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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군에서도 대한민국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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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0년 01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415쪽 | 610g | 153*224*30mm
ISBN13 9788975987809
ISBN10 8975987809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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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군수가 된 것은 아주 우연이었다. 원래 좋은 국회의원이 되어 바른 국정을 견인해보고 싶어했었다. 그랬지만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졌다. 마침 군수 보궐선거가 있었다. 군수 선거에 나간다는 것은 꿈에도 없던 생각이었지만, 주변 선후배님들의 적극적인 권유로 내 인생의 다사다난했던 행로가 또 한번 크게 바뀌게 되었다.
고향의 군수 일을 우연한 계기들에 이끌려가듯 수행할 순 없었다. 고향의 낙후는 ‘결전(決戰)’을 요구하고 있었다. ‘가난과의 싸움’을 적당히 비켜가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가난을 섬멸하느냐, 내가 소멸되느냐의 건곤일척적 승부를 스스로 받아들였다.

단순하고 단도직입적인 ‘검투사 정신’으로 강진 군정에 임했다. 딱 두 마디가 ‘전투’에 나서는 내 ‘계명’이었다. “깨끗이... 그리고 열심히…” 그 뿐이었다.
5년 3개월이 경과한 지금, 낙후의 대명사와도 같았던 고향이 신기할 정도로 변화하고 있다. 교육이 정상화되고, 스포츠 마케팅이 성과를 내고, 농업 소득이 증대되며, 투자유치가 일어나고, 관광이 개발되고, 청자 산업을 비롯한 제조업이 개선되고, 기관들이 들어오고, 귀농·귀촌이 활성화되고, 재정 건전성이 향상되고, 도시 경관이 업그레이드되고, 지역 홍보와 브랜드 이미지가 강화되고, 공무원들이 바뀌었으며, 출산율이 높아지고, 인구 감소율이 거의 정지되는, 신기할 정도의 ‘전과(戰果)’들이 나타나고 있다.
고향의 군수로 일하면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많은 것을 경험했고, 실로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고 많은 것을 배웠다. 몰랐던 일들을 깨우쳐가며 익히고 배워가는 보람과 즐거움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부족한 사람에게 막중한 기회를 주신 강진군민 여러분께 가장 먼저 머리숙여 깊이 감사한다. 태생적으로 검투사 기질이 핏속에 흐르는 사람에게 맞붙어 처연히 싸울 수 있게 해준 낙후의 척박한 환경에도 감사한다. 고향을 비참하게 하는 이 가난과의 싸움을 싸워갈 수 있게 하는 탄탄한 체력과 약간의 지력을 주신 부모님께, 특히 어머님께 감사드린다.
원래 이때 저때 발표되었던,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미완의 아이디어와 기록들을 체계화해서 완성도를 높일 수 있게 해준 강진군청 비서실에 감사한다. 그 중에서도 최권·백지선 두 분 후배께 크게 감사한다.
부족한 글을 권위있는 모습으로 다듬어주신 전남대학교출판부와 박방배 과장님께 감사드린다.
이 보잘 것 없는 글들이 ‘지방정부도 중앙정부의 모범이 될 수 있다’는 현장 기록으로 읽혀진다면 글쓴이의 더 할 나위없는 기쁨으로 추가될 것 같다. --- '머리말' 중에서

자전(自傳) 에세이

너무 힘들었지만 무의미하진 않았던 내 삶의 순간들

* 이 글은 건국대 정외과 교수 시절이던 2003년, 16대 국회의원 총선 출마를 앞두고 쓴 것이었다. 그러다가 2004년 말 강진군수가 된 뒤로 별반 수정을 하지 못한 채 개인 홈페이지 등에 올려져 있던 것을 이번에 책 출판을 하면서 약간 가필 보완하여 여기 싣는다. 이 글 속의 시제(時制)는 2003년 당시 시점을 그대로 두었다. 그러니까 교수 때 썼던 글로 이해하시면서 읽어주셨으면 한다.

