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편저자는 종교학자도 성직자도 아닙니다. 그리고 과거 대학생 시절에는 신(神)의 존재와 종교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신앙을 갖지 않았습니다. 저는 대학 화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과정에서 물리화학 전공으로 오직 미래에 과학자가 되기 위한 꿈을 안고 부(富)나 명예,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과 삶이 과연 참 의미가 있는 인생여정인가? 하는 회의심(懷疑心)이 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가? 신(神)은 존재하는가? 등등의 철학적 및 신학적 문제에 대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고대 로마시대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43)는 “신(神,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너무도 자명하다. 그렇기에 나는 그를 부정하는 사람의 건전한 이성을 의심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위대한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 그리고 석학들이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과연 그 학자들이 아둔하여 신앙을 가졌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물리화학을 전공하였기에 자연계시(自然啓示)의 과학적 시각(視角)에서 신(神)의 존재와 섭리(攝理)를 확신하게 됨에 따라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에 입각하여 본서에서는 신앙을 갖지 않는 분들과 신(神)의 존재 및 종교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을 위하여 인간의 정체성, 종교의 근본 문제, 종교 요론, 그리고 영성(靈性)/영성생활 등을 과학적 시각(視角)에서 편술하였습니다.
그런데 종교와 신앙 문제를 과학적 시각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인즉 과학은 경험적이고 실증적인데 반하여, 철학이나 신학은 초경험적이고 비실증적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환언하면 신학(神學theology)은 불가시적이고 초경험적 존재인 신(神)과 그의 말씀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계시학(啓示學)인데 반하여 과학은 자연의 가시적이고 경험적 존재의 변화성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학문이며, 따라서 신학은 절대자에 대한 신앙이 요청되고, 과학은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이 요청됩니다. 그리고 신앙은 종교적 신념이고 관찰은 경험적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따라 신학과 과학은 추구(追究)하는 대상이 다를 뿐만 아니라 서로 대립되고 상충되는 분야로 이해되어 상호 배타적인 학문으로 오해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현대 물리학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닐스 보어(Niels Bohr)가 말한 것처럼 “대립적인 것은 상보적”(contraria sunt complementa)인 것입니다. 종교와 과학을 동일한 범주(category)에서 다루어질 수는 없지만, 상보적이며 상호 이해를 증진시켜 줍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시대에는 철학과 과학의 구별이 없었고 모든 지식과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을 총칭하여 철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6세기에 이르러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1543)와 갈릴레오(Galileo, 1564-1642)가 자연의 진리는 관측 사실 그 자체에 있다고 함으로써 비로소 자연과학이 정립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철학과 과학이 완전히 갈라서서 등지고 담을 쌓은 것이 아니며, 철학과 과학은 서로 걸쳐있는 중간분야가 있습니다. 과학적(Scientific)이라는 말에는 경험적이고 실증적이라는 뜻뿐만 아니라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학철학 및 자연철학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화학과 물리학은 상이한 학문인데도 두 학문이 걸쳐있는 중간분야의 물리화학 및 화학물리학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두 학문이 걸쳐있는 경계선상(境界線上)의 학문들, 예컨대 의학철학, 종교철학, 생물철학, 생물화학, 생물물리학, 지구화학, 지구물리학 등등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창조물인 자연의 이치를 연구하는 것이 과학이므로 과학은 자연의 근원을 규명키 위해서는 하느님께 소급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과학과 신앙은 만나기 마련입니다. 과학 없는 신앙은 자칫 맹목적인 광신으로 전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신앙 없는 과학은 늘 새로운 가설에 의존하여 초월성을 배격하기 쉽습니다.
