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경우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일인 것처럼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인터넷 지식 검색 사이트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이곳에 대해 해박하고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현지인들과 의사 소통이 자유로운 분들도 있기 때문이다. 안 되는 일은 될 때까지 도 문제없고, 안 되는 일은 될 때까지 도와주시거나 그래도 안 되면 직접 알아봐주시는 분들도 계신다. 또한 운전 해주시던 분들도 지천에 계신다. 그 분들 덕분에 그야말로 만사가 순탄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요즘 캄보디아에 한인들이 부쩍 늘고 있다. 그들은 관광, 사업차, 종교관련(선교활동), 구호 및 봉사활동, 그리고 드물게는 학업 등의 목적으로 캄보디아 땅을 밟는다. 특히 관광의 경우 한국인이 전체 외국인 방문자의 16.4%를 차지하면서, 4년 연속 1위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또한 2008년 1월 기준 캄보디아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는 약 3,000여명으로 추산되고, 이들 중 대부분이 프놈펜에 거주하고 있으며, 시엠립에 900여명, 시아누크빌 등 기타지역에 150여명이 거주한다고 한다.
캄보디아를 알게 된 것은 2003년도였다. 필자가 있던 단체를 통해 첫 방문을 하고 해마다 이 곳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가족 모두 캄보디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벌써 정착한 지 일 년,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한 해를 무사히 넘긴 것 같아 뿌듯하다. 이곳에 처음 도착한 순간부터 비교적 쉽고 편안하게 캄보디아에 적응했던 것 같다. 먼저 이 곳에 정착하신 선배(?)들의 노고 덕분이다. 이 분들이 아니었다면 집을 구하거나 차를 구입하는 일, 여러 행정적인 일 등 모든 것이 막막했을 것이다. 몸소 체험하지 않아도 세상이치가 다 비슷하기에 어느 정도는 삶의 연륜을 통해 극복한 것도 있지만, 앞서 경험한 분들의 조언과 도움은 정말 소중했다. 혼자였다면 시행착오조차도 돈 주고 살 수 없는 경험이라 여기며 기꺼이 받아들였겠지만, 나를 의지하고 있는 가족이 있는 터라 매사가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분들의 조언과 도움이 더욱 절실했다.
해외에 거주하다 보면 가장 어려운 것이 의사 소통의 문제일 것이다. 장기적으로 정착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그나마 다행히 캄보디아는 영어, 불어, 중국어 등을 조금만 할 수 있어도 거의 말이 통하게 마련인데 이런 경우는 ‘열공파'들 에게나 해당될 뿐, 영어는 짧고, 불어는 외계어처럼 느껴지고, 중국어와 한자만 보면 알러지가 솟는 필자에게는 언어의 장벽이 태산보다 높게만 느껴졌다.
언어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불가능한 게 뭐가 있으랴 하는 도전 정신으로 언어의 장벽을 넘기 위해 다시 공부를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조금 바가지 쓰거나 억울하더라도 그냥 맘 편히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경우 후자를 택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돈이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단기적인 체류일 경우는 오기 전에 캄보디아 관련 사이트나 포럼 등을 통해 사전 정보를 얻거나, 지인들을 통해 조력 파트너를 섭외해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필자의 경우는 선교의 목적으로 5년 또는 기간을 연장하여 그 이상을 거주하기 위해 캄보디아에 온 경우이다. 때문에 이러한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자신의 일인 것처럼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인터넷 지식 검색 사이트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이곳에 대해 해박하고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현지인들과 의사 소통이 자유로운 분들도 있었다. 안 되는 일은 될 때까지 도와주시거나 그래도 안 되면 직접 알아봐주시는 분들도 있다. 또한 운전 해주시는 분들도 지천에 있다. 그 분들 덕분에 그야말로 만사가 순탄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얼마 전 이 곳에 어느 NGO와 관련된 일을 하러 젊은 신혼부부가 들어왔다. 그야말로 캄보디아에 갓 도착한 신출내기 새내기 부부이다. 볼 수록 ‘정말 용감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괜히 마음이 많이 쓰였다. 그래서 이들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면 내가 도움을 받았듯이 성심 성의껏 도와줘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 옛날 프놈펜에 첫 발을 디뎠던 때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 본문 ‘좌충우돌, 캄보디아에 적응하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