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 난무하는 도시에서 적응하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자연상태’에서의 삶이 ‘고독’할 것이라는 홉스의 예언은 틀린 것 같다. 이스라엘이 서베이루트를 점령했을 때, 그리고 레바논 내전이 최악의 상태로 치달았을 때, 베이루트 사회는 완전히 무너지고 모든 공적인 법과 질서는 사실상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대다수 베이루트 시민들이 보여준 첫 번째 본능이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웃의 아내를 범하거나 길모퉁이의 식료품점에서 물건을 훔쳐내는 그런 행동이 아니었다. 물론 절도나 은행 강도, 그리고 몸값을 노린 납치와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사람들 모두가 이같이 행동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런 일들이 광범위했다고 말할 수 없다. 노상강도를 한다거나 다른 사람들 집에 침입하는 등의 사건은 매우 드물었다.
베이루트 사람들의 행위를 살펴보면 인간의 자연상태가 홉스의 예측과 달리 사회적 동물의 그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큰 규모의 정부와 사회가 사라지면 사람들은 스스로 공동체와 사회구조를 찾아내거나 창조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 같다. 베이루트는 다수의 이웃으로 구성된 모자이크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각각의 이웃은 가족과 친구, 종교를 통해 서로 연결됐다. 대규모의 베이루트 사회와 정부가 붕괴하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작은 사회로 단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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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권위주의와 부족주의만으로는 하마 학살사건이나 오늘날의 중동 정치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중동에서 작동하는 세 번째 정치전통이 있다. 20세기 초 영국이나 프랑스, 이탈리아 같은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이 지역에 강요한 전통이다. 바로 민족국가다.
권위주의 왕조가 널리 퍼져 있던 중동에서 민족국가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오스만과 압바스, 그리고 여타 어떤 권위주의 왕조의 오랜 전통에서도 사람들은 그들이 속한 제국 혹은 국가에 애국심을 갖거나 정체성을 느끼지 않았다. 버나드 루이스의 설명은 이렇다. “특정한 명칭을 가진 국가나 민족이 존재했고 사람들이 여기에 일정한 감정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이 국가나 민족에 속한다는 정치적 소속감이나 정치적 충성심을 느끼지는 않았다.” 적어도 현대 서구적 의미의 정체성이나 충성심은 없었다. 제국과 그 지배자들은 실생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때로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정치적 소속감은 종교나 살고 있는 지역의 가까운 집단으로부터 나왔다. 부족, 씨족, 촌락, 부락, 분파, 지역 혹은 직업적 연계 등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그들의 제국주의 펜을 꺼내 들고 아직 오스만 제국으로 남아 있던 지역을 분할하고, 서구 모델에 따라 중동에 일련의 민족국가들을 만들어냈다. 국가들 사이의 경계는 깔끔한 다각형이 됐다. 직각으로 그려진 국경은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혼돈에 가까운 실생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오늘날 중동 국가들의 국경은 이 과정에서 그어졌다. 오늘날의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팔레스타인, 요르단, 그리고 걸프 만의 여러 산유국들 사이의 경계가 그렇다. 심지어 이들 국가의 명칭조차 외부에서 주어졌다. 오늘날의 대부분 중동 국가들이 탄생한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의지와 무관했고, 공통의 역사적 경험이나 민족적 혹은 언어적 결속이 체계적으로 발전한 결과가 아니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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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동안 이스라엘은 PLO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모든 노력을 다했다. 일부 미국 관리들은(그리고 미국의 유대 지도자들은) PLO 이외의 대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부추기기까지 했다. 그리 소란스럽지 않고 요구사항도 그렇게 많지 않으며 협상 테이블에 정직하게 임하는 훌륭하고 친절한 팔레스타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총리직에 오른 라빈은 곧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 것 같다. “잘 알지? 우리는 모든 방법을 다 써봤다. 그런데 하나도 효과를 본 방법이 없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무시해보기도 하고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고 해보기도 했다. 효과가 없었다. 그들 중에서 배신자를 만들어서 요르단 강 서안을 책임지게 만들기도 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레바논에서 PLO를 쫓아냈는데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PLO 대신 요르단의 후세인 왕을 상대해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가자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에서 하마스 근본주의자들을 부추겨보기도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마드리드 회의에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지구의 저명인사들을 참석하도록 만들고 PLO가 아닌 팔레스타인 대표라고 변장도 시켜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주사위를 던져야 할 시간이 왔다. 라빈은 이렇게 표현했다. “받아들여질지의 여부를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제가 당대표를 선출하는 노동당 예비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정했을 때 저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총리라는 자리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국민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지지여론이 올라가든 내려가든, 제 입장을 바꾸지 않을 작정이었습니다. 인티파다를 경험하면서 저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전쟁이나 폭력을 통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목적을 달성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조금도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서 진행되는 상황을 지켜보니 인티파다 혹은 하마스 둘 중의 하나라는 점이 명백했습니다. 이들 외에 제3의 협상 상대란 없었습니다. 가면극을 벌이는 일을 끝낼 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라빈이 암시했듯이 그는 실제로 아라파트를 선택했다. 그를 제외한 다른 대안은 이미 효과가 없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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