인간은 오성(悟性)과 이성(理性)에 의해 자연의 궁극적인 원인의 존재를 확신하게 됩니다. 오성은 경험적 대상을 사유하는 인식능력인데 반하여 이성은 초경험적 대상을 사유하는 인식능력이기도 합니다. 신앙은 이성에서 출발하여 순응에서 완성되는 믿음입니다. 신앙과 이성은 상호 모순되지 않고 근본적으로 조화를 이룹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신 하느님은 이성과 신앙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인간 지능의 한계성 때문에 하느님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4차원(공간과 시간)의 자연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초자연세계를 쉽게 간파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 자체캷 이성의 능력만으로는 불가해한 분이며 신앙의 대상입니다.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면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는 이성(理性)을 초월할 수 있어도 이성과 모순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믿음의 원초단계에서부터 무작정 믿고 맹신하면 미신이나 사이비 종교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模像, 모습, Lat. Imago Dei, Eng. Image of God)대로 창조된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므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과 함께 믿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드(A. Smith)는 “과학은 광신이나 미신의 독성에 대한 훌륭한 해독제”라고 말했고,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사는 물질주의 시대에 진지한 과학자야 말로 깊은 신앙심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했으며, “종교 없는 과학자는 절름발이요, 과학 없는 종교는 맹인에 불과하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본서에서는 먼저 인간의 정체성을 그리스도교 교리에 입각(立脚)하여 과학적 시각(視角)에서 설명하였으며(제1장),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관하여 서술하였습니다(제2장). 그런데 신(神)이 존재하는가의 물음은 종교의 근본문제이므로 자연계시의 과학적 접근으로 하느님의 현존과 섭리를 설명하였으며(제3장), 이와 관련하여 창조론과 진화론 및 창조주 하느님에 대해 서술하였습니다(제4장). 그리고 인간은 종교적 존재이므로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보고 세계의 여러 종교를 소개하였으며(제5장), 또한 그리스도교란 어떤 종교인가를 소개하였고(제6장),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성경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제7장). 마무리 단계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을 소개하고(제8장), 그리스도인의 삶(제9장)을 영성/영성생활과 향주덕의 삶으로 나누어 다루었습니다.
이 책을 읽은 모든 분들이 인간의 정체성과 더불어 신앙을 이해하고 인생여정에서 영성(靈性)과 향주덕(向主德)의 참 삶을 지향하며,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본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편저자로서는 큰 보람과 기쁨으로 여길 것입니다.
끝으로 이 책 원고의 세밀한 검토와 미비점을 보완하여 주신 최창무 대주교님(천주교 광주대교구장, 신학박사), 김희중 대주교님(광주대교구 부교구장, 신학박사), 김영태 교수님(전남대학교 명예교수, 종교학박사, 철학박사, 한국종교문화학회 공동대표, 한국윤리학회 회장), 노성기 신부님(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신학박사)께 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한 흔쾌히 추천사도 써주신 최창무 대주교님께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 책을 출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남대학교출판부에 대해서도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서문에서」
제1장 인간의 정체성
들어가는 말
인간의 정체성#1이라는 말은 곧 ‘인간의 정체가 무엇인가?’,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이다. 독일의 계몽주의#2(啓蒙主義)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인간의 인식에 관한 것 : 이론철학, 인식론),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인간의 행위에 관한 것 : 실천철학, 윤리학),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나는 무엇을 믿어도 좋은가?’」(인간의 믿음에 관한 것 : 희망의 철학, 미학, 종교철학, 신학)라는 철학의 세 가지 근본 물음을 묻고는 그 모든 것을 종합하는 한 가지 물음으로 집약하여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사실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물음은 철학의 중심문제이며, 많은 철학자의 연구대상이 되었고, 또한 자연과학적?역사학적?사회학적 측면에서 매우 다양하게 다원적으로 연구되었다. 그렇지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이끌어 낼 확고한 출발점이 없기 때문에 논의하고자 하는 바의 관점이나 접근방법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표현되어 왔다. 이를테면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든가, ‘인간은 형이상학적 동물’, ‘인간은 만물의 영장’, ‘인간은 사회적 동물’,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인간은 도구를 만드는 동물’, ‘인간은 상징을 만드는 존재’, ‘인간은 학습하는 존재’, ‘인간은 수치를 아는 존재’, ‘인간은 종교적 존재’ 등등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을 묘사하는 명언들은 많이 있지만, 이 명제들의 어느 것도 인간을 완전하게 묘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기묘하고 헤아릴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로서 매우 복잡한 기능과 정신적, 육체적 속성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고, 생명에 대한 인식의 한계성, 여러 가지 관점에 따른 상이한 논리성과 상호배타성 등으로 인하여 인간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과 일반 동물의 본질적 차이점은 무엇일까? 다만 생김새의 차이, 사람은 옷을 입었고 동물은 옷을 안 입었다는 차이, 그저 그런 정도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일까? 도대체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제2차 바티칸공의회#3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模像)#4으로 창조되었고, 쿇느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지배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존재라고 하였다(사목 헌장 12항 참조). 그리고 하느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기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로 이해하기도 한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당신께서 빚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창세 2,7-8).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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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체성(正體性identity)이란 외부환경이나 사정이 변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독자적인 특성을 말한다. 예컨대 10년 전의 나의 육신과 지금의 육신은 분명히 다르지만, 영혼은 변하지 않고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독자적인 특성을 지닌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소금이 가령 주위환경의 영향을 받고 소금의 본질인 짠맛이 변한다거나 없어진다면 소금일 수 없는 것이다.