1. 전쟁동이
2. 4월 혁명과 5.16 쿠데타
3. 슬픈 추억뿐인 6학년 시절
4. 그렇지만 자랑도 있었다
5. 육군교도소 생활
6.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7. 죄와 벌 - 내 사형수 친구들
8. 서울의 봄
9. 미주리대학에서의 잔디 밟기
10. 가장 정성들였던 마지막 강의들
11. 아태재단 사람이 되어
12. 김대중 대통령의 NPC 연설
13. 김대중 대통령의 신임과 나의 불운
14. 너무 큰 대가를 치른 시행착오
15. 조순, 서울 시장을 돕다
16. 김대중 후보가 드디어 대통령이 되다
17. 희망의 혁명을 이루는 예술
18. 정치의 덕목과 덕목의 정치
19. 공직은, 특히 고위 공직은 희생되어야 한다
▣ 후기(後記)

1. 전쟁동이
형과 함께 찍은 내 어릴 적 사진. 조그맣고 못난 아이가 우리 집 모란꽃 옆에 섰다.내가 태어난 곳은, 대개들 아시지만, 강진군 대구면이다. 나는 한국전쟁(6.25 전쟁) 중에 태어났다. ‘전쟁동이’인 셈이다. 물론 내가 태어난 1952년 무렵의 전선은 38선을 중심으로 해서 형성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태어난 전라도 강진 땅은 그때 이미 사실상 휴전 내지는 종전 상태였었다. 어쨌든 나는 전쟁의 북새통 속에서 태어났다. (※우리 어머님이 꾸신 내 태몽도 전쟁과 연관된 내용이다!)

초등학교(=강진 대구국민학교) 다니기 전후했던 시절, 그러니까 1950년대 말의 내 기억에 남아있는 장면들 중 지금도 두려움으로 남아있는 화면은 우리 동네를 빈번히 찾아온 한국전 상이군인들의 모습이다. 전쟁 직후였던 터라 상이군인들은 당시 한국사회에 넘쳤었다. 우리 동네를 찾은 상이군인들은 거의가 다 까만색 색안경을 끼었고, 왼팔이나 오른팔 중에 하나를 잃은, ?래서 그 손에 쇠꼬챙이처럼 생긴 의수(義手)를 한 그런 무서운 모습들이었다. 우리 집이 그 일대에선 제일 큰 집이었고,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과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따로 있어서 안채로 들어온 상이군인들이 쌀같은 걸 얻어간 뒤 (같은 집이라는 걸 모르고) 다시 사랑채로 들어와서 재차 동냥을 요구하고 그럴 때는 무서워서 떨기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그 상이군인들은 내게는 그저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지금은 전혀 다른 느낌이 되어 그 장면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이야말로 한국전쟁의 최대 기여자이면서 최대 피해자라는 생각, 한반도 냉전구조의 모순의 최정점에 존재하고 있었던, 불행한 시대의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고통과 연민의 생각들로 이제는 내 뇌리에 슬프게 고여 있는 장면들이다.
내 옛 추억의 페이지들에는 시대의 진동이 우울하게 기록되어 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휘날리고…”로 시작되는 ‘우리의 맹서’와 “우리는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하고…”로 시작되는 ‘혁명공약’ 같은 문구를 줄줄줄 암송해가면서 학교에 다녔다. 그것이 지닌 정치적 의미를 알 리 없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우리 어머님 앞에서 그것을 외우고 난 뒤 어머님의 칭찬을 받고 기분 으쓱했던 기억도 난다.

2. 4월 혁명과 5.16 쿠데타
1960년 4월, 4·19 학생혁명 때의 일화가 문득 생각난다. 나는 그때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텐데, 우리 누나는 광주여고에 재학중이었다. 어느 날 4·19 희생자 명단에 우리 누나 이름인 ‘황현자’가 올랐다는 소식이 우리 고향집으로 전해져왔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한 온 집안에 난리가 났었다. 광주로 알아보고, 사람이 광주로 올라가고, 하면서 며칠을 수소문한 끝에 우리 누나는 안전한 것으로 판명이 났다. 우리 누나와 같은 이름의 어떤 다른 여학생이 희생되었던 것이다. 우리 누나와 동명이인(同名異人)이었을 그 어떤 여학생이 죽었다는 것인지 실종되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부상자였다는 것인지는 지금 내 기억에 없다.

