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복음주의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 기본적인 구조 안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어떤 요소가 지나칠 정도로 과장되어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다. 부드럽게 표현해 보자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구원을 이루셨는가’보다는 ‘그 구원이 어떻게 해서 나의 것이 되는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해졌다. 보다 전문적인 신학 용어를 사용하자면, ‘구원이 어떠한 방식으로 나타나는가?’라는 구원의 서정(ordo salutis, “오르도 살루티스”)이 ‘하나님께서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역사 가운데 어떠한 일을 행하셨는가?’라는 구원의 역사(historia salutis, “히스토리아 살루티스”)를 가리워 버렸다. 결국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진 의미를 아는 것보다는 나의 삶이라는 주제가 더 우선시 된 것이다. --- p.2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입장은 바울신학과 조화되는가?
나는 하나의 가정적 논의를 통해, 즉 바울신학 특히 그의 구원론의 기본 구조를 설명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변하겠다. 부정문으로 표현하자면, 바울에게 있어서 칭의는 다음과 같이 진술될 수 있다.
첫째, 존귀히 높여지신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하는 것 바깥에서(outside of) 칭의는 일어나지 않는다. 즉 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함께 주어지는 유익이 아닐 수 없다.
둘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해 주는 “이미-아직 아니”(already-not yet)라는 구조 바깥에서는 칭의가 일어나지 않는다.
셋째, 위의 구조와 상응하는 고린도후서 4:16의 “속사람-겉사람”(inner-outer) 인간론의 관점 바깥에서 칭의는 일어나지 않는다. --- p.58.
칭의에 있어 신자에게 주어지는 의의 전가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 글의 핵심 논지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이다.
첫째,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론의 체계적인 구조를 제공하며, 이에 따라 성령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모든 구속적 유익들을 신자들에게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동시적이면서 종말론적으로 적용시키신다.
둘째,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칭의의 사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측면으로 이해할 때 가장 정확하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는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측면이다. --- p.89-90.
칭의에 대한 이와 같은 종교개혁의 기본 구조를 우리는 “종교개혁 논쟁의 고전적인 도식”이라 부를 텐데, 이는 단순히 영어권 학자들만의 주장이 아니라 독일어권 학자들의 동일한 주장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바우어(Baur)는 지적하기를, 개신교가 이해하는 칭의는 법정적 행위로서 “유스티피카레”(justificare, 의롭다고 하다)를 “유스툼 프로눈티아레”(justum pronuntiare, 의롭다고 선언하다)로 이해하지만, 로마 가톨릭에서 이해하는 칭의는 일종의 치료적 행위로서 “유스티피카레”(justificare)를 “유스툼 에피케레”(justum efficere, 의롭게 만들다)로 이해한다고 한다. --- p.141.
여기서 오웬의 생각은 로마법과 연결된다. 오웬은, 제네바 성경이나 흠정역 성경과 마찬가지로, 그 헬라어 단어를 “surety”(보증)로 번역하며, 이 단어의 의미가 라틴어 “피데이우쏘르’(fideiussor, 보증인)와 같다고 설명한다. 이 단어는 로마법에서 유래한 용어로서, 빚을 갖고 있는 사람을 위해 자발적으로 채무의 의무를 맡아 주는 보증인을 의미했다. 이 모든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특히 그가 “스폰소르”(sponsor, 벌게이트[Vulgate] 성경에서 사용한 용어)와 “피데이우쏘르”(fideiussor)를 사용한 것을 고려해 볼 때, 오웬은 기독론을 구속 언약의 맥락에서 다루었던 전형적인 정통 개혁주의의 전통을 반영한다. --- p.195.
특히 웨스트민스터의 두 아담 기독론과 칭의 사이의 연관관계를 설명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첫 아담이 행위 언약 아래에 놓여 있었고, 이 행위 언약 안에서 “완전하고 개인적인 순종을 조건으로 생명이 약속되었다”고 분명히 밝힌다(7:2). 아담이 타락한 결과 그의 죄책이 온 인류에 전가되었고, 죄의 부패 역시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다(7:3). 따라서 생명의 약속은 더 이상 행위 언약 아래에서는 불가능했다(7:3). --- p.257.
비록 이 문제가 오늘날의 논의에서 중요하긴 하지만, 본 논문의 관심은 이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관심은 칭의가 기독교 변증학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라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다.
첫째, 우리는 칭의의 실제(reality)를 인간 경험에 위치시키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기초한 고전적인 칭의가 사라질 경우, 인간들은 그것을 대체할 다른 것들 때로는 매우 기괴한 것들을 붙잡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몇 가지 역사적 사례들을 증거로 제시할 것이다.
둘째, 우리는 칭의를 재정의하려고 시도하며 신학에 대한 수정주의적 관점을 제시하는 최근의 신학자들을 비판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고대의 저자들뿐 아니라 몇몇 현대의 조직신학자들과도 대화를 시도할 것이다.
셋째, 우리는 칭의의 참된 의미가 여전히, 아니 예전보다 더욱더,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를 형성한다는 점을 주장하고자 한다. 성취된 구속(redemption-accomplished)의 중심인 속죄(atonement), 그리고 적용된 구속(redemption-applied)의 중요한 입구인 칭의, 이 둘은 계속해서 기독교 메시지의 근간을 형성하며, 다양한 형태의 현대적인 불신에 맞서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 p.265.
따라서 원래적 믿음에 결여된 것은, 어떤 면에서, 구원하는 믿음을 진정 (우리를) 구원하게 만드는 즉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구원하며 의롭게 하는 믿음에 기본적으로 세 가지 구별된 요소들이 있다고 본다.
첫 번째 요소는 지식(notitia, “노티티아”)이다. 이것은 (원래적 믿음과 구원하는 믿음에서) 반드시 필요한 측면으로서, 과소평가되거나 소홀히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믿음은 결코 지식과 대립되지 않으며, 오히려 지식을 반드시 포함한다.
두 번째 요소는 승인(assensus, “아쎈수스”)이다. 승인의 단계에서 우리는 우리가 안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참되다고 여긴다. 승인의 적용을 통해 우리는 단순히 명제적인 지식(예를 들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성경이 가르친다는 것을 안다”)으로부터 그 지식이 참되다는 것을 긍정하는 단계(“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성경이 가르치며 이것이 참된 사실이라는 것을 안다”)로 이동한다.
세 번째 요소는 구원하며 의롭게 하는 믿음의 핵심인데, 이것은 신뢰(fiducia, “피두키아”)의 측면이다.
--- p.3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