#2 계몽주의(계몽사상,계몽사조,계몽철학) : 16~18세기에 유럽전역에서 일어난 혁신적 사상운동이다. 칸트(I. Kant)는 계몽(啓蒙, Enlightenment)을 「인간이 자기 책임 하에 어떠한 미성년의 상태로부터 탈각하는 일」이라고 정의하였다. 18세기는 「이성의 시대」, 「계몽의 시대」로 불린다. 계몽주의의 핵심은 이성(理性)중심이며, 인간은 이성의 힘에 의해 우주를 이해하고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사유(思惟)를 제창하고 이성의 계몽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진보와 개선을 꾀하려 하였다. 또 지식?자유?행복이 합리적 인간의 목표라고 보았다. 인권의 점진적인 신장은 계몽주의적 이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 역사의 어느 시대에도 계몽주의 시대만큼 철학이 여론과 사회발전에 강한 영향을 미친 적은 없었다. 인권의 점진적 신장은 계몽주의적 이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권의 불가침성은 1776년 「미국 독립 선언문」에서 표방된 이후 1789년 프랑스 국민의회가 채택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도 언급되었고 현재는 국제연합헌장에 명기되어 있다.
그런데 계몽주의는 계시종교가 인간에게 타율을 조장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미성숙을 강요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계몽주의와 계시종교 사이에는 처음부터 대립관계가 성립되어 왔다. 그렇지만 계몽주의와 계시종교는 양편이 서로 자기 자신을 좀더 명백히 이해하게 되었고, 특히 계시종교는 계몽주의와 대결하면서 자기 이해에 있어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계몽주의는 계몽의 의미를 좀더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참된 계몽이란 이성이 전통ㆍ권위ㆍ계시종교 등 다른 것을 계몽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계몽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성 자체는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라 계몽된 이성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한계성을 의식하고 개방성을 가지며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검토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 것이다.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 공의회(公議會)는 교황이 소집하는 전 세계 가톨릭 모든 주교들의 공식 회의다. 성령의 특별한 은총을 힘입어 교회의 신앙과 도덕에 관한 주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식적인 온 세상 교회의 회의다. 공의회 원형은 서기 50년경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사도회의(使徒會議)다(사도 15,1-29). 지금까지 세계 공의회는 21번 열렸으며 21번째로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요한 23세, 바오로 6세)에서 교회의 쇄신, 그리스도교 일치, 동방교회 등(헌장 4, 교령 9, 선언 3)을 반포하였다.
