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강술래는 속된 말로 하자면 당대의 '부킹 문화'를 보여 주는 것이다. 춤은 심리적, 육체적으로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춤을 추다 보면 서로 간에 신체적 접촉이 생기며, 애정의 교감이 일어난다. 이성에 대해 품었던 심리적 경계가 봄눈 녹듯이 풀리게 되는 것을 어찌하랴. --- p.204, 「봄눈 녹듯 내리는 사랑의 노래 - 대동춤」 중에서
사대부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한 여행지는 금강산이었다. 생육신 중 한 명인 남효온이 중국 사신 일행과 금강산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벽하담에 이르렀을 때 일행 중 한 명이 그만 투신을 한다. 그가 남긴 말은'여기가 참으로 불경이로다. 원컨대 이곳에서 죽어 조선 사람으로 태어나 부처님의 세계를 보련다.'였다.
고대부터 금강산의 아름다운 자태는 만방에 알려져 있었다. 송나라 시인 소동파는'고려국에 태어나 한 번만이라도 금강산을 보았으면.'이라 했다. 또 몰려든 관광객들이 금강산 동쪽에 있는 호수, 삼일포의 암벽에 새겨진 글자의 탁본을 자꾸 요청하자 이를 귀찮게 여긴 마을 주민들이 글씨를 훼손하고만 일화도 있다. --- pp.122-125, 「여기가 참으로 불경(佛境)이로구나! - 여행과 놀이」 중에서
16세기 문신 홍성민이 계림부(경주)에 내려가 우연히 보름날 밤 석전을 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미친 듯 헐떡이며 땀에 젖은 채, 이리저리 돌을 던지고 있었다. 그는 '자식으로서 아비에게 돌질을 하고, 아우가 형에 돌질을 하며, 친척이 그 친척에게 돌질하고, 이웃 마을로서 이웃 마을에 돌은 던진다.'고 개탄을 하였다. 그러나 정작 이들은 이렇게 항변하였다. '나는 아비에게 돌질한 것이 아니라 싸움에 돌질한 것이다.'
편싸움에서는 종래의 인간관계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오직 싸움 자체에 몰입한다. 이는 이긴 편은 길하고 진 편은 흉한, 매우 성스러운 제의다. 거친 싸움을 통해 자아의 에너지 혹은 마을 구성원의 에너지를 폭발시키면서 대동을 구현하는 것이다. 대동놀이가 신년 대보름에 몰려 있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새해는 격정의 흥분, 피맺힌 아픔의 편싸움으로 잉태된다. --- p.71, 「자식이 아비에게, 아우가 형에게 던지는 돌팔매질 - 석전」 중에서
죽음과 주검은 가장 꺼림칙한 대상이며 이를 치르는 상례는 부정적 의례였다. 상갓집에 들어가기 전에 입에 솔가지를 물었다 뱉거나, 장례식을 다녀온 뒤 신문지를 불태우고 이를 넘어가는 액땜 행위가 발달한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죽음의 공포를 떨치거나 주검의 부정을 없애는 문화적 행위가 바로 놀이다. 장례식에서 벌이는 놀이는 상주와 문상객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순화시킨다. 문상객들이 상갓집에서 밤을 지새우며 떠들썩하게 고스톱을 치는 이유 또한 이것이다. 상주의 곁을 함께 지키고 슬픔을 나누면서 개인이 당한 죽음의 공포를 무리지어 풀어 주는 것이다. 개인은 공포 앞에 무기력하지만 사회적 공동체가 형성되면 그 두려움을 너끈히 이겨낼 수 있다. 이때 놀이는 더욱 강렬한 빛을 발한다. --- p.39, 「웃음을 연발하는 초상집 - 죽음과 놀이」 중에서
