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시장을 한데서 만나는 일은 얼마나 갸륵한 풍경인가. 맑은 바다는 갯것들을 품고, 갯것들을 먹고사는 그곳 사람들을 품고, 그곳 사람들의 장소와 시간을 겪으려 하는 여행자들을 다시 품는다. 그 품이 하도 보드랍고 넓어, 도저히 잊히지 않아 나는 세화리를 지나는 일정을 늘 5와 0으로 끝나는 날짜에 맞추게 된다. 꼭 뭘 사지 않으면 어떤가. 시장은 자본을 유통하는 곳이 아니라 삶을 교환하는 곳이니. 돈 한 푼 치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장터의 활발한 생동감과 눈이 시원해지는 맑은 세화바다는 덤이고 공짜다. --- p. 016
종달의 바다는 특이하다. 부드럽기로는 금릉의 모래밭에 뒤지지 않고, 투명하기로는 김녕에 못지 않으며, 드넓기로는 표선에 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광객들은 종달 바다를 지나쳐만 간다. 간혹 들러 그 풍경을 누리는 이들은 대개 가까운 데 사는 주민들이다. 호들갑스럽지 않아 눈여겨 보지 않는다면 깜빡 놓치고 말 여인네처럼, 종달 해안은 소박하지만 선명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게다가 그 품이 넉넉해 제주의 바다 가운데 가장 다양한 생물이 거처하는 곳이기도 하다.--- p. 019
동그랗고 말간 조약돌이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 동사무소도 대로도 없는 작은 마을에 기대 내로라할 관광지로 꼽힌 적 없으면서도 소박하게 빛나는 바다. 차가가가락 그르르르, 차라라라락 사르르르, 차가가가라락 츠르르르…. 달의 지휘에 맞춰 희고 푸른 옷자락을 펄럭이며 매번 다른 교향곡을 연주하는 섬세하고 사려 깊은 바다, 귀를 기울일 때 가장 황홀해지는 바다 한 곳이 섬의 북서쪽, 제주도 제주시 내도동에 자리 잡고 있다. 몽돌바당 또는 알작지 해변. 조그마한 몽동(자갈돌)이 자작자작 쌓이고 그 몽돌 사이를 쓸어주는 파도 소리가 특별한 음계를 만들어 눈을 감고 있어도 머릿속까지 생생히 차오르는 바다가 바로 알작지, 몽돌바당이다. --- p. 078
중문은 제주의 해수욕장 가운데 흔치 않게, 아주 남성적인, 야성이 넘실대는 거칠기 그지없는 바다다. 이곳을 바라보는 일이 그래서 더, 이상하게도 여성성을 헤아리게끔 만든다. 저 포효가 품고 있는 생태, 품 안에 기르고 돌보는 생명, 거기서 휴식하는 사람들, 차가움과 보드라움….
나는 중문에서 생각했다. 과잉은 어쩌면 결핍인지도 모른다고. 또는 그 반대일 수도 있다고. --- p. 161
제주를 상징하는 빛깔은 어떤 것일까. 나는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아침 나절의 서귀포가 그 툭유의 색깔 중 하나라고 믿는다. 서귀포에 간다면 반드시 이곳에 한 번 들러보길 권한다. 지독한 빈궁 속에서 그가 그리고 또 그렸던 작은 은박지 그림들과, 그와 아내가 주고받았던 슬프도록 다정한 편지들, 그가 꿈꾸었으나 결국 이루지 못했던 환상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중섭 미술관과 집터를. 보다가 눈물이 나면 그가 그랬듯 잠시 눈을 돌려 넘실대는 서귀포 푸른 바다를 돌아보기를.
나약한 감정도, 인간도 모두 다 아름답다. 이중섭 미술관이 가르쳐주는 가장 큰 교훈은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 p. 166
여행객들 대부분에게 자구내는 그래봐야 ‘지나치는’ 동네다. 배를 빌려 밤새 물고기를 낚을 낚시꾼이 아니라면, 바다를 구경하는 일을 빼고는 그다지 특별한 ‘꺼리’가 없는 마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해수욕장도 아니고, 떡 부러진 한 상을 내놓는 대형 음식점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곳에 잠시 멈춰 차귀도 사진을 찍고 준치를 구경하다 수월봉이나 다른 곳으로 떠난다. 그러나 단지 ‘정거장’으로만 지나치기에는 차귀도와 자구내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곳이다. 새벽과 저녁 무렵 해돋이과 해념이의 황홀한 스펙트럼은, 조그마한 선창에 생을 기대고 끈덕지게 살아온 주민들의 애달픈 삶뿐만 아니라, 잠시 일상을 쉬러 온 여행자의 짧은 휴식에도 깊은 인상을 새긴다. 그만큼 이 포구의 빛살에는 황홀한 데가 있다. --- p. 225
눈보라 치는 겨울날에도 우뚝한 푸른 숲인 이곳은, 나무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고목들로 이루어져 있어 봄이나 여름에 방문하더라도 여름의 울창한 숲을 떠올리게 한다. 덕분에 금산공원은 한낮에도 저녁처럼 어둑하다. 숲이 하도 무성해 하늘이 온통 잎과 가지로 가려진 까닭이다. 제주에 흔한 팽나무는 물론, 후박나무, 종가시나무, 야왜나무, 생달나무, 동백나무, 메밀잣밤나무 등의 아열대 상록수가 우거진 데다 콩짜개, 보리밥나무, 송악, 후추 등과 같은 덩굴식물이 다시 그들을 휘감고 있으며, 낮은 데서는 밤잎고사리 같은 희귀식물도 만날 수 있다. 오르는 길 내내 눈을 어디다 둬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감탄이 끊이지 않는 울창한 삼림이다. 공원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정도로 학술적 가치도 큰 곳이다. --- p. 240
앞에서 언급한 폴 오스터의 소설처럼, 인행은 우연의 이상한 결합이다. 그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고 변하게 만들 수도 없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가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 그것은 삶에 대한 태도일 수도 있고 기준일 수도 있으며, 이데올로기나 세계관일 수도 있다. 이 섬에 대해 숱한 책을 읽고 수많은 자료를 찾고 적지 않은 조사를 해왔지만, 공부해 발견한 곳과 우연히 만나게 된 장소들 간의 우열은 도저히 가릴 수 없다. 인생은 그저 ‘우연의 음악’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만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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