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작품을 해설하는 일은 평소 습관에 어긋나지만 이 중단편집에 한해서 책 앞부분과 각 작품 앞에 짧은 소개글을 덧붙이기로 했다. 내가 소설을 써 온 18년이라는 기간에서 초기와 중기와 최근의 대표작들을 선정해서 만든 책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를 둘러싼 세계가 변한 것처럼 나 자신도 변화했고, 과거에는 나름대로 괜찮게 본 작품들도 지금 와서 읽으면 얼굴이 붉어지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하얘지곤 한다. 그런 연유로, 요란스러운 잡지 표지 아래 누렇게 변색된 책장 속에 그대로 묻어 두고 싶은 작품도 상당히 많다. 내가 그것들을 자발적으로 재판하는 일은 결코 없겠지만, 여기 모아 놓은 작품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애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적절한 대목에서 개인적인 감상을 술회할 생각이다.
내가 쓴 글들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싶지는 않고, 정당화 내지는 변명을 시도할 생각 또한 전혀 없다. 작가는 작품으로만 말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각 작품 앞에 딸린 소개글은 오로지 해당 작품을 내 자신의 경험적 성장이라는 맥락 안에서 자리매김할 목적으로 쓴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는 자전적 작품이다. --- pp.10-11, 「서문」 중에서
어딘가에서 경외심이 솟구쳤다. 그러나 히스테리를 일으킬 기색은 없었기 때문에 그는 계속 형태를 만들어나갔다.
그럭저럭 지평선을 만들어내자 어둠은 그 너머로 빨려들어갔다. 하늘이 푸르스름해질 무렵 그는 과감하게 한 떼의 검은 구름을 만들어냈다. 거리와 깊이를 만들어 내려는 노력에 저항이 느껴졌기 때문에, 극히 희미한 파도 소리로 이 정경을 보강했다. 구름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이 청각적 거리감으로부터의 전이(轉移)가 천천히 다가온다. 노도처럼 밀려오는 아크로포비아[高所恐怖症]에 대항하기 위해 서둘러 높은 숲을 만들었다.
패닉이 사라졌다.
렌더는 높은 나무에 주의를 집중했다----참나무와 소나무, 포플러와 플라타너스. 그것들을 창처럼 여기저기에 던져놓고, 초록색과 갈색과 노란색을 거칠게 배열했다. 아침 이슬에 젖은 풀로 만든 두터운 융단을 펼쳤고, 그 위에 잿빛 바위와 초록빛을 띤 통나무들을 불규칙한 간격으로 떨어뜨렸다. 머리 위에서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얽히게 만들었고, 계곡 전체에 균일한 그림자를 떨어뜨렸다.
그 효과는 경이로웠다. 마치 전 세계가 몸을 떨며 한 번 훌쩍인 듯한 느낌. 그리고 침묵. --- pp.105-106,「형성하는자」 중에서
더 이상 그를 방해하는 검은 박쥐들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크레이터 몇 개와 조우했다. 방사능 수치가 또 올라갔고, 한 번은 엄청나게 큰 들개 무리의 추적을 받았다. 들개들은 포효하며 장갑차 곁을 달렸고, 타이어를 물어뜯으며 미친 듯이 짖고 낑낑거리다가 뒤로 쳐졌다. 산을 또 하나 지나치려고 하자 봉우리가 그의 좌측을 향해 밝은 증기를 토해내며 천둥 비슷한 굉음을 발했고, 바퀴 아래의 지면이 진동했다. 그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재 사이로 돌진했다. 갑작스런 홍수 사태로 물세례를 받은 엔진이 쿨럭거리다가 두 번이나 멈췄지만, 그때마다 다시 시동을 걸고 사방에서 몰려오는 파도를 헤치고 나아갔다. 이윽고 더 높고 건조한 지대로 오르자 소총을 든 사내들이 앞길을 가로막으려고 했다. 기총소사를 하고 유탄 한 발을 선사한 후 계속 달렸다. 어둠이 사라지며 흐릿한 달이 떠오를 무렵에는 상공을 선회하던 검은 새들이 그를 향해 달겨들었지만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잠시 뒤에는 새들도 사라졌다.