죽은 줄 알았던 우리 누나가 살았다는 소식에 난 그저 기뻤다. 사실 누나가 살아있다는 것보다도 누나의 생존소식에 기뻐하던 우리 어머님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그렇게 날 안도하게 만들었고, 날 기쁘게 만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회적인 슬픔과 국가적인 비극을 개인의 아픔으로 옮겨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나는 4·19나 5·16 같은 어마어마한 정치적 격랑의 틈바구니에서 콩나물이 무덤덤하풰 성장을 계속 하듯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으로 성장해가고 있을 뿐이었다.

3. 슬픈 추억뿐인 6학년 시절
나는 광주 수창국민학교를 졸업했다. 5학년 때 광주로 이사왔기 때문에 광주에서 초등학교를 마쳤다. 나는 광주서중에 낙방했다. 후기였던 광주북중에 합격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내 동년배의 소년들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훨씬 덜 성숙했던 것 같다. 서중에 꼭 합격해야 한다는 의식도 내게는 없었고,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전기 중학시험을 치르고, 거기서 실패했으니 후기 시험을 치르는 그런 식이었다.
6학년 때는, 조금 과장하자면 결석을 밥먹듯이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후회가 많이 가는 시절이다. 별로 크게 반항적인 시절도 아니었고 그렇게 크게 저항적인 기질도 아니었을 6학년 초등학생이 왜 그렇게 결석을 자주 했었는지 지금도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는 극단적으로 악화되어서 아버지의 얼굴을 한 달에 한 두 차례 정도 보는 것이 고작일 정도였다.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광주에서의 우리 어머님의 고생은 말로 다하기 어려운 거였다.
어느 자식이나 자기 부모님의 지난 날을 회상할 때 기쁘고 상쾌한 마음이 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모든 자식들에게 부모님은 항상 고생만 하시고 희생만 하신 분으로 투영되어 있다. 내게도 우리 어머님은 ‘희생의 대명사’로 깊이 각인되어 계시다. 올해 82세의 노모를 뵙노라면 늘 슬프다.
아까 얘기로 돌아가서, 우리 아버지 없이 어머니 혼자 필사적으로 노력하시던 때라 학교에서 가져오라는 월사금이나 기부금 따위를 제때제때 가져가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학교에 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새어 버리곤 했다. 나의 6학년 시절 하면 떠오르는 것이 우리 어머님과 당시의 배용진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고 매를 맞던 기억들 뿐이다.

요즈음도 그때를 생각하면 추억의 파도가 먼데서 가슴아프게 출렁거림을 느낀다. 기억에 떠오르는 내 6학년 시절은 딱 두가지 장면 뿐이다. 보고 또 보고 계속 보았던 시험 장면들하고, 어머니와 선생님한테 맞았던 장면들 뿐이다. 나의 6학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해였을런지도 모르겠다.

4. 그렇지만 자랑도 있었다
여기까지 내 프로필을 읽은 분들 중에는 황주홍이 공부는 별로였겠구나 하는 분들이 있을 거다. 당연하다. 사실 그랬다. 그래서 광주서중도 떨어졌다. 그래도 여기서 한 두 가지는 여담삼아 얘기하고 싶은 게 있다. 자랑스러운 추억거리도 조금 얘기해보고 싶다. 내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하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이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구구단은 3학년 때 배우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2학년 때 깨우쳤다. 그것도 혼자 힘으로 깨우쳤다. 운동장 구석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작은 나무의자에 혼자 앉아 나는 구구단을 스스로 만들어가면서 그걸 깨우쳤다. 그 때 내 모습이 지금도 눈에 추억으로 아른거린다. 어떻게 내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해낼 수 있었는지 참 신기하다.