농사일 중 가장 힘든 노동인 김매기가 끝나는 음력 7월경의 호미씻이는 고생한 농민들을 위한 놀이이자, 벼를 베고 탈곡하는 수확기를 맞이하기 전에 중간 휴식을 통해 힘을 재충전한다는 의미다. 이때 농사를 짓느라 고생한 머슴들을 위해 잔치가 벌어지기도 했다. 호미씻이를 머슴의 설, 머슴의 명절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머슴이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소와 함께 주인집으로 들어가면, 주인은 한상을 푸지게 차려 냈다. 이날만큼은 머슴은 상석으로 주인은 말석으로 자리를 바꿔 앉았다. 1936년『조선중앙일보』에서는“15일부터 오늘가지 논산군 내 15면 180리에서 두레 술로 먹은 것이 무려 2,715말에 달한다.”는 기사도 찾아볼 수 있다. --- pp.175-176, 「'머슴이 주인 되는 날'을 아시나요? - 백중 놀이」 중에서
조선총독부는 인천 월미도에 바닷물을 데워 이용하는 조탕(潮湯)과 해수 풀을 만들었다. 1920년대에는 해수욕을 즐기러 가는 인파가 늘자 철도국은 수욕(水浴) 열차를 특별 운행하기에 이른다. 한편 벌거벗은 근대의 해수욕장은 체면과 갖춤에 젖어 있던 조선인들에게는 발칙한 공간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따로 헤엄을 치도록 경계를 엄격히 지어 구별했지만 모래사장은 구획될지언정 바닷물은 칼로도 베어낼 수 없었다. 해안가에서 조금 벗어나면 그 경계가 무너지기 일쑤였다. 남자들은 규칙을 어기고 여자들의 헤엄 장소로 넘어가 유혹했으며, 여성들도 은밀한 유혹에 빠지기 십상이었다. --- p.165, 「세속적 휴양의 공간이 되다 - 물놀이」 중에서
정종(조선 제2대 왕) 때 조선을 방문한 일본국 사신에게 불꽃놀이를 구경시켰다. 이를 본 왜인이'이것은 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천신(天神)이 시켜서 그런 것이다.'라며 크게 놀랐다. 이런 화려한 불꽃놀이는 태평성대의 조선을 구가(謳歌)한 것이다. 또한 조선을 굉장한 화기와 위력을 가진 나라로 인식하게끔 했다. --- pp.47-48, 「태평성대에 부국강병한 나라, 조선 - 불놀이」 중에서
성종 19(1488)년 명나라 효종의 등극을 알리는 사신 동월이 조선에 왔다. 조정은 동월 일행을 영접하기 위해 평양, 황주, 서울의 광화문에 산대를 가설하고 백희를 공연했다. 이를 보고 놀란 동월은 명으로 돌아가『조선부(朝鮮賦)』라는 책자를 남겼다.??땅재주를 넘으니 상국(相國)의 곰은 말할 것도 없고 … 많은 줄을 따라 내리매 가볍기는 능파선자와 같고 외나무 솟대를 타는 모습에 날뛰는 산귀신인가 놀라며 본다.??송나라 수도에 상국사(相國寺)라는 절이 잇고 그 앞에는 곰이 곤두박질하며 땅재주를 넘는 장소가 있었으니 조선 기예의 신출귀몰함을 그 곰의 신기함에 빗댄 것이다.
* 우리의 산악백희는 현대 서커스의 범주보다 넓은 의미로 곡예, 묘기 외에 무용, 음악, 가면극 등까지 포함한 종합엔터테인먼트였다. --- pp.96-97, 「서커스야 물렀거라, 산악백희(散樂百戱)가 나간다! - 기예와 놀이」 중에서
삼국 시대의 왕과 귀족층은 매사냥의 강렬한 유혹에 빠져 있었다. 신라 26대 진평왕(眞平王)이 매사냥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자, 충신 김후직은 진평왕이 사냥을 다니던 길목에 자신의 시신을 묻게 해 왕의 잘못을 깨닫게 했다.
--- 14-15, 「그 날카로움에 현혹되다 - 매사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