녹초가 될 때까지 운전을 계속했다. 그런 다음 조금 더 음식을 먹고 알약을 하나 더 삼켰다. 그 무렵에는 펜실베이니아까지 와 있었다. --- pp.281-282, 「지옥의 질주」 중에서
왈라비 호가 타우 세티 항성계에 도착하자마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완전 편제의 승무원을 태운, 왈라비 호와 동급의 우주전함 세 척이 매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ICI는 항성계 전체를 사흘 동안 격리했다. 따라서 스크린에 칠흑의 버섯이 나타났을 때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주선의 선적을 확인하는 절차는 불필요했다.
그러나 견인 광선의 첫번째 일격은 빗나갔고, 왈라비 호의 신임 일등 항해사는 경보가 울리자마자 탑재된 모든 무기를 모든 방향으로 동시에 발사했다. 이것은 코고가 자신의 작전 규모를 감안해서 사격 통제장치에 가한 작은 개수(改修) 중 하나였다. 안전회로 따위는 없고, 필요하다면 자살공격함으로 변신한다. 이것은 그 어떤 무리에도 속하지 않는 외톨이 늑대의 전술이었다. 중앙 제어 버튼이 단 한 개----이것을 누르면, 왈라비 호는 레이저 가시를 갖춘 고슴도치가 되어 모든 방향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찌른다.
코고는 위상 항행으로 재돌입할 준비를 했지만, 그러기까지는 43초가 걸렸다. --- pp.405-406, 「복수의 여신」 중에서
두 사람은 춤추고 있었다. 바다는 돔 위를 덮은 상록(常綠)의 금빛. 불가사의할 정도로 젊은 날이었다.
열여섯 시간 계속된 〈파티〉의 생존자들은 지친 몸으로 서로 껴안고 있었다. 아픈 발을 끌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댄스플로어에 아직도 남아있는 것은 여덟 커플뿐이었고, 역시 피로에 지친 악사들은 이들에게 최대한 느린 곡을 제공하고 있었다. 초록색 사발 같은 하늘이 대지의 파란 타일과 합류하는 세계의 가장자리. 다른 500여명은 바닥에 퍼질러진 채로, 옷깃을 느슨하게 하고, 입을 멍하게 열고, 탁자에 올려놓은 금붕어처럼 벽 건너편의 물을 응시하고 있다.
"비가 올 것 같아?"
그가 물었다.
"응."
그녀가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날씨 얘긴 그만하고. 자, 달에 일주일 휴가를 얻는 얘기 말인데...."
"어머니 지구에 머무르는 게 뭐 어때서?"
그녀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누군가가 비명을 올렸다. 그와 거의 동시에 뺨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명이 멈췄다.
"달에는 한 번도 못 가봤거든."
그녀는 조금 재미있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난 가 봤는데, 맘에 안 들었어."
"왜?"
"돔 밖에 나가면 차갑고 미친 별빛뿐이고, 돔 주위에는 온통 거무스름한 죽은 바위들이 널려있을 뿐이니까."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마치 〈시간〉의 끝에 서 있는 무덤처럼 보였고...." --- pp.477-478, 「마음은 차가운 무덤」 중에서
“많은 일이 일어났소.”
랜슬롯이 대답했다.
“자넨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그것들을 모두 경험했어. 말해 주게. 세계는 그 당시보다 더 좋아졌나, 아니면 더 나빠졌나?”
“어떤 면에선 좋아졌고, 어떤 면에서는 나빠졌소. 예전과는 달라졌소.”
“어떤 식으로 좋아졌나?”
“생활을 편하게 하는 방법들이 많이 생겨났고, 인류의 지식의 총합도 대폭 증가했소.”
“나빠진 점은?”
“세계에 사는 사람들 수가 훨씬 더 늘었소. 그 결과, 빈곤과 질병과 무지에 시달리는 사람들 수도 훨씬 더 많아졌소. 세계 자체도, 환경 오염이나 자연 질서에 대한 갖가지 파괴 행위로 인해 큰 손상을 입었소.”
