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한 데다 의욕마저 잃은 폴리가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동안, 더 큰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폴리가 한 손에 커다란 음악 책을, 다른 손에는 차와 함께 먹을 롤빵이 든 종이봉투를 들고 서둘러 걸어가는데, 톰과 트릭스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천천히 다가오는 동안, 폴리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차림새도 멋졌고, 무척이나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햇빛이란 햇빛과 유쾌한 산책길은 온통 두 사람 쪽에 있고, 황량한 겨울바람과 진흙은 모두 폴리 쪽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폴리는 길을 건너가 인사하며 웃어 보이려 했다. 그러나 폴리를 먼저 본 트릭스가 갑작스레 눈길을 돌렸다. 톰은 폴리를 보지 못했다. 톰은 지나가는 멋진 말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으니까.
트릭스는 일부러 딴청을 피우고, 톰은 여전히 말을 보고 있었다. 폴리는 그 상황을 한눈에 보았다. 서로 마주 보고 다가오던 그 순간, 아무도 말을 하거나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모든 일은 처음처럼 느닷없이 끝나 버렸다. 폴리는 계속해서 걸었지만, 꼭 뺨이라도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믿을 수가 없어. 이 모든 게 트릭스 짓이야. 그래, 트릭스가 더는 톰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겠어. 종이봉투를 들고 있다고, 내 밥값을 내가 번다고 나를 업신여기는 거라면, 좋아. 더 이상 톰을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야."
폴리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하며 종이봉투를 세게 움켜쥐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고,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아무 잘못 없는 톰까지 야속해지기 시작했다.
"톰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pp.36~38
오페라가 끝나고 밖으로 나가려고 기다리는 사이, 폴리는 파니가 톰에게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트릭스가 알면 뭐라고 그럴 것 같니?"
"무슨 뜻이야?"
"세상에! 오늘 밤 네가 한 행동을 생각해 봐."
"모르겠어. 난 신경 안 써. 그냥 폴리잖아."
"음, 난 견딜 수 있어. 그리고 내가 왜 트릭스처럼 즐기면 안 되는 건지 모르겠어."
"네가 조심하지 않으면 넌 푹 빠지게 될 거야. 폴리는 슬슬 즐기고 있어."
"나는 그래서 기뻐. 시드니도 마찬가지고."
"난 단지 네가 걱정되어서 말하는 거야."
"나 때문에 괜한 걱정하지 마. 난 이미 실컷 혼났어. 더 이상 못 참겠어. 가자, 폴리."
폴리는 톰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하지만 마음은 아프고 화가 났다. "그냥 폴리잖아."라는 말에 마음이 몹시도 아팠다.--- pp.124~125
"음, 모든 것의 긍정적인 면을 보려고 노력해. 그러면 정말 큰 도움이 돼. 있잖아,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이는 것에도 장점과 가능성이 얼마나 많은지 모를 거야. 볼 줄 아는 눈만 있다면 말이야."
"난 어떻게 하는지 몰라."
파니가 풀이 죽어 대답했다.
"배우면 되지. 나도 그랬어. 침울하고 무척이나 초조하고, 불행하다는 느낌이 들곤 했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지. 그럴 때면 난 내가 해야 할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해. 그런 느낌을 잊으려고 말이야. 그러면 더 쉬워진다는 걸 알게 됐어. 좀 떨어져서 네 문제를 바라봐. 그러면 문제의 반은 해결된다고 밀스 부인이 말씀하셨어."
"제대로 되는 일이 없으니까 화가 나."
파니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자, 뭐가 그렇게 너를 초조하게 만드니?"
폴리가 걱정스레 물었다.
"많은 것들."
파니는 이야기를 시작하려다 문득 멈추었다. 어쩐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새 모피 옷을 가질 수 없다는 것, 봄에 파리에 갈 수 없다는 것, 시드니 씨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안절부절못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pp.137~138
"그런 말씀을 하니 정말 기쁘군요. 기꺼이 폴리 양의 말씀을 귀담아듣지요. 폴리 양은 사람들의 좋은 면만 보는 것 같네요. 제 생각에는, 그래서 폴리 양이 이 세상을 그렇게 멋진 곳이라고 믿는 거예요."
"아, 하지만 전 그렇지 않아요. 세상이 아주 힘들고 우울한 곳처럼 보일 때도 가끔 있어요.그래서 고마워할 줄 모르는 까마귀처럼 제 고통을 침울한 목소리로 떠들어 대기도 해요."
"우리가 함께 그 고통을 좀 더 가볍게 만들 수는 없나요?"