광주일고 1학년 때는 매월 치르는 일제고사 수학시험에서 두 달 연속 100점 만점을 받았다. 그때 수학선생님이셨던 박평환 선생님께서 수업에 들어오셔서 내 이름을 부르시더니 나를 일어서게 하셨다. 그리고 “내가 일고에서 올해로 OO년째 근무하고 있지만 이렇게 수학점수가 좋은 학생은 황주홍이가 처음이다”라고 칭찬을 해주셨다. 그때 갑작스러운 부름과 칭찬에 부끄러움으로 어찌나 감동했던지. 내 가슴은 벌렁벌렁 두근거렸다. 좋아하는 선생님으로부터의 인정은 벅찬 기쁨, 그 이상의 성취감이 되었었다.

5. 육군교도소 생활
내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내가 ‘전과자’가 되면서이다. 나는 유신체제가 최악으로 치닫던 1976년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육군교도소에서 13개월간을 복역하게 된다. 복역하기 전까지의 나는 좋게 말해서 사회정의와 민주주의에 타는 목마름을 지니고 있는 ‘열혈청년’정도였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거다. 그러나 13개월 동안을 ‘국립대학교(※교도소를 그렇게들 불렀다)’에서 ‘수학’한 뒤의 나는 이제 자의식적인 사회과학도로 극적인 변모를 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광주일고에서도 연세대학교에서도 교육받지 못했던 값진 체험을 나는 육군교도소에서 획득한 셈이다.
조금 거창하게 얘길하자면, 교도소에 있던 13개월 동안 나는 사회적 악에 대한 타협없는 투쟁의 삶이야말로 가장 가치있는 삶이라는 자각적 결단을 체계적으로 확정했었다고 감히 회고해서 고백하고 싶다.(※너무 비장하고 거창하게 얘기하는 것 같다!)

육군교도소에 수감되어있을 때 나는 바깥세상의 거의 모든 것으로부터 철저히 차단되었다. 신문과 방송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서적도 접할 수가 없었?(※이런 방식의 ‘교도’정책에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었거니와). 접할 수 있는 것이라곤 종교관련 서적들 뿐이었다.
나는 ‘정치범’이었던 까닭에 면회도 한달에 한번 밖에 할 수 없었다. 내 경우엔 한달에 한번 우리 어머님과 5분 정도의 면회, 그것이 바깥 세상 사람들과의 유일한 접촉기회였다. 그렇게 육체적으로 철저히 분리되고 격리되고 있었지만 그 옆길에서 나의 분노와 나의 설움과 나의 사색은 끝이 없이 이루어지고 전개되고 있었다.

흔히 육군교도소를 ‘6각’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교도소의 모양이 6각형으로 되어있기 때문이었다. 여섯개의 동, 즉 여섯개의 감옥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각 동마다 멸공동, 재생동, 새마을동 등의 명칭이 붙어있었다. 나는 그중 재생동(再生棟)에 수감되어 있었다. 재생동은 정치범과 사상범과 ‘최고수’들이 수감되어있는 동이었다.(※교도소에서는 사형수들을 최고수라고 불렀다.)
재생동에서의 징역살이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밤까지 그리고 새벽까지 잠자기 아니면 생각하기 그 둘 밖에 없었다. 꼭 생각하기를 좋아해서라기보다는 혼자 생각하며 지내도록 강요되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하루종일 진종일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재생동의 수감생활이었다. 다른 5개동의 수감자들은 교도소내의 논밭이나 간단한 수공업 제조 공장같은 작업장으로 문자 그대로의 징역살이를 나가지만, 재생동의 우리들은 하루종일 감방에 앉아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6.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나는 나의 미래가 불안했다. 솔직히, 처음 수감되었을 때는 민족이고 역사고 하는 것들은 내 생각속에 조금도 없었다. 오직 두려움과 불안 뿐이었다. “나는 이제 어찌 되는 것인가? 도대체 나는 여기서 몇 년이나 살다 나가야 하는가? 나의 젊음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인가?” 하는 자탄과 불안과 처연함과 절망의 시간이었다. 나를 이 지경으로 몰아간 독재자와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가끔씩 생겨나기도 했었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오직 나는 두렵고 그저 불안했다.
그것이 초기의 내 수형(受刑) 모습이었다. 특히 우리 어머니가 면회를 하고 돌아가시는 날은 늘 많이 울었다. 그때는 정말 모든 것이 슬펐고 서러웠다. 어머니님께 불효하고 있다는 생각에 뼈에 사무치도록 ‘후회’도 했었다.