“전쟁은?”
“어딘가에서, 언제나 누군가가 싸우고 있소.”
“도움을 필요로 하겠군.”
“그럴지도 모르오. 아닐 수도 있지만.”
멀린은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지?”
“인간은 변하지 않았소. 인간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합리적인 동시에―불합리한 존재이기도 하오. 도덕적이고 준법 정신을 가졌는가 하면, 그와는 정반대인 경우도 있소―옛날과 마찬가지로 말이오. 온갖 종류의 새로운 지식을 터득했고, 온갖 종류의 새로운 상황이 생겨났소. 그렇지만 당신이 잠들어 있는 사이에 인간의 본성이 그렇게 크게 바뀌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그 사실을 변화시킬 수는 없을 거요. 시대의 특색 몇 가지를 바꿀 수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신이 세상사에 개입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시오? 지금은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긴밀한 상호의존 관계로 묶여 있기 때문에, 당신조차도 자기 행동이 가져올 결말을 모두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할 거요. 이익보다도 해가 더 클 수도 있소. 그리고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인간성은 결코 바뀌지 않을 거요.”
“자네답지 않은 말이군, 랜스. 옛날의 자네는 그렇게 깊게 생각하거나 하는 사내가 아니었는데.”
“생각할 시간은 듬뿍 있었소.”
“그리고 나는 꿈을 꿀 시간이 듬뿍 있었지. 전쟁이야말로 자네의 본령이야. 거기서 떠나면 안 돼.”
“이미 오래 전에 그 일에서는 손을 뗐소.”
“그럼 지금은 뭘 하고 있나?”
“감정가요.”
멀린은 고개를 돌리고 영약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다시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온몸에서 강렬한 에너지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그렇다면 자네의 맹세는 어떻게 됐나? 불의를 바로잡고, 악인을 응징한다는…….”
“오래 살면 살수록 무엇이 불의이고, 누가 악인인지 판단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졌소. 그걸 확실하게 설명해 준다면 다시 그 일에 복귀할 용의도 있소.”
“갤러해드라면 결코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진 않았을 거야.”
“갤러해드는 젊고, 순진하고, 사람을 의심할 줄 몰랐소. 내 아들 얘기는 하지 말아 주시오.”
“랜슬롯! 랜슬롯!” 멀린은 손을 들어 상대방의 팔 위에 올려놓았다. --- pp.586-587, 「캐멀롯의 마지막 수호자」 중에서
바라는 양손을 들어올렸다. 그녀가 주문을 외우자 몸에서 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빛은 파도처럼 그녀의 전신을 휩쓸더니 마지막에는 그녀의 양손 주위로 가서 뭉쳤다. 그 빛에 반쯤 눈이 멀 지경이 된 나는 손을 들어 눈을 가리려고 했다.
내 몸통을 눈부시게 밝은 띠들이 에워싸면서 내가 그림자와 접촉할 가능성을 완전? 차단했다.
"정말 아름답지 않아?" 바라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빛의 사슬에서는 절대 빠져나올 수 없어. 그럼 여기서 지난 과오를 반성하고 있어. 아듀."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말하면 나는 그 인물의 말을 들을 수 있다.... 바라는 자기 침실의 어둑어둑한 일각에 앉아 수정구 속의 내 모습을 들여다보며 남자란 못 믿을 생물이니 어쩌고 하며 불만스럽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내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도플갱어를 쓰면 돼!" 그녀는 손뼉을 딱 마주치며 말했다. "생령(生靈)을 보내는 거야----그자의 모든 기술을 가졌지만 딴 생각을 하지 않는!"
그녀는 곧 새로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 즉시 나는 가슴에 지독한 통증을 느꼈다. 이것은 실로 위험천만한 마법이다----복제당하는 당사자에게는 말이다. 도플갱어가 존재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오리지널 쪽은 더 약해지고, 급기야는…….
--- p.610, 「그림자 잭」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