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퀴즈, 게임 쇼 프로그램에서는 무대 및 세트의 모방, 서사의 모방, 화면 구성의 모방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포맷 모방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1993년 10월에 지상파 TV 3사를 통해 방송되고 있던 총 12개 퀴즈 쇼, 게임 쇼 프로그램 중 무려 7개가 일본 프로그램을 모방한 것으로 밝혀졌다. 무대 세트나 사회자의 몸짓, 문제 유형, 문제 내용 등 형식과 내용 모두를 모방하고 있었다. 포맷의 차용이 모방 정도를 넘어 복제에 가까운 것으로는 일본의 〈100만 엔 퀴즈 헌터〉를 그대로 베낀 SBS의 〈알뜰살림장만퀴즈〉, 그리고 〈퀴즈, 매지칼 두뇌파워〉를 마찬가지로 똑같이 베낀 MBC의 〈도전, 추리특급〉이 있었다. 〈알뜰살림장만퀴즈〉의 경우 사회자와 출연진 구성 방식, 출연자 소개 방식, 스튜디오 관객 구성 방식, 무대 세트 형식, 우승 결정 방식, 특징적인 몸짓, 문제 유형, 전체적인 구성에서 〈100만 엔 퀴즈 헌터〉의 포맷을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었다. --- p.16
포맷은 이제 교역, 거래의 대상이다. 그리하여 MBC의 〈이브의 성〉처럼 정식으로 프로그램 라이선스를 계약하고 국내로 포맷을 수입하는 시도가 잦아졌다. 해외의 인기 있는 TV 포맷들이 불법적인 표절의 대상이 아닌, 합법적인 구입 품목으로 국내에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유럽과 일본, 미국의 인기 프로그램들이 포맷 형태로 국내에서 현지화되어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국내 방송사들이 해외 인기 프로그램 포맷을 따른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것은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니다. 아이돌 스타 찾기 프로그램, 서바이벌형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 엄청난 상금을 내건 퀴즈 쇼 프로그램 등, 해외에서 포맷을 가져온 프로그램들이 국내 지상파 방송에 의해 경쟁적으로 편성되어 있다. 그동안 포맷 개발을 위한 자체적인 노력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해외 인기 포맷의 현지화는 투자 리스크를 예방하는 동시에 시청률을 일정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매우 안정적인 투자 패턴으로 인식되었다. --- p.18
1998년 영국에서 방영된 〈누가 백만장자가 되기를 원하는가〉는 미국에 수출되어 인기를 끈 후 전 세계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포맷 상품이 되었다. 완성된 프로그램이 아닌 포맷을 국제 텔레비전 시장에서 새로운 품목으로 확실히 인정받게 한 일종의 혁명적 사건이었다. TV 프로그램 완제품 유통 방식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TV 프로그램 포맷 유통 산업이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빠르게 구축되었다. 소위 포맷의 바이블 패키지화, 프로그램의 현지화 컨설턴트, 프로그램 아이디어의 지적 재산권화를 주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TV 포맷 비즈니스 모델이 유럽, 미국 등지를 중심으로 하여 글로벌 방송 산업의 미래 비전으로 출현했다. --- p.19
영국은 세계 포맷 산업의 가장 큰 공급자이다. 2005년 현재 세계 포맷 시장의 절반 수준(45%)을 점유할 정도이다. 영국 텔레비전이 전 세계 프로그램 포맷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서바이버〉, 〈누가 백만장자가 되기를 원하는가〉와 같은 인기 포맷들이 모두 영국에서 나왔다. 특히 〈누가 백만장자가 되기를 원하는가〉의 경우, 1998년에 처음 영국에서 방영된 후, 2005년까지 무려 106개 나라에서 현지 버전으로 다시 만들어진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으며, 16억 파운드의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 p.20
네덜란드에는 〈빅 브라더(Big Brother)〉의 전 세계적인 히트 등을 통해 세계 최대의 포맷 전문회사로 자리 잡은 엔데몰이 있다. 2004년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팀(Global Creative Team: GCT)을 설립한 엔데몰의 새 대표는 창의성을 회사의 최우선 모토로 내세운다. 창의성과 상업성의 융합에 그룹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것이며, 이는 전 세계 포맷 산업을 선도하는 대다수 기업의 보편적 인식을 대변한다. --- p.21
일본은 TV 포맷 시장의 잠재력에 비교적 빨리 주목했다. 1998년 TBS가 〈두근두근 동물왕국〉이라는 포맷을 미국 CBS에 판매한 것을 시작으로, 대만과 이탈리아, 터키, 독일, 스위스 등지로 포맷 수출을 다양화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해외에서 인기를 끌면서, 버라이어티 포맷의 수출이 후지TV나 TBS 등 민방을 중심으로 크게 늘어났다. 영국이나 미국에 비해서는 분명 후발 주자이지만, 프로그램 아이디어가 뛰어난 점이 세계 포맷 시장 진출에서 유리하게 작용했다. --- p.21