다행히 나는 군사재판에서 군 검찰?을 참 좋은 분을 만났다(※이분의 이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유제인 검찰관이셨다). 이분의 배려였던지 아니면 ‘죄상’이 경미했던지 (아마도 그 둘 다로 인해서였던 것 같은데) 나는 군법 1심에서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고나니까 비로소 불안감이 차츰 사라졌다. 형이 확정되고 나니까 체념도 하고 적응도 하게 되는 그런 셈이었던 것이다.
흔히 수감자들이 미결수일 때는 그렇게도 불안해하고 울부짖다가도 일단 형이 확정되어 기결수가 되고 나면 한결 침착해지고 교도소생활에 무난히(?) 적응하게 되는 걸 많이 보았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1년 징역형을 받고 나니 마음이 다소 정돈되는 것 같았다. “1년 정도야…”하는 반항심리 비슷한 자신감과 객기같은 것이 발동되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이런 심리였던 것이다. “그래, 야, 이 개새끼들아! 엎드려 코를 막고서도 1년은 버틸 수 있다!”

사실상의 기결수(항소와 상고 등으로 계속 재판중이었긴 하지만)가 된 뒤로 나는 비로소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누구를 위해서 살아갈 것인가? 그것이 ‘기결수 황주홍’의 화두와도 같은 생각의 초점이었다. “좆같은 세상, 제대로 한번 살아보자.” 그런 오기와 결의와 다짐 같은 것이 내 생각의 밑을 흐르는 분위기였다. 20대 젊은이의 생각은 첨예해지고 격렬해갔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 꽤 많은 종교서적들을 읽었던 것 같다. 특히 해방신학, 민중신학, 희망의 신학, 정치신학, 혁명의 신학 등등 사회참여적 경향의 신학서적들을 읽으면서 부족하지만 사회과학적 인식의 지평을 다소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기결수 황주홍의 ‘의식화’를 위한 소중한 기회였던 셈이다.

7. 죄와 벌 - 내 사형수 친구들
한 가지 추가로 얘기하고 싶은 내용은 최고수, 즉 사형수들에 관한 내 추억이다. 나는 재생동에서 최고수들과 가까워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다. 언제 어떻게 내가 그렇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재생동내의 ‘법무사’가 되었다.

나의 법무사로서의 첫 과제는 간수들의 연애편지 대필작업이었다. 육군교도소이기 때문에 간수는 헌병들이었다. 헌병들이 2교대로 24시간 내내 복도를 걸어다니면서 우리를 감시했다. 우리와 비슷한 또래의 헌병 간수들은 바깥세상에 있는 여자친구들에게 연애편지를 쓸 일이 많았을 것이다. 그들중 몇몇이 그 연애편지를 내게 부탁했다. 지금도 내가 대필했던 연애편지의 몇몇 상투적이고 감상적인 귀절들이 기억에 남아있다.

연애편지 대필사라는 ‘특권’ 때문에 아마도 나는 종이와 볼펜을 소지한 유일한 수감자였을 것이다. 자연히 다른 동료 수감자들의 항소이유서 등을 써주게 되었다. 법전이 있을 리 없고 법률지식에도 거의 문외한인 나였지만 상식적인 수준의 법률지식과 논리력을 가지고 주로 정상참작을 호소하는 항소·상고 이유서들을 썼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수감자들은 변호사를 선임하지만, 그렇지 못한 수감자들도 꽤 많았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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