렁하거나 희거나 검거나 빨갛거나 노랗거나…… 낮은 밝고 밤은 어둡다. 그러나 해가 지고 밤이 되기까지의 불분명하고 모호한 어스름, 하늘과 땅 사이를 가득 채우며 밀려와 가슴을 꽉 막히게, 안타깝게 하는 그 무엇에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처럼 그때와 지금이 어떻게 다른지, 그 사이를 흐르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 여자는 주먹만 한 감자의, 군데군데 옹이지어 파인 곳을 칼로 도려내며 이게 감자의 눈이라고, 무서운 독이 들어 있다고 말했었다. 감자도 눈이 있나? 독이 든 눈으로 무엇을 보나?
자주 꽃 핀 건 자주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아이들이 고무줄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를 우일이가 흥얼거렸다. 그만두지 못해? 우일이를 후려치며 나는 소리 질렀다.
우리는 모두 매일매일 무엇인가가 되어가는 중이지. 너는 지금의 내가 되기 전의 나야. 아니면 내가 되어가는 중인 너라고 말해야 하나? 그래서 나는 너희들을 보는 게 무서워 견딜 수 없어.
감자 눈을 파내면서 그 여자가 내게 해준 말이었다.
---pp.72-73
방문 열리는 소리에 설핏 눈이 떠졌다. 방 안으로 들어서는 아버지의 손에 황금빛 머리타래가 들려 있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등뒤로 슬몃 감추었으나 나는 다 보아버렸다. 달이 밝은가? 희끄무레 떠 보이는 방 안의 어둠 속에서도 밝고 환하고 풍성하게 빛나는 황금빛을 보는 순간 나는 눈을 꽉 감았다. 무서울 땐 언제나…… 눈을 감으면 그 깜깜함이 무서움을 가려주었다. 문을 등지고 우뚝 서서 잠든 우리를 내려다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어둠 저편으로 숨었다.
아비가 온 줄도 모르고 얘들이 정신없이 곯아떨어졌구나.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 기차 타고 왔나?
우일이가 잠결에 웅얼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내 옆에 무겁게 몸을 뉘었다.
더운데 웬 옷을 이렇게 겹겹이 껴입고 자니. 내가 벗겨주마.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손이 내 티셔츠를 가슴팍까지 걷어올렸다. 술 냄새가 몹시 났다. 뜨거운 손이 가슴을 더듬었다. 이제 처녀가 다 되었구나.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젖몽우리가 도도록이 솟기 시작하는 가슴이 아얏 소리를 지르게 아팠지만 나는 비명을 참으며 눈을 꼭 감은 채 슬그머니 돌아누웠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는 손을 거두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도 불쌍하지만 나도 어지간히 불행하고 외롭고 기박한 인간이다. 잠시 후에 손이 또 건너왔다. 뜨겁고 조바심치는 손길이 또다시 젖가슴을 주무르고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꿈이었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버지는 없었다. 방의 윗목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꽃잎이 황금색으로 활짝 핀 해바라기 한 송이를 보았다.
---pp.119-120
우일이는 아마 날기 위해 뱃속의 것을 모조리 비운 모양이었다. 나는 우일이의 몸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손등에 희끗한 얼룩처럼 남아 있는 개에 물린 상처도, 조그만 잠지도 보았다. 온몸으로 푸른 무늬가 넓게 퍼지고 있었다. 팔뚝의 작은 문신에도 푸른 물이 들어 있었다. 침을 맞은 자리도 점점이 파랗게 변했다. 숱 많은 머리털 속, 멍든 듯 부풀어오른 한가운데 조그만 상처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애의 영혼이, 생명이 빠져나간 자리일까.
나는 이제 알았다. 우주소년 토토가 빛의 아이라는 표지, 둥그런 해무리는 이곳에서 나오는 것일 게다.
발가벗겨진 우일이는 계속 떠들어대었다.
아버지는 엄마를 때렸어. 매일매일 누가 잠든 엄마의 얼굴에 그림을 그렸어.
아버지는 단단하고 둥근 주먹으로 엄마를 때렸다. 가죽장갑을 끼고 감아쥔 오른손 주먹으로 탄력 있게 치면서 방 안으로 들어서면 엄마는 제발 그러지 말아요, 때리지 말아요, 소리를 지르며 방구석으로 달아났다. 엄마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우리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방 한구석에서 숨죽이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천천히 오랫동안 엄마를 때렸다. 그러면 엄마의 얼굴에는 붉고 푸른 무늬가 생겼다.
아버지가 왜 그랬을까, 누나?
그치라고, 입을 다물지 않으면 때려주겠다고 아무리 으름장을 놓아도 우일이는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제는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없게끔 커다랗게 왕왕 울려대는 우일이의 말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씌우고 방을 나왔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이씨 아저씨의 방문은 닫힌 채 조용한데 처마 밑에 새장이 걸려 있었다. 아저씨는 어두워지면 새장을 방 안에 들여놓아야 한다는 것을 깜박 잊었나 보았다.
---pp.157-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