선진 외국의 텔레비전 시장은 포맷을 중심으로 급변하고 있다. 부가가치가 높고 수익창출의 효과가 큰 포맷의 개발과 국제 유통을 미래 TV 콘텐츠 핵심 산업으로 읽고 있음에 틀림없다. 분명한 것은 매체와 채널이 늘어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각국의 방송사들이 자체 제작할 수 있는 재정적 여건이 마련되지 않을 경우, 포쮸의 수입이 앞으로도 매우 매력적인 옵션으로 살아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과거 한국처럼 외국 프로그램을 불법적으로 모방할 수 없고, 외국 프로그램을 수입함으로써 문화정체성 혹은 미디어제국주의의 시비를 초래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는 특히 그러할 것이다. 이는 곧 전 지구적 포맷 시장의 미래가 밝고 성장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뜻한다. 즉, 세계 프로그램 시장은 수요의 창출이 아니라 수요의 요구를 지극히 현실적으로 좇고 있을 따름인 셈이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어쩌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바보야, 문제는 포맷이야!” --- p.22
한마디로 한국 방송 콘텐츠 산업은 포맷 분야에서는 선진국에 비해 최소한 10년 이상 뒤처져 있다. 치명적인 한계, 결정적인 지체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0여 년에 걸쳐 얻은 자체 제작 역량 강화와 프로그램 수출 효과의 체험을 넘어서는, 전 지구적 방송시장 변동의 흐름을 따라잡는 모습을 제대로 보이지 못하고 있다. ‘포맷이라는 화폐(currency of format)’가 기축으로 자리 잡은 세계시장 구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방송이 지난 10년 동안 ‘디지털’과 ‘멀티채널’, ‘유비쿼터스’와 같은 다소간 기술적인 측면에 몰두해 있을 때, 외국의 TV는 이와 더불어 ‘포맷’이라는 형식적인 주제에 주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바이버〉, 〈빅 브라더〉, 〈아메리칸 아이돌〉처럼 전 세계를 강타한 대형 포맷 상품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말 그대로 세계 방송 콘텐츠 시장의 전경(landscape)이 크게 바뀌었다. 가히 패러다임이 이동했다고 할 만한 수준이다. --- p.23
2010년 현재까지도 포맷의 문제설정은 비단 일반 시청자나 비판적인 언론매체뿐만 아니라, 현업 제작자나 방송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포맷에 관한 한 한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저개발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이 부진의 현실은 포맷의 요소가 가장 핵심적인 버라이어티와 게임, 시트콤 등 예능 오락 장르에서 특히 치명적으로 나타난다. 요컨대 한국의 TV오락은 자체 포맷이 사실상 부재한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문에서 모방·표절의 악습이 반복되는 것이며, 또한 드라마 부문에서의 완성품 수출 성과와 달리 이 부문에서 그 어떤 의미 있는 해외 진출의 소득을 올리지 못하는 것이다. TV예능은 기본적으로 아이디어로 승부하고, TV오락은 포맷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창의적 아이디어와 창조적 포맷을 결여한 한국 TV오락이 산업적 경쟁력, 문화적 가치를 확보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 p.25
포맷 창작자의 입장에서 아이디어를 제안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무엇을 개발할 것인가?’이다. TV 포맷 창작자가 프로그램 포맷의 아이디어를 고안할 때 백지 상태에서 출발할 수도 있지만 너무나 막연하기 때문에 개발하려고 하는 프로그램 포맷의 범주, 즉 장르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아이디어의 정체성을 규정지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TV 포맷 창작자들에게 아이디어를 규정하는 이정표로서 장르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을 만들 것인가?’의 첫 단추를 끼는 셈이 된다. --- p.123
“포맷은 일련의 규칙이고, 스포츠 경기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텔레비전 포맷은 축구와 거의 흡사합니다. 축구 경기를 지켜볼 때마다 90분 길이에, 그 안에 극적인 요소, 희로애락의 감정, 사람이 곤경에 처하게 되는 요소들이 존재합니다. 경기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그 경기(여정)가 끝날 것이라는 점은 알고, 또 경기 끝에는 지고 이기는 것도 알게 됩니다. 축구 경기에는 극적인 요소를 담보하는 일련의 규칙이 있죠, 그래서 골은 가치가 있는 것이고요. 사람들은 축구 경기에 일련의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 규칙에 대해서는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저 규칙을 끌어다놓고 스펙터클한 광경을 지켜볼 뿐이죠. 그게 바로 포맷입니다.”
--- p.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