#4 하느님의 모상(模像, 모습, 형상, Lat. Imago Dei, Eng. Image of God) : 하느님의 모상이란 「창세 1,26-27; 2, 7」에 근거하는데 가시적 어떤 형상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영혼(하느님의 생명의 숨)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 영혼은 인간 생명의 근원이요 인간의 영적(정신적) 근원을 가리킨다.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인간은 존엄한 인격체요 인격으로서 하느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근본적 정체성)
본성이란 개개의 존재자가 그 시원(始原)에서부터 타고난 본질적 특성을 지칭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인간의 본성을 본질적 특성과 관련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과연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인간의 본질은 영혼의 정신작용에 의한 이성(理性)쳀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관점의 다양성 모두와 상관관계가 있는 근본적인 말이 바로 이성(理性, 인간의 본질은 영혼이라고도 함)인 것이다. 본질이란 본바탕을 이루는 특성인데, 그 특성 없이는 그 사물이 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소금의 본질은 짠맛인데, 그 짠맛이 없으면 소금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인간이 이성적이라면 동물일 수 없고, 동물이라면 이성적 일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인간은 모순된 양면성을 지닌 존재인 것 같다. 그렇지만 분명 인간은 이원적 요소, 즉 이성(理性)적 요소와 동물(본능)적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인간 안에는 모순된 양극성, 즉 ‘흙(Lat. Humus)의 먼지’와 ‘생명의 숨’이라는 양극성이 있었다.(창세 2, 7 참조)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사실 인간이 동물임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간은 동물이긴 하지만 한갓 짐승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인간과 일반 동물의 근본적 차이점은 무엇인가? 인간은 육신과 영혼이 결합된 합일체이므로 먼저 인간을 육체적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첫째, 인간의 육체는 생물학적으로 비전문화되어 있다. 환언하면 인간 육체의 기관(器官)은 비특수화성(非特殊化性), 즉 특수하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일반 동물에 비하여 결코 우수하지도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열등하다. 어떤 동물들은 신체적 기관과 감각기관, 그리고 힘에 있어서 인간의 능력을 훨씬 능가한다. 이를테면 사람은 육체의 힘으로는 맹수를 당해낼 수 없으며, 달리기는 말을 따를 수 없고, 나무에 오르내리기는 원숭이만 못하고, 냄새 맡는 데는 사람의 코가 개 코만 못하고, 민첩하기는 다람쥐를 따를 수 없고, 하늘에서는 새만 못하고, 물 속에서는 물고기만 못하다. 또한 인간의 몸은 맹수의 이빨이나 발톱과 같은 신체적 공격무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고슴도치의 가시털 같은 방어무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다 인간의 몸은 고도로 조직화되어 있고 복잡해서 고장이 잘나고 병도 잘 걸린다.
둘째, 인간은 예견력도 없다. 이를테면 침몰할 배에는 쥐들은 한 마리도 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배가 침몰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타고 가다가 침몰해서 죽는 경우가 있다. 또한 우리는 지구촌 여러 곳에서 대지진, 폭우, 대홍수 등 자연재해가 일어나 폐허가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뉴스를 가끔 접하고 있다. 하지만 쥐들은 자연재해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대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과 일반 동물들이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점은 일반 동물의 육체적 기관 기능이 인간보다 더욱 전문화되어 있고, 일반 동물들의 모든 육체적 기관들은 자연적인 생활 조건과 특정한 환경에 알맞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일반 동물들이 육체적으로 탁월한 기능과 능력을 갖추고 있다하여 그것들을 위대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의 육체는 비특수화된 기관으로 되어 있고, 육체적 유약성과 불리한 조건인 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만물의 영장(靈長 : 영묘하고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우두머리)으로서 자연의 온갖 생물을 다스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영혼의 정신작용에 의한 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과 육신
혹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동식물도 이성이 있다고 말한다. 언젠가 어느 식물분류학 교수가 자기는 식물과 대화를 한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은 차치하더라도 식물은 생혼(生魂, Lat. anima vegetativa)이 있고, 동물은 생혼의 속성을 내포한 각혼(覺魂, Lat. anima sensitiva)이 있으며, 인간에게는 생혼과 각혼의 속성도 내포한 영혼(靈魂, Lat. anima humana)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교회에서는 생혼과 각혼은 신체와 함께 시작되고 소멸되는 유시유종(有始有終)이지만, 영혼은 유시무종(有始無終)하여 불멸한다고 가르친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단일체를 이루고 있다.(사목헌장 14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362-365항 참조)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는 인간은 하나의 실체(단일체) 안에 영혼과 육체라는 두 가지 구성 요소를 갖고 있다고 하였다.
