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버지 부부는 무척 좋은 분들이셨다. 언제부터인가 두 분을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자랐지만, 양자인 동생 지히로는 안방에서 두 분과 함께 자는 반면 나는 문간방에서 잠을 청하는 생활이었다.
딱히 상처를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린 마음에도 알게 모르게 큰아버지 부부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활짝 열지 못했다.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외로운 날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어딘가 어둡고 귀여운 구석이라곤 하나 없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나날도 사람들도 모두 다 추억이 되어, 함께 살아왔다.
---「애정과 성장과정」중에서
한편 쉰 살은 실제로 내가 호빵맨을 그리기 시작한 나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1973년에 이르러 《호빵맨(あんぱんまん)》이라는 그림책이 된다. 당시에 받았던 평가가 상당히 혹독했던지라 수십 년이나 이어지는 시리즈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만화가로서 독립한 후, 무대 연출을 시작으로 시 잡지의 편집이라든가 그림책 제작, TV 출연 등 부탁받는 일은 무엇이든지 해왔다. 대표작이라고 내놓을 만한 만화 한 편 없는 상태로, 수많은 선후배의 활약을 쓸쓸한 눈으로 좇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만화가로 살아갈 것을 단념하지 않았다. 꽉꽉 들어찬 만원 버스와도 같이, 실력자들로 북적거리는 만화계에서 중간에 포기하는 일 없이 줄곧 서 있었다. 그러자 어느 날 눈앞에 있던 자리가 비었다. 칠십 세가 되기 직전, 호빵맨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일과 운·불운」중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인생 가운데 절반 이상을 실의 속에서 살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불행하지는 않았다.
이따금 눈앞에 거대한 벽이 나타나, 그 어디에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유명한 선배에게 “잘 그리는데! 선이 정말 좋아. 나는 도저히 이렇게 못 그리겠다.” 하고 칭찬을 받을 때면 하늘이라도 날 듯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어렴풋하게나마 희망을 발견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선배는 누구에게나 “잘 그리는데! 나는 도저히 이렇게 못 그리겠다.”라고 말하고 다녔다나 뭐라나.
---「희망과 기쁨」중에서
전쟁이 끝나자, 미국에서 슈퍼맨이라는 영웅이 등장했다. TV 방송이 시작되면서 일본 최초의 슈퍼히어로인 월광가면이나 울트라맨 등도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은 굶주린 사람을 돕는 일 따위는 일체 하지 않는다. 하는 일이라곤 대항하는 악당이나 괴물을 해치우는 것뿐. 악당은 사람들을 속이거나 살상을 저지른다. 괴물은 도시를 파괴한다. 그런 녀석들을 멋진 영웅이 보기 좋게 쓰러뜨리면 “정의가 승리했다!”가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누구를 위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는 분명치 않다. 괴물을 때려눕힐 때도 마을이나 숲을 파괴하고 만다. 그걸로 정의가 이긴 것이 된다. 어딘가 영 석연치 않다. 아무리 결전을 벌여도 정의의 영웅은 옷이 찢어지거나 더러워지지 않는다. 이 역시 이상하다. 온갖 무기를 연달아 선보이면서 펑펑 요란하게 불길을 일으키는 영웅을 보고 박수 치며 흥분하다니, 일종의 ‘전쟁 찬미’처럼 여겨진다. 어린아이의 잠재의식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
나는 이러한 의문을 시작으로, 진정한 정의를 실현하는 새로운 영웅을 그리고 싶어졌다.
---「정의와 선악」중에서
나는 유감스럽게도 천재가 아닌, 99퍼센트에 속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매일 쉬지 않고 열심히 만화를 그리는 사이, 그런대로 진보가 있었다. 옛날에 그린 그림을 보면 정말이지 어설프다. 나름대로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평범한 사람도 어느 정도의 수준
에는 도달할 수 있다는 표본일지도 모르겠다.
---「어린이와 개성」중에서
만화가로서 잘나가지 못해 심사가 꼬였을 무렵, 그러니까 상상도 못할 외로움 속에서 만든 노래가 이렇게 많은 이에게 사랑받으며 반세기 동안이나 불려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호빵맨이 그림책으로 나온 지도 딱 40년이 지났다. 어른들에게는 외면을 당했지만, 순수한 아이들은 열렬한 사랑을 보내주었다. TV 애니메이션도 이제 곧 25주년을 맞이한다. 이만큼 오랜 시간 계속하다 보면 금방 다음 이야기가 떠오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매회 “이제 더는 안 나옵니다!” 하며 담당자에게 눈물로 애원한다. 하지만 그는 요지부동.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이야기를 짠다.
아무래도 나이를 먹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가는 모양이다.
---「생명과 삶의 자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