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네 명에게 품절되었다는 전화 혹은 확인전화를 걸게 하기 위해서요.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어요. 혼자서 서로 다른 네 사람의 이름을 대고 주문을 하면서, 들키지 않으려고 각각 다른 접수자에게 주문했잖아요? 특히 품절인 책을 골라서 주문한 걸 보면 확실해요. 전화를 받은 사람은 주문한 책을 구했다는 서점의 연락을 받는다 해도 ‘모른다’며 한마디로 거절하면 그만이잖아요? 자기가 주문하지도 않은 책을 무리해서 살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이 가짜 주문을 한 사람은 전화를 받은 사람이 혹시라도 책값을 지불하는 일이 없도록 특별히 신경을 쓴 거예요. 그렇다면 뭘까요? 이름을 사용당한 사람에게 우리가 전화를 걸게 하는 것, 그게 바로 목적이라는 거지요.”
교코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다에의 생각을 부정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갈수록 왜 그랬는지를 더 알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전화로 그 사람들에게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그 사람들이 특별히 전화 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이야? --- pp.21-22, 〈이상한 주문〉 중에서
좀 전의 그 아이가 엉뚱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던 거다. 판매대에 한쪽 무릎을 대고 한쪽 손을 있는 힘껏 뻗어 책꽂이 맨 위 칸에서 책을 잡아 빼려고 낑낑대고 있었다. 한계에 가까운 자세를 취한 그 아이의 몸이 위태롭게 떨렸다.
얇은 신서라면 그래도 괜찮다. 가벼운 무크지라면 간단히 주의를 주고 끝내면 된다. 하지만 그 아이가 손을 뻗고 있는 건 사전. 그것도 두꺼운 《고지엔(일본의 중형 국어사전. 24만여 어휘와 국내외 사회정세, 3,000점의 도판, 지도를 수록하여 백과사전의 역할도 겸함)》이다.
“위험해!”
교코는 그 자리에서 튀어 올라 좁은 통로를 내달렸다. 남자아이의 머리 바로 위에서 두꺼운 사전이 밀려나와 조금씩 기울어지고 있었다. 마치 벼랑 끝에 내걸린 자동차처럼.
거꾸로 떨어진다?.
사전을 붙잡을 여유가 없었다. 남자아이에게 달려들어 밀치는 순간, 교코는 머리에서 어깨까지 충격이 내달리는 걸 느꼈고 그 순간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 pp.67-68, 〈너와 이야기하는 영원〉 중에서
나는, 세후도에서 사랑을 만났어요?.
술집 ‘봄 꽃집’에 방 하나를 잡아서, 총 열네 명이 모여 오래간만에 회식자리를 가졌다. 가장 싼 연회코스 요리에 술과 음료는 무제한으로 해놓고, 우선 맥주로 건배. 여자들은 이어서 알록달록한 색깔의 칵테일을 주문하는 등, 떠들썩하니 한창 흥이 올랐는데…….
느닷없이 튀어나온 말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콩트의 한 장면처럼 그대로 멈춰라, 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젓가락으로 집어 들던 토마토가 굴러 떨어지고, 방금 입에 물었던 맥주가 뿜어져 나오고, 따르던 와인이 잔 옆으로 쏟아지고, 화장실에 가려고 엉덩이를 반쯤 들어 올리던 사람은 그대로 엉거주춤, 메뉴를 들여다보던 이들도 이마를 꽝 했다.
“뭐? 사랑이라고?”
‘사랑’이라니, 뭔 소리야? --- pp.114-115, 〈가나모리 군의 고백〉 중에서
“이 서점에는 폐를 끼치지 않을 겁니다. 그건 괜찮아요. 지난번에도 문제없이 끝났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녀석은 사인회를 통해서 나하고 게임을 하려는 거예요.”
“게임.”
“네. 이런 식이지요. ‘사인회 날까지 내 정체를 알아냈다면 내가 내미는 책에는 가게히라 기마라는 사인 대신에 레드 리프라고 써라. 그러면 게임오버, 너의 승리다. 그 후로는 모든 행동을 그만두겠다.’ 알겠습니까? 녀석은 나한테 도전을 한 겁니다. 요전번 사인회에서는 누군지 알아내지 못해서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걸 놓고 나를 얼마나 조롱하던지. 악의에 차서 빈정대더군요. 분했어요. 지금도 냉정을 유지하기 힘들어요. 그런 경험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사인회야말로 녀석을 잡을 절호의 찬스이기도 하니.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 게임에서 이기고 싶어요. 이겨서 이번에야말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결말을 내고 싶어요. 부탁합니다. 사인회에서 내가 ‘레드 리프’라고 쓸 수 있게 도와주세요.” --- pp.188-189, 〈사인회는 어떠세요?〉 중에서
“뭐하는 거야?”
“노래를 들었어요.”
“노래?”
“동요예요. 저, 그거요. 굉장히 귀여운 아이들 노래. 교코 언니도 알 텐데. 이런 거예요. 으음, 하얀 염소가 편지 보냈다. 검은 염소가 읽지 않고 먹었다. 할 수 없어서……”
교코는 당황해서 손을 뻗어 다에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다에 씨, 왜 갑자기 큰 소리로 노래를 하고 그래? 여긴 매장이야.”
“이 노래를 매장에서 들었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없어진 게 하얀 봉투라면 편지 같았겠구나 싶어서.”
--- p.272, 〈염소 씨가 잃어버린 물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