인간의 육체는 물질(흙의 먼지)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가시적 요소(외적 자아)인데 반하여 영혼은 비물질적(생명의 숨)이므로 불가시적 요소(내적 자아)다.(창세 2, 7 참조) 이런 육신은 물질적이므로 화학적 변화나 물리적 파괴가 있을 수 있고 종국에는 멸(滅)한다. 그러나 영혼은 비물질적이므로 변화나 파괴가 있을 수 없고 불멸(不滅)한다. 또한 영혼은 인간의 생명과 지혜의 근본으로서 인간에게 개성과 인간성을 부여하며 인격 전체를 의미한다. 그래궼 불변(不變)한 영혼은 참(true) 자아로, 현세의 가변(可變)의 육신은 거짓(false) 자아로 규정될 수떵 있다.
1) 영혼의 정신작용
영혼(soul)은 인간의 정신(영, 마음)적 근원을 가리키며,(『가톨릭 교회 교리서』, 363항) 정신(spirit)은 영혼의 본질에 속한다.(『한국가톨릭대사전』, ‘정신’ 참조) 인간 영혼의 정신작용으로는 이성(理性), 의식(意識), 양심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정신작용을 하는 발원체(發源?)는 육신의 뇌수(腦髓)라기 보다는 영혼(다음의 예화2 참조)인 것이다. 왜냐하면 비물질적인 정신작용은 물질에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영혼이 없는 뇌수만의 정신작용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정신작용에 의한 이성, 의식, 양심은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고 밀접한 상관성이 있다. 이성(理性)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사유(思惟)하고 진리를 찾는 능력인데, 이성적 기능으로는 지?정?의(知情意), 기억, 자각, 반성(反省), 판단, 인식 등이 있다.
이성에 비하여 의식은 정신이 든 상태에서 사물을 깨닫는 일체의 작용이다. 그러나 특별히 자신에 대한 주관적 인식이나 지각(知覺), 환언하면 반성과 자각(깨달음)의 정신작용은 자의식(自意識)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은 “나는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고 하는 자기 존재를 밝히고자 한다. 인간은 영혼의 정신작용에 의한 이성과 의식이 있기 때문에 미래지향적 목적의식이 있고 통찰력이 있고 지적인 탐구 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양심은 마음의 윤리질서요 정신의 법인바, 인간은 양심으로 말미암아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행선피악(行善避惡)의 삶을 살게 된다.
프랑스의 파스칼(Pascal, 1623~62)은 “인간은 진리와 선(善)을 추구하는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하고 “사고(思考)만이 인간을 위대하게 하며, 인간의 존엄성은 사고에 있다.”라고 강조하였다. 매우 큰 코끼리가 조그마한 소년의 인도에 따라 끌려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정신능력이 육체의 능력이나 힘을 지배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준 예라 하겠다. 인간은 동물의 육체적 힘이나 능력보다도 훨씬 우월한 정신적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위대한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까닭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성’(理性)이라고 하는 사유(思惟)능력과 진리를 찾는 능력을 천부적으로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 영혼의 정신작용에 의한 이성적 기능에서 지ㆍ정ㆍ의(知情意)의 ‘지성’(知性, 지능知能)은 지적인 인식능력으로서 이 지성을 통해 인류 문명과 문화를 이룩하였다. ‘정서’(감성感性, 감정感情)는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정신능력으로서 이 감성을 통해 찬란한 예술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의지’는 지성에 따라 어떤 목적을 이루려는 능력인데, 비록 힘들고 위험하고 하기 싫은 일이라 하더라도, 무엇인가를 원하고 얻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능력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유의지’(自由意志)는 어떤 목적을 세우고 행(이룩)하고자 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자유’라고 하면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제 멋대로 행동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선택행위의 능력, 즉 숙고하여 선택하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신앙생활을 할 것인가, 안할 것인가의 선택행위가 자유인 것이다. 일반 동물은 이성과 자유의지가 미미하거나 없기 때문에 숙고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행동할 뿐이다.
