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딱 6개월 드릴게요. 일본어를 완전히 마스터한 다음에 다시 만나기로 해요. 그러면 그동안 나도 조혜련이라는 사람에 대해 연구해볼게요.”
‘뭐? 6개월? 앞으로 6개월이라고?’
사형선고가 떨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6개월 안에 일본어를 마스터하라’는 주문은 ‘당신은 그냥 포기하라’는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윤손하의 부탁이니 단칼에 거절할 수도 없고, 불가능한 미션을 주고 알아서 떨어져 나가길 바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불가능한 주문을 기 쓰고 해낸 내가 어리석은 걸까? 누군가에겐 참 미련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미련하든 무식하든, 나는 내게 주어진 실낱같은 기회를 잡을 방법만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기어코 그 기회를 잡아냈다. 우회적인 표현도 못 알아듣고, 헛수고로 돌아갈지도 모를 공부에 매달린 것이 무식한 일이라면, 나는 무식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무식했기에, 미련했기에 일본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진출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 p.135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주변 사람들이 말리면 말릴수록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반대 의견을 들을 때마다 ‘갈 때까지 가보자!’라는 생각이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것이다. 한번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격에 발동이 걸렸던 모양이다.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을수록 멋지게 해내서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던 것 같다. 완전히 불가능한 상황, 극단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통쾌하게 해내고 싶었다.
내가 언론으로 일본에 진출한다고 이야기했을 때 모 신문기자는 이런 기사를 썼다.
‘조혜련이 일본에서 코미디언으로 성공할 수 없는 이유’
그 기사는 문화적, 언어적 차이를 극복하기엔 너무도 어렵다는 내용을 상당히 신랄하게 써놓았다. 나는 그 기사를 읽고 적잖이 충격 받았지만, 청개구리 심보를 다시 발동시켰다.
‘그래, 모두 안 된다고 하니까 내가 해보겠다는 거야! 모두들 고맙습니다, 제대로 발동 걸어주셔서….’ --- p.120
남들은 뭐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억척스럽게 사는 내 삶이 좋다.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것, 멋지게 보이려고 계산하지 않는 것, 주저하거나 잔머리 굴리지 않고 무조건 마음 가는 데로 따라가는 삶이 억척스러워 보인다면, 나는 그 억척스러움을 사랑한다. 나를 이끄는 힘이니까 말이다.
나처럼 살라고 남에게 강요할 주제도 안 되고, 그럴 생각도 없지만, 적어도 내 삶이 부끄럽거나 피곤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나는 내 삶을 존중하니까.
물론 나도 걱정이 많다. 될까? 정말? 실패하면 어쩌지? 그런 걱정은 그냥 지워버리는 게 최선이다. 나는 내가 뽑아낼 수 있는 ‘최상’이 어떤 건지 안다. 그 최상을 이루어내는 과정이 즐겁다. 오히려 가장 좋은 것을 뽑아내지 못하면 그게 더 힘들다.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증거니까. 남들은 이게 최상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 자신에게 부끄럽고 싶진 않다. --- p.157
얼마 전 내 롤모델인 가수 박진영 씨를 만나서 도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전하기로는 ‘꿀리지’ 않는 나이지만, 나보다 몇 배의 에너지로 활동하는 그의 생각이 궁금해서 물었다.
“진영 씨는 왜 그렇게 도전을 하세요? 재밌어요?”
“도전을 하면요, 나의 가장 처절하고 추한 모습도 볼 수가 있어요. 한계에 부딪혀보니까요. 그런 걸 보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재미, 정말 죽여요! 난 아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니까요.”
처절함을, 괴로움을 즐긴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나도 선데이 재팬을 하면서 겪어봤으니까. 방송 경력 20년이 다 되가는 개그맨이 방송에서 말 한 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할 때의 비참함, 밤새 외운 대본이 무색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을 때의 좌절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이 일본이라는 특수상황이었다고 해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내 자신이 한심하고 무기력하게만 느껴져서, 접시 물에 코라도 박고 싶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너무 괴로운데 피할 수 없으면, 그 괴로움마저 즐기려는 호르몬이 분비되는 것 같다. 그러면서 대처능력도 길러지고 그릇이 커진다고나 할까?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나는 조금씩 단단해져갔고, 어느새 고통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 p.178
나는 그동안 수많은 일들을 벌이고 또 그것들에 도전해왔다. 그리고 끝끝내 그것들을 해내었다. 그런 내 모습을 좋게 봐주시는 분들도 많지만, 간혹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있다.
“너무 극성스러운 거 아냐?”
“얼마나 더 벌려고 그래?”
“이젠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어?”
그만이라니…. 아니, 나보고 삶을 멈추라는 이야기인 건가? 도전하지 않는 삶, 정지된 삶은 심하게 말하면 나, 조혜련에게 ‘죽는 일’과 진배없다.
나라는 인간은, 남들이 하지 못한다는 일, 꼭 하고 싶어서 몸살이 나는 일들을 해내고 있을 때만 ‘살아 있음’을 느끼는 걸 어떡하란 말이냐! 무언가를 향해 도전하는 기쁨은 정작 그것을 이루고 못 이루고의 결과를 떠난 이야기다. 나는 이미 그 과정에서 얻을 것은 다 얻는다고 생각한다. --- p.214
나는 믿는다. 누구나 ‘원하는 내’가 될 수 있다고. 물론, 원하기만 해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간절히 원하고, 맹렬히 실천해야만 가능한 일. 그럼, 모두들 말할 것이다. 맹렬한 실천이 어디 쉬운 일이냐고. 그걸 누가 몰라서 못하느냐고. 그리고 정말 열심히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원하는 내’가 될 수 없다면, 어쩌느냐고. 그런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을 딱 하나다.
“이 조혜련이도 해냈는데, 누군들 못하겠어요!”
지독하게 가난한 집안의 1남 6녀 중 다섯째 딸, 평균 이하의 외모, 번번이 좌절된 도전들,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에 받은 상처. 어쩜 이리 단점만 모아놓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결핍과 단점 덩어리였던 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개그맨, 책 4권을 출간한 작가, 2집 음반까지 낸 가수, 일본 영화의 여주인공. 프로필만 놓고 보자면, 화려하기 그지없는 나다.
나도 해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해낼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못하겠는가?
--- p.239
--- p.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