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한 사람은, 작고 평범한 문이라도 그 앞에서는 마음을 가다듬고 문의 방향을 살핀 뒤 문고리에 손을 댄다. 문의 구분이 만든 경계의 의미를 존중하고 나의 등장이 만들어낼 공간의 파장을 준비한다. 문이 필요했던 이유와 문의 생김새를 생각하면, 문 앞에서의 행동과 기대는 문의 디자인과 재료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 요소의 본질적인 것과 관계된 기능과 의미를 읽어낼 때, 건물과 공간, 그것을 이루는 아주 세세한 것까지 모두 우리의 삶에 직접 관여한다. ---「문은 비대칭이다」중에서
사람에게 자의식이 생기는 순간부터, 공간은 존재의 중요한 조건이 된다. 우리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공간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곳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게 되면 삶의 새로운 문이 열릴 것이다. 건축의 기술과 복잡한 아름다움은 공간적 요소마다 집약되어 있다. 건축은 그저 우리를 보호하고 이동을 돕는 장치로서 끝나지 않는다. 더 숭고한 목표를 의식하게 한다. 건축을 건축이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람과 환경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변화시키고, 인간의 심성을 어루만지고, 만들고 지키는 사람의 자부심을 키워주는 아름답고 정교한 공간이다. 허투루 짓지 않고, 노련하게 설계하고 정교하게 만든 계단은 그 의도에 가장 가깝다. ---「느린 계단」중에서
창 앞에서 나는 관찰자가 되고, 창 안에서는 보호받기를 원한다. 창은 내부와 외부를 구분한 결과일 수밖에 없어서, 창이 많아질수록 시선으로부터 갇히고 벽이 많을수록 마음은 자유롭다. 창은 나와 타인의 공간 사이에서 거대한 모순을 직면하게 만든다. 그러나 끊임없는 소모와 충전으로 메워지는 인간의 삶이 주는 고달픔과 무의미함에 대항하는 아름다움도 바로 여기에 있다. 행복과 관련된 법칙들은 규칙성, 헌신, 자율성이며, 아름다움 중 최상급은 관계의 아름다움이다. 공간의 아름다움은 결국 관계의 아름다움이다. 크기, 거리, 높이, 경계, 질서의 기준과 변위(變位)를 통제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창은 빛과 경치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모순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건축의 감동을 더 깊이 전한다. ---「창의 모순」중에서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도시 안에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정복하지 못하는 공간의 광활함이나, 버리지 못하는 관계의 복잡성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었다. 멀리 내려다본다는 것은, 지붕 안에 견고히 박혀 있는 타인의 삶을 관조하고, 저 멀리 변함없는 도시와 자연에 나의 일상을 겹쳐보는 일이다. 마치 여행지에서 느끼는 거리감과 낯섦처럼, 타인과 환경과 지식, 즉 잘 알고 익숙한 것들로부터 떨어지면 우리는 잠시 넋을 잃는다. 여행으로, 우리가 지나온 삶의 희미한 기억은 뚜렷해진다. 이만큼 떨어져본 적이 없어서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관찰한 세계에서, 각자 무관한 사물과 시간 들이, 삶의 깊숙한 곳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는다. ---「지붕의 사색」중에서
우리는 책 자체보다 책의 공간이 주는 친밀감과 신비로움을 진심으로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책을 파는 서점은 점점 사라지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마치 억눌려왔던 것처럼 책과 연결된 공간들이 태어나고 있다. 공동의 경험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도시와 건축의 건설에 있어서도 이곳은 아직 유연하게 남아 있는 것 같다. 책의 분류와 정리의 문제를 떠나, 개인화된 사회에서 각자 살아가는 방식과 독서와 깊은 관계를 맺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그 공간의 의미와 외관도 시험 중이다. 공간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기는커녕, 마치 밥을 먹듯 일상이었던 공간과 사물을 스스로 만들어내던 기억마저 사라진 지금이야말로, 마비되었던 팔꿈치와 손가락 마디와 무릎 관절을 써가며 무언가를 만들 기회다. 책장은, 책을 모을 공간이 아니라 나를 담을 공간이다. ---「책장과 독립심」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집은 똑같은 아파트로 기억되어버렸지만, 공간이라기보다는 표준화된 가구들의 모임이 된 아파트 부엌에서도 한 집안의 고유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곳은 집집마다 비슷한 듯하지만 타인의 집에서 가장 낯선 곳이다. 이해를 구할 필요 없이 그저 따라야만 하는 가족 고유의 문화를 마주하며, 새로운 구성원이 일상에서 고독감을 실감하는 곳이다. 부엌의 생활이 무르익을수록, 남의 집에서 산다는 느낌에서 서서히 벗어나 나의 집이라 부르는 데 어색함이 사라진다. ---「부엌의 고독」중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어디서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사람들에게 던지면, 모두 자신의 집, 자신의 방을 떠올릴 것이다. 집은 죽을 때까지 살아갈 곳이다. 방은 집, 건축 그 본질에 가장 가까우며, 방은 우리가 생각하는 ‘삶’과 ‘죽음’ 둘 다의 공간에 가장 유사하다. 노인의 잠은,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과 가장 닮아 있다. 시어머님의 잠은 불안하고도 고요했었다. 삶과 죽음은 늘 한곳에 있었다. 방은 잠을 자는 곳이기에, 자신의 방에서 죽을 수 있다면 가장 인간다울 것이다. ---「방과 죽음」중에서
건축은 어디에나 있고 모두와 연관되어 있다. 자아 성찰의 절반은 자신에 대한 배타적 숙고, 그 나머지 절반은 “외부에 대한 참된 관찰”(노발리스, 《꽃가루와 파편들》)로부터 이룰 수 있다 했다. 마치 인생의 새로운 문을 여는 것처럼,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에 대한 참된 관찰로 나의 삶이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순간과 어떤 사람을 사실보다 더욱 아름답고 극적으로 새기는 일, 건축 일을 하면서 간절히 바라는 바도 이런 서정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매일 반복되고 특별함이 없는 그저 나의 환경 안팎, 제한된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일이, 가끔이라도 한 편의 시가 되기를 바란다. 오래된 재료, 잘 설계된 공간, 정성스러운 디테일은 각자의 시들을 담고 있다. 가만히 귀 기울이고 사랑을 담고 바라보면, 그제야 들리는 시가 있다. 자신의 기초이자 가장 평화로운 곳으로 기억되는 집, 가장 깊은 곳이다. ---「방과 죽음」중에서
작은 공간을 스스로 만들고 가꾸어 살고자 하는 마음은, 기능을 수행하는 최소의 공간, 제어 가능한 우주의 끝을 스스로 알고, 모든 것은 나와 직접 관계되어 있다는 인식이다. 하나의 책방, 하나의 도장집, 원룸의 내 방은 하나의 사람이다. 거대한 공간과 조직은 우리에게, 인간은 타인과 장치의 도움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미완적 존재라는 것만을 크게 부각시킨다. 반면, 작은 공간을 스스로 꾸려서 그 공간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먹고살며 세상과 관계 맺는 일에 자립적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고 다음에 이야기하는 것들이 우리의 일생에서 자신의 집, 자신의 공간을 지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에게 공간이 필요한 이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