2) 정신의 특징
영혼(soul)은 인간에게 개성과 인간성을 부여하므로 때로는 정신이나 참 자아와 동의어로 간주되기도 한다. 영혼의 본질인 정신(spirit)의 개념은 논리적으로 정의할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정신은 마음?영(?, Spirit)을 뜻한다. 정신, 마음, 영에 대한 각 낱말의 뉘앙스(nuance)의 차이는 있지만 동의어로 간주한다. 마음은 인간 정신 생활 전반을 나타낸다. 정신은 ‘초월 의식’과 ‘활동’의 두 가지 특징을 가지는데, 초월 의식과 활동은 밀착되어 있다. 인간은 정신의 초월 의식에 의해 하느님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사물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정신의 활동에 의해서 가능하다. 가치 판단을 하는 것, 믿는 것, 희망하는 것, 사랑하는 것은 정신의 활동이다. 그래서 인간은 꿈과 희망과 이상(理想)을 지향하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존재이며, 인간의 가장 깊은 정신 활동은 종교적 활동이다.
3) 영혼과 육신의 일체와 상관성
사람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잉태될 때 육신은 배아(胚芽)로부터 시작하여 자라게 되고,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창조된다. 육신이 살아 있는 것은 영혼의 생명력에 기인한 것이다. 이 상관성이 끊어지면 육신은 죽고 분해 된다. 육신과 영혼의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현세에서 생존하는 동안은 영혼과 육신이 ‘일체’(一體)가 되도록 긴밀히 결합되어 있고 상관성이 있다. 그래서 마음이 몹시 괴롭고 아프면 육신도 고통스럽다. 또한 역으로 육신의 머릿골(뇌수?腦髓)에 이상이 생기면 정신작용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치매를 일으킬 수 있고, 육체가 몹시 아프면 의식을 잃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젊었을 때는 정신이 맑고 또렷하지만 늙으면 머릿골도 노쇠하여 정신이 흐릿하고 오락가락하기도 한다. 사람이 세상에 생존하는 동안에는 영혼은 신체의 머릿골과 오관(五官)#5과 오장육부(五臟六腑)#6 등 모든 기관과 조직이 긴밀히 결합하여 일체(一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육체의 신경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감각하며, 육체를 통하여 표현한다. 그리고 사람이 수면(睡眠) 중이거나 전신마취상태 또는 임종 때에는 무의식 상태로 되지만 결코 영혼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간다.(부활하신 예수님)
우리는 죽음을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육신은 이승에서 흙의 먼지로 가지만 영혼(생명의 숨)은 하느님께로 귀환한다.(코헬 12, 7)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육신과 영혼이 결합된 인격체이지만, 영혼은 개성과 인간성을 부여하며 불멸하므로 참(true) 자아로, 육신은 계속 변하고 죽음으로 결정적 변화를 맞게 되므로 거짓(false) 자아로 규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죽어 없어질 육신(거짓 자아)에 대해서는 다듬고 가꾸고 병이 들면 병원에 가고, 이처럼 육신에 대해서는 무척 신경을 쓰지만, 정작 불멸의 영혼(참 자아)에 대해서는 별로 의식하지 않으며 신경을 쓰지 않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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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관(五官) : 오감(五感)을 낳는 다섯 감각기관「눈(시각), 귀(청각), 코(후각), 혀(미각), 피부(촉각)」
#6 오장육부(五臟六腑) : 오장은 간장(肝臟), 심장(心臟), 비장(脾臟), 폐장(肺臟), 신장(腎臟)이고, 육부는 담(膽), 위(胃), 대장(大腸), 소장(小腸), 삼초(三焦), 방광(膀胱)이다. 여기서 삼초는 한의학에서 상초(위 상부), 중초(위 부근), 하초(방광 아래)를 말하며, 소화와 배설의 작용을 한다.
---「본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