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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란씨

오란씨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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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0년 02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344쪽 | 488g | 148*210*30mm
ISBN13 9788937482984
ISBN10 8937482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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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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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형처럼 하늘을 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차창 위로 별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별이 쏟아져 내렸다.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드려요. 오오 오란씨.’
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자는 자고로 오란씨 같은 거야, 이렇게 먹고 버리는 거야. 그치만 딱 한 사람한테는 별도 따 주고 모든 걸 다 주는 거야. 그게 남자야.’
그는 목이 말랐다. 왜 그날 설희가 준 오란씨는 먹으면 먹을수록 목이 말랐는지 알 것 같았다. 파인애플 향이 나는 오렌지 탄산음료 오란씨가 못 견디게 마시고 싶었다. --- pp.73-74, 「오란씨」 중에서

이제야 확연해지는 듯했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버스 안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빠른 속도로 달리는, 유리창이 있는 덫일 뿐이었다. 덫에 두 발목이 꼭 붙들려 버렸다. 전화를 받던 것도, 정류장을 지나쳐 온 것도, 교통 정보를 듣지 못하게 한 것도, 다리가 잠겼다는 것도 모두 거짓이었던 것이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설령 내가 시체가 되어 발견되더라도 영원히 미제로 남아선 안 되었다. 시체로 도로변 풀숲에 버려질 내 모습을 떠올리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볼펜을 꺼냈다. 최대한 그가 눈치채지 않도록 나는 가방을 무릎 위에 세웠다. 그리고 의자 시트 위에다 내 이름과 후대폰 번호를 적은 후 sos라고 적었다. 누군가 이 번호로 장난 전화라도 건다면 수신자 통화 기록이나 문자메시지가 온 것이 단서가 될지 몰랐다. 그렇다면 반드시 전화가 올 수 있도록 써야 했다. 그래서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sex라고 썼고 다시 그 앞에다 bus라고 썼다. 버스 섹스라니. 기가 막혔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운전사가 눈치채지 않도록 열심히 유리창에 손자국을 냈다. 지문이 남을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아래에 또 sos라고 썼다.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 p.94, 「버스-슬로셔터 NO.1」 중에서

몽타주를 주머니에서 꺼내 자주 들여다봤다. 유리문 옆에 붙어 있는 거울을 바라보며 모자챙을 바로잡았다. 자꾸 보니 몽타주 얼굴은 나와도 조금 닮은 것 같았다.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훑어 내렸다. 시계를 봤다. 아직 교대 시간은 10분 정도 남았다. 나는 화장실을 갔다. 정장을 말쑥하게 입은 중년 남자가 나오면서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신경이 곤두섰다. 몽타주 속의 인물과 조금 닮은 것도 같았다. 그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나를 지나쳐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구두 속의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을 기억해 보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문득 나는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 pp.133-134, 「몽타주-슬로셔터 NO.2」 중에서

아무리 지독한 냄새라도 한참 맡고 있으면 익숙해집니다. 불운이나 불행도 오랫동안 계속되면 익숙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신선한 공기를 단 한 번이라도 맡거나, 전혀 다른 냄새로 환기된 다음 후각은 예민해지고 맙니다. 그것은 운명과 참 비슷합니다.
냄새에 대한 생각도 사람마다 달라서 누구에게는 '악취'일 수 있는 것이 누구에게는 향기로운 냄새가 될 수도 있습니다.
--- p.173, 「어느 살인자의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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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주는 효용성과 편이성에 의해 당신의 삶은 더 안락해졌는가. 아니다. 배지영의 대답은 그렇다. 번지르르하게 포장된 세계의 이면엔 오늘도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 난무한다. 이 폭력적이고 동물적인 세계엔 출구가 없다. 생생하고 야성적이며 속도감 있게 다가오는 배지영의 문장들은 오늘의 안락과 평화가 기실 얼마나 허황되고 교묘한 거짓말로 짜여 있는지를 가차 없이 증언하고 있다. 당신이 걷고 있는 발밑을 지금 보라. 혹 위태로운 칼날 위가 아닌가. 배지영이 환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단호하고, 섬뜩하고, 발칙하다.
박범신(소설가,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
21세기 한국 소설의 한 돌연변이를 만들어 내기에 충분한 잠재력을 지닌 배지영의 소설은 신예의 소설답게 세상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횡단면으로 분할하고 재구성한다. 배지영 소설은 익숙하되 낯설며, 친숙하되 섬뜩하다. 이는 전적으로 배지영의 소설이 현재의 세계를 이전과는 다른 기준으로 분할하고 전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지영 소설은 기존의 보편성에 고착되어 있어 자유로워 보이면서도 자유롭지 않은 삶의 디테일들을 자신만의 새로운 도식에 기반한 혁신적인 이야기 안에 풍요롭게 통합해 낸다. 우리가 배지영 소설을 주목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쓰레기로 뱉어진 모더니티의 추방자들을 통해, 그리고 가까스로 모더니티의 중심부에 매달려 있는 존재들의 불안과 괴물성을 통해, 『오란씨』는 모더니티 전반이 얼마나 큰 위기에 처해 있는가를 충격적으로 보여 주는 한편, 파국을 향해 치닫는 모더니티를 위기에서 구원할 수 있는 힘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오란씨』에는 신예답지 않은 성찰의 깊이와 신예만이 가질 수 있는 이야기의 혁신성이 아주 매혹적으로 뒤섞여 있다.
류보선(문학평론가, 군산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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