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빙고 수리를 맡은 고원이시오?”
“맞소.”
“그럼 날 좀 도와주시오.”
일거리를 찾는 자라 여긴 공필은 진기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살집 없는 날렵한 몸이었으나, 기골이 장대한 것이 힘 좀 쓰겠다 싶었다. 허나 책방 서생 같은 하얀 피부가 걸렸다. 험한 일은 해본 적이 없는 것처럼 손가락도 매끈했다.
“보아 하니 책이나 읽는 분 같은데, 빙고 수리하는 게 별것 없어 보여도 이쪽으로 이골이 난 자들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오. 그러니 그만 가보슈.”
공필은 진기의 어깨를 툭 치고 갈 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몇 걸음도 채 더 가기 전, 진기는 그를 불러 세웠다.
“강공필!”
낯선 사내가 제 이름을 부르자 공필은 놀라 휙 돌아섰다.
“날 아슈?”
진기는 천천히 다가오며 입을 떼었다.
“단월이.”
“단, 단월이?”
공필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당신이 내 딸을 어떻게 알아?”
“질문이 틀렸소. 어떻게 아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야지.”
순식간에 공필의 코앞까지 다가선 진기는 그의 발등에 발을 올려놓고 힘껏 짓이겼다.
공필의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이 터져 나왔다.--- p.35~36
그때 마침 등불 하나가 훅 꺼졌다.
혹 저것이 신호일까 싶어 붕익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찬 육모방망이를 꽉 쥐고 발길을 바침술집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다음 상황을 주시했지만, 다행히도 등불은 더 이상 꺼지지 않았다.
붕익은 다시 달렸다. 그리고 머릿속에 서린동 거리를 그려 넣고, 우포청으로 가는 지름길을 꼼꼼히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데 집중했다. 아직 서린동에 도착하려면 멀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꾸 뒤돌아서서 등불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추스르지 못할 듯싶었다.
그때였다.
앞쪽에서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어둠에 가려 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모를 일이었으나,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붕익은 길가 옆 수풀로 들어갔다. 배를 납작하게 깔고 누워 몸을 숨겼다. 언덕 위 바침술집으로 가는 유일한 길로 급히 말을 달리는 자라면 그게 누구든 포청 군사와 마주치지 않는 게 원구에게 좋을 것이라 판단했다.
붕익은 말을 달리는 자가 부디 시전에 파다하게 퍼진 암호 노래를 듣고 간자를 찾으러 가는 검계가 아니라 그저 술을 사기 바빠 말까지 동원한 얼빠진 작자이길 간절히 기원했다.
그러나 그의 기원은 빗나갔다.
말발굽 소리의 주인은 검계의 수장 표철주였다.--- p.65~66
“전하, 다른 하명이 없으시면 소신 그만 물러나겠습니다.”
임금의 입이 쉽게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순항은 인내심을 갖고 임금의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이윽고 임금이 고개를 들어 빤히 순항을 쳐다보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항은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를 하곤 물러나려 발끝을 움직였다.
그때 순항의 발 아래로 무언가 또르르 소리를 내며 굴러왔다.
한손에 쥐어질 만큼 작은 나무로 만든 주령구(酒令具, 신라시대부터사용한 14면체의 주사위). 임금이 아까부터 계속 손 안에 쥐고 있던 것이었다.
순항은 허리를 숙여 자연스럽게 주령구를 줍고 임금을 올려다보았다.
임금은 옥좌에서 일어나 천천히 마루로 내려왔다.
“전하, 주령구가…….”
“아, 그게 대감에게 흘러 들어갔습니까?”
일부러 순항에게 굴려 보낸 것이지만, 임금은 아는 척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 손을 떠나 대감 손에 들어간 것이니 알아서 하세요.”
임금은 순항의 곁을 지나면서 이렇게 웅얼거렸다. 순항이 들어도 그만, 못 들어도 그만이라는 듯 작은 말소리였다.
그러나 이 주령구는 순항의 맘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이건 어명이었다. 순항에게 내린 임금의 은밀한 어명. 임금이 순항에게 주령구를 내린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p.152~153
임금은 부왕의 정치를 지켜보며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여 언제나 강한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변하지 않는 세상의 원리란 걸 깨닫게 되었다.
시나브로 그 깨달음은 임금이 사람들을 불신하게 만들었고, 그런 이유로 지금껏 그 누구도 온전히 지지하거나 신뢰하지 않았다.
내관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부터 쭉 임금의 수발을 들어왔고, 궁에 들어온 지 어언 십 년이 지났으니 원칙대로라면 그는 종4품 상책의 벼슬 이상은 돼야 했다. 임금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움직이고 있으니 종2품 상선이라 해도 과한 자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임금은 그에게 가장 하급인 종9품 상원의 자리를 내줬고, 벼슬을 올려야 할 때마다 따로 불러 물었다.
“인범아, 네가 원하는 자리가 있느냐?”
“지금의 자리면 족하옵니다, 전하.”
내관의 대답은 지난 십 년간 늘 같았다. 그래서 그의 직급은 지금도 여전히 내관 중 가장 하급인 상원이었다. 권력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걸 그렇게 필사적으로 피력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벌써 임금의 손에 죽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 p.288~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