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근본적 특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있는 그대로의 가치를 함께 나누고, 좋게 느끼는 것이다. 사랑에 상처입고 삶의 성공에 실패하는 이유는 바로 그 근본적 특성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적절하게 교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깨닫고 다시 배워야 할 것은 이 인격적 특성들을 이해하고 사랑의 법칙에 따라 교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을 배우는 길이다.
참되게 살고 행복한 삶에 성공하려면 그런 자기 인격 특성뿐 아니라 다른 이의 인격 특성과 사고방식, 감정 시스템, 가치관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풀어 가야 한다. “모든 이를,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되고 거기서, 자아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종교가 말하는 인간 구원과 인류 구원도 거기서 이루어지게 된다. --- p.13
사람은 누구나 항상 사랑할 필요를 느낀다. 어떤 사람은 돈을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권력이나 명예를 탐하지만 이들도 결국 그런 요소를 통해 사랑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일을 좋아하는 사람, 출세한 사람, 권력을 손에 잡은 사람, 돈을 벌려고 악착같이 일하는 사람……. 그들은 사랑을 잃은 후에야 그것이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 p.28
사랑의 법칙에는 7가지가 있다. 이 법칙을 다 지키고 그 관문을 다 통과해야 사랑이 성숙할 수 있다. 모든 사람, 사물, 행동에는 사랑할 가치가 들어 있다. 모든 것이 사랑의 대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느낄 수 있다. 이 논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이다’라는 라틴어 격언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랑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지닌 선을 가치로 본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접하는 대상의 가치를 볼 수 없다면 사랑을 만들어 갈 수 없다. --- p.101
인간관계는 어찌 보면 거래와 같다. 가족관계조차도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고 서로 배려하고 존중될 때만 좋은 관계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하려면 먼저 자기 안의 걸림돌을 발견하고 이를 제거한 후 “나는 당신이 이럴 때 이러한 것들이 힘듭니다”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나는 그렇지만 당신도 이게 문제야” 하고 응수해서는 안 된다. 문제를 제기할 때는 절대로 ‘당신을’이란 말은 쓰지 말고 ‘나는’이란 말을 써서 가급적 자기 생각과 느낌, 힘든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문제를 풀어 가는 길이다. --- p.132
사랑은 삶 자체이다. 삶이란 단조로울 수 없다. 삶이 단조로워지면 삶으로 인한 행복도 단조로워진다. 사랑이 삶의 실체이기 때문에 사랑 또한 단조로워서는 안 된다. 연인이나 부부, 혹은 자녀 관계도 단조로워서는 안 되지만 사랑하는 대상도 단조로울 수 없다. 단조로움을 피한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 첫째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단조로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사랑의 대상도 넓혀가야 할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사랑의 일반화란 사랑하는 대상을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보편화해야 할 요소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사랑은 연인관계처럼 특별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만들어 가는 삶의 형태처럼 다양한 형태의 사랑도 존재한다. 삶 자체가 풍요롭고 행복하려면 사랑하는 방식뿐 아니라 사랑의 폭도 넓어져야 한다. 삶 자체가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우리가 만나고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과도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 p.169
이웃 사랑은 누구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모든 이, 가상 인...물까지도 대상으로 한다. 우리가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 평화유지군이나 재건지원단을 파견하는 것이나 케냐나 나이지리아에 자선금을 보내는 이유는 이해관계나 만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 아니다. 그저 그들의 곤궁과 함께하는 것이다. 그게 인간이고 그게 이웃 사랑이다. 이런 나눔이 없다면 인간 삶은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한 동물에 불과하다. 떼지어 다니며 먹이만을 공격하는 하이에나와 다를 바 없다. 세계 곳곳, 사회 곳곳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공격과 착취행위가 자행되는 것은 욕심을 위한 동물적 행위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자기 새끼만 보호하고 챙기지 않고 사회를 이루며 협력하고 함께하며 사랑을 나누기 때문이다. --- p.227
나는 그냥 이렇게 생각한다. ‘신은 신이요, 인간은 인간이다.’
종교는 신을 너무 인간화시켰다. 인간의 모든 고통과 필요에 신이 항상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계시며 신을 믿는 사람들을 축복하시고, 신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의 문제에 은총을 베푸신다고 가르쳤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다. 예언자?, 사제나 학자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나도 그렇지만 신을 믿고 있는 모든 사람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신에 대한 존재 인식이나 신에 대한 갈구를 인간적으로 확인하고 느끼려 하며, 신이 자기들 인생에 적극 개입하기를 원하게 된 것이다.
……
인간의 개인 사정에 대해 신에게 기도할 때마다 일일이 응답하신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신은 신적인 방법으로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
비합리적 신앙은 가르침의 맹목적 수용이다. 비합리적 신앙은 전지전능한 힘 앞에 굴복하고 자기 능력과 힘을 포기하는 데 뿌리박고 있지만, 합리적인 신앙은 확신과 느낌에 뿌리박고 있다. 합리적인 신앙은 근본적인 것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확신을 갖고 있는 확실성과 견고성이다. 자기 자신의 생산적 관찰과 사고에 기초를 둔 독립된 확신에 뿌리를 둬야 한다. 자기가 인정하는 것을 느낌으로써 확신하는 것이다. 신앙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평등, 정의, 사랑의 원칙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질서를 수립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상이다. 예수는 이를 ‘하느님의 나라’로 표현한다. --- pp.243-248
사람은 늦어도 중년기가 되면 자기 자신의 삶의 형태, 인생관, 인간관계를 재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중년기를 자아 재창조의 시기라고 말한다. 같은 자동차를 수십 년 타고 다녔다면 엔진, 핸들, 전기 시스템, 부품들을 점검하고 고쳐야만 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행복하지 못하거나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자기 삶에 문제가 생겼을 때 이를 곧바로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아 재창조란 이렇게 30~40년 살아 온 자기 인생관과 가치관, 행동방식을 바꾸어 삶에 새로운 활기와 기쁨을 불어넣는 작업인 것이다. 중년기는 인생을 새 출발해야 할 시기이다. 세상에 대한 인식도 바꿔야 하고 자녀들에 대한 생각도 바꿔야 한다. 사랑하는 방식도 계속 같을 수 없다. 사람과 시대에 맞게 변화시켜야 한다. 보다 성숙하고 보다 새로운 삶을 추구해야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 pp.274-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