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늘 고헤이 곁에 있는데, 죽은 사람 취급당하는 건 그 녀석이 잊고 살아서 그렇다고도 하셨고.”
“응? 그게 무슨 말이지?”
“그치? 나도 이해가 안 가…….”
나와 소년은 서로 마주보고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변하는 건 눈에 보이는 쪽이란 말씀도 하셨어.”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소년은 누군가(아마 우리 아버지일 것 같은)의 말투를 흉내 냈다.
“고헤이, 네 곁에는 이제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쭉 변함없이 이 아버지가 있다. 그런데도 만약 네 곁에서 내가 사라졌다고 여겨진다면, 그건 너의 시각이 달라졌기 때문인 거야.
분명히 존재했다는 실감에서 애매한 기억으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에서 없어도 되는 것으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에서 하찮은 것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네 시각이 달라진 게다.
숨 쉬고 살아가는 이상, 눈을 깜빡이며 사물을 보는 이상, 사람이 변하는 건 자연의 이치겠지. 변화는 결코 나쁜 게 아냐. 다만 변화로 인해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단다.
지금 네가 틀림없이 거기에 존재하는데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그것을 다시 보았으면 좋겠구나.” ---pp.82-83
“훌륭한 프로야구 선수는 경기를 보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지? 나도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웃음 지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차분한 공간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카페. 그런 곳을 직접 차려서 사장이 되려고…….”
소년을 쳐다보니 내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는지,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녀석은 감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순간 그 감동이 내게도 전해져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나는 내친 김에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만둔다고 하면 다들 붙잡느라 난리겠지. 그 생각을 하면 부담스럽기는 해.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건 때로는 고통스러운 일이거든. 비록 프로야구 선수는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 형은 남에게 도움을 주면서 살고 있어.”
“정말 멋있다. 최고야!”
소년의 환한 미소, 그 순수한 반응에 나의 간사한 감동의 전율은 사라지고 대신 가슴이 꽉 조이듯이 아파왔다.
‘이대로……. 이대로 속여도 괜찮을까?---pp.102-103
소년은 내게서 시선을 돌려 고개를 숙였다. 불빛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워 녀석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물로 번진 물감처럼 감정이 슬프게 번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작은 몸집이 한층 더 작아 보였다.
“에이, 그런 표정 그만 지어. 재미있는 거 좋아하잖아? 만화책이 얼마나 재미있는데. 왜 이래? 편한 게 제일 좋은 거야. 내가 뭐 어때서 그래? 죽어라 일만 해봐야 사실 좋을 건 하나도 없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어떻게 하면 편하게 돈을 버느냐가 제일 중요해. 자고 있어도 아무도 뭐라 안 하지, 그래도 월급이 꼬박꼬박 나온다, 너. 좋겠지?”
‘아니야, 이런 말 하고 싶은 게 아닌데. 더 중요한 말을 해야 하는데…….’
“성질 건드리는 놈들이 많아서 그래. 오늘도 어찌나 으스대던지. 어우, 다 때려치우고 싶었어. 그런 놈들 때문에 일할 맛이 안 난다니까.”
‘아, 역시 난 구제불능이야…….’
“그런 얼굴 좀 하지 말라니까! 그래, 다 거짓말이다. 어제 너한테 한 얘기는 죄다 거짓말이야. 일도 제대로 못해서 회사에서는 구석으로 쫓겨났어. 활약은 무슨 개뿔, 나한테 기대하는 놈이 어디 있겠냐. 참, 여자친구도 없어. 예전에 차였지. 나한테 매력이 없다더라.”
‘언제부터지?’
“너도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야. 대단한 일 따윈 못 이룬다는 걸. 내 실력은 이 정도밖에 안 돼.”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초라해졌지? 아버지…….’
만화책을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갔고 녀석의 어깨는 떨리기 시작했다. 주변의 공기까지 흔들리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욱 또렷하게 소년의 표정, 그리고 그 실망감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급기야 울음 섞인 신음소리가 들렸다.
“으윽, 으윽, 으윽, 으윽…….”
어깨가 떨리는 동시에 소리는 점점 커졌다.
소년의 볼을 타고 내려온 것이 갈색 카펫에 떨어져 검은 얼룩이 되었다. ---pp.158-160
‘탁.’
내 안에서 어떤 소리가 났다.
“…….”
부장은 신기해하는 표정이었다.
“부장님, 제게 한 번만 더 기초부터 업무를 가르쳐주십시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숙였다. 부장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내 뒤통수에 쏟아지는 그의 시선이 뜨겁게 느껴졌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부장의 손이 살며시 내 어깨에 놓였다. 머리를 들자 부장이 내 눈을 들여다보며 물어보았다.
“자네, 진심인가?”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탁.’
또 소리가 났다.
부장이 빙그레 웃어주자, 나는 내 몸? 남은 껍질을 한 번 더 털어내기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인생은 어디 먼 곳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있었다.
변화를 결심하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지금 있는 장소, 이 회사, 이 책상, 이 인간관계 속에서 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장소, 다른 회사, 다른 책상, 다른 인간관계 속으로 옮겨 변하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지금 이곳’을 선택했다.
속속 출근하는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네자, 다들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런 모습들을 보니 내심 기분이 좋았다.
어제와 다른 내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바꾸기로 한 부분은 ‘밝은 사람이 되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 안에 그런 내가 있다는 것을 의식했을 뿐이고, 소년의 얼굴을 떠올렸을 뿐인데, 마치 예전부터 그래왔던 사람처럼 밝은 표정이 내 안에서 되살아났다.
---pp.179-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