시드니 씨가 어찌나 다정하게 물어보는지, 폴리는 감히 고개를 들어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폴리는 시드니 씨의 눈동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고맙지만, 안 돼요. 제 문제는 제가 감당할 수 있어요. 문제를 피하려고 하다가는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을 피하려 해도 마찬가지예요."
시드니 씨가 덧붙였다. 그 말에 폴리의 얼굴이 이마까지 붉어졌다.
"공원이 참 아름답지요."
당황한 폴리가 화제를 돌렸다.
"그래요, 정말 상쾌한 산책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시드니 씨는 솜씨 좋게 폴리가 빠져 버릴 함정을 놓으며 물었다.
"네, 정말 그래요! 여기를 보면 언제나 기분이 좋아져요. 늘 그렇지만, 특히 이런 계절에는 더 좋지요."
아, 폴리, 폴리. 방금 전에 공원이 지루해졌다고 이 남자에게 말해 놓고 어쩜 그렇게 멍청한 말을 하는 걸까! 시드니 씨는 바보도, 어릿광대도 아니었다. 그는 폴리의 말과 여러 가지 사실을 짜 맞추며 갖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폴리 역시 두 사람에 대해 떠도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문이 싫어서,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보여 주려 하는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pp. 169~171
"정말 마음이 놓여. 아빠가 모든 걸 다 포기해야 한다고 하시고 엄마가 우리 모두 거지라고 말씀하셨을 때, 난 커다란 깡통을 차고 식어빠진 음식을 구하러 돌아다녀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머리에 낡은 망토를 쓰고 말이야. 언젠가 그러고 싶다고 말한 적은 있지만 사실은 아닌 것 같아. 옥수수로 만든 빵이랑 차가운 감자는 정말 싫어. 가난한 애들은 만날 그런 것만 얻거든. 그레이스랑 다른 애들이 내가 발을 질질 끌며 뒷문을 돌아다니는 걸 보는 것도 싫어."
"아빠가 할 수만 있다면, 우리 막내딸에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게 할 거다."
쇼 씨가 딸을 바짝 당기며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모드가 아버지의 얼굴에 자기 뺨을 부비며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난 그럴 거예요, 아빠. 아빠가 그렇게 하라고 하면요. 난 진짜 아빠를 돕고 싶어요."
"저도요!"
파니가 소리쳤다. 파니는 빛바랜 실크 드래스를 입고 장갑을 빠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고 있었다.
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재빨리 현실을 받아들이고, 아버지가 늘어놓은 서류를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반드시 증명하고 싶었다.
"우린 이겨 낼 거다, 얘들아.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다만 불편함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면 된다. 자부심을 가지고, 가난이 수치가 아니란 것을 명심하렴. 정직하지 못한 게 부끄러울 뿐이지."--- pp. 200~201
"난 늘 자두를 넉넉하게 넣어. 설탕과 향신료를 뿌려서 사람들을 위해 멋진 자두 케이크를 만드는 일이 난 제일 좋아. 내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물 중 하나거든."
"이번엔 네가 제대로 알아맞혔는걸, 폴리. 넌 너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설탕과 향신료를 듬뿍 넣어 주는 재능이 있어. 우리가 좋든 싫든 삶이라는 케이크를 먹어야만 한다면, 그런 재능이 있다는 건 행운이지."
톰이 진지하게 말하자 폴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모드는 함성을 질렀다.
"난 오빠가 설교를 하는 줄 알았어."
"이따금 나도 설교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톰이 폴리 쪽을 보더니 곧 하하 웃으며 덧붙였다.
"아가씨, 당신 집안은 솜씨가 더 좋을 텐데요. 설교를 해줄 수는 없나요?"
"그럼 짧게 설교를 하나 하지요. 신자 여러분, 인생은 자두 케이크와 같습니다."
폴리는 밀가루가 잔뜩 묻은 손을 들어 올리며 말을 시작했다.
"어떤 케이크에는 자두가 꼭대기 부분에 온통 몰려 있습니다. 우리는 신나게 자두를 먹다가 자두가 다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다른 케이크는 자두가 바닥에 깔려 있어서, 자두를 찾아봐도 헛수고입니다. 종종 너무 늦게 발견해서 맛있게 먹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잘 만든 케이크에는 자두가 골고루 넓게 퍼져 있습니다. 한 입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아주 맛있지요. 살아가면서 우리는 모두 자신의 케이크를 만듭니다. 그러니 신자 여러분, 여러분의 케이크를 최고의 요리법에 따라 반죽하고, 고른 온도로 구워 감사한 마음으로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마음을 기울입시다."
"좋아, 좋았어!"
톰이 나무 숟가락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아주 멋진 설교였어, 폴리. 짧고, 듣기 좋고, 재치 있고, 조금도 졸리지 않고."
--- pp. 228~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