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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에 내가 있다

세상의 끝에 내가 있다

: CNN 앵커, 앤더슨 쿠퍼의 전쟁, 재난, 그리고 생존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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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0년 02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292쪽 | 469g | 153*224*20mm
ISBN13 9788991264984
ISBN10 8991264980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나는 다른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지구본을 보면서 지구가 둥글다고 믿으면서 자랐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나라와 바다, 강과 계곡은 이미 지도에 다 그려졌고 이름이 붙여졌으며 탐사됐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세계는 모습과 크기, 그리고 공간상의 위치가 늘 바뀌고 있다.……지질학자들은 이 지구의 구조판만을 지도에 담았을 것이다. 숨어 있는 층층의 바위가 서로를 밀어 올려 산을 만들고, 나아가 대륙을 형성하는 그 구조판 말이다. 하지만 지질학자들은 우리의 머리를 가로지르고 가슴을 갈라놓는 잘못된 경계선을 그리지는 않는다.

지구의 지도는 항상 바뀌고 있고, 이런 일은 하룻밤 사이에 벌어지기도 한다. 지도가 바뀌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 그러니까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일진광풍이 몰아치는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잠깨면 당신을 절벽에 매달아 놓고, 잠들면 당신을 통째로 삼켜버리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그들은 죽고 , 나는 살아 있다. 그건 과거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방식이다.……한 곳의 사정이 나아지면, 다른 곳의 사정이 나빠진다.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내가 아무리 기사를 잘 쓴다 해도, 나는 지금 당장 이곳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의 생명을 구할 순 없는 것이다.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던 나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나의 내면에서 느끼는 고통과 일치하는 바깥세상이 있다면 그곳에 머물고 싶었다. 내게는 마음의 평정이 필요했다. 나는 살아남고 싶었으며 다른 이들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전쟁’은 나의 유일한 선택처럼 보였다.


난 아직도 형이 내 방 발코니 밖으로 발을 옮길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고 싶다. 아마 난 평생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슬픔으로 인해 너무나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다. 올해 말이 돼서야 마침내 과거와 현재, 이 세상에 사는 사람과 세상을 등진 사람을 이해하며 온전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는 많은 낭떠러지가 있고 우리는 아주 가느다란 끈을 붙잡고 그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다. 문제는 그 끈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잘 매달려 있는 것이다.

자정이 되자 오악사카의 공동묘지엔 사람들이 꽉 들어찼다. 비포장 진입로는 완전히 진흙탕으로 변했고, 해골과 귀신으로 분장한 어린 아이들이 무덤 사이를 뛰어 다니며 사탕을 달라고 하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황에서도 여기저기서 웃음소리는 들리고 있다. 그게 당연한 거다. 죽은 자와 산 자 사이가 너무 떨어져 있어서는 곤란하다. 그래야 죽은 자들의 삶이 기억될 것이고, 그들의 영혼을 함께 보듬을 수 있을 것이므로.

다이라트나’라는 이름의 어부는 딸의 젖은 교과서를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채 자신의 오두막집 뒤에 있는 과수원의 작은 숲에 서 있다. 책을 말리려는 것이다. 딸의 사진과 옷은 모두 떠내려갔고, 그 책이 딸을 기억해낼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딸의 이름은 딜리니 산다르말리, 일곱 살이었다.
“딸의 시신을 옮기려고 절에 갔더니 걔가 친구 두 명과 나란히 누워 있더라구요.”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을 울었는지 목이 쉬어 있었다.

전장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바보이거나 거짓말쟁이, 아니면 둘 다 일 것이다. 전장을 많이 다닌 사람일수록, 사람이 얼마나 쉽게 죽을 수 있는지 잘 알 것이다. 영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슬로우 모션으로 쓰러지는 일도,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일도 없다. 그냥 사람들이 죽어가고 세상은 여전히 돌아간다.

아무도 그들의 죽음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 그들의 생애, 사소한 다툼, 그들이 느꼈던 기쁨, 그 모든 것들이 갈기갈기 찢겨져 길가의 시체로 나뒹굴고 있다. 그들은, 한마디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릴 적 나는 해변에서 여름을 보냈다. 파도가 밀려가며 만들어낸 모래 무더기의 가장자리를 따라 걷는 걸 좋아했다. 발밑에서 모래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쉬지 않고 빨리 달리다 보면, 항상 내려앉는 것보다 한 발짝씩 앞서 갈 수 있었다. 뉴스 앵커의 일이 그것과 비슷했다. 말을 더듬을 수도 있고, 한두 문장 때문에 경력을 망칠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달려가며, 자신이 모래 위를 달리고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매우 진보한 종족이라 여긴다. 마음 속 어두운 충동으로부터 스스로 보호막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보호막이 그렇게 어렵지 않게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이 진실이다. 절망적인 사람들은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 뉴올리언스에서도 그랬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전등이 꺼지고, 실내 온도가 올라가면 인간들은 시원한 공기가 그동안 막욾줬던 야만성을 드러내게 된다. 인간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동물이다. 나는 이 사실을 숱하게 체험했다. 엄청난 사랑, 또는 엄청난 학살. 인간은 이를 선택할 수 있는 동물이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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