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트 첫 페이지에 붙어 있는, 드류 배리모어가 환하게 웃는 사진을 오랜만에 어루만졌다. 나와 드류는 아역 출신이고, 한때 뚱뚱했다는 위대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작년에 《피플》 지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1위에 선정됐다. 그런 그녀의 행복 아우라를 닮으려고 잡지에서 오린 사진을 붙여 두었던 것이다. 사진 속 드류의 웃는 얼굴은 지금까지 겪었던 수많은 실패(약물 중독이라든가, 음주, 자살 미수, 불행한 결혼, 비만 같은)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굉장해. 게다가 위대하고. 역시 행복한 여자의 웃는 얼굴을 이길 상대는 없어. 나도 웃고 싶다. 특히 그와 함께 있을 때는 웃고 싶다. --- pp.35~36
갑자기 나는 사진첩을 보던 손을 멈추었다. 다케루의 친구들 사이에 기시 마리에가 혼자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구나. 그와는 어렸을 때부터 알았으니까 당연히 다른 친구들과도 친하겠구나. 그녀는 감각 있는 기모노 차림이었다. 내일. 그녀의 가게로 미팅하러 가기로 했다. 나카타니 유키 씨와 함께하는 기획 모임이다. 내가 사진을 계속 보고 있자 눈치를 챘는지 “이제 그만 봐…….” 하고 다케루가 사진첩을 빼앗았다. “자, 마셔봐.” 그가 만들어 준 칵테일은 사랑의 맛이 난다. 몇 잔 청해 마시는 동안 술에 취한 나머지 머리 회전이 되질 않았다. 다케루도 술에 약한 듯하다. 그도 나와 함께 마시는 동안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런데 괜찮을까, 내가 여기 와도.”
“왜…… 그런 말을 하지?”
“왜긴, 그녀도 여기 올 테니까.”
내가 왔었다는 증거로 귀고리라도 떨어뜨리고 갈까. 오늘은 에미가 선물한 하트 귀고리여서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오지 않아. 꽤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어.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끝나 가고 있는 중이야.”
“흐응.” 나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그럼 그녀 이야길 왜 나에게 말했지? 그냥 말하지 않을 수도 있었잖아.”
“양다리 걸치고 있다는 걸 알면 기분 나쁘잖아.”
“양다리라니…… 품위 없이.” 그가 반격했다. “따지고 보면 네가 나중에 나타난 거잖아? 양다리 걸친 걸 알아서 기분 나쁠 사람은 그녀 쪽이지. 불쌍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는 입술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뭐 이런 변명이 다 있을까. “아, 안 되겠어.” 내가 중얼거렸다. “속상하지만, 아까부터 윗입술이 말도 못하게 귀여워. 화를 내고 있는데도 말이야…….”
“……남자가 귀엽다는 말을 듣고 좋아할 거라 생각해?”
“기쁘지 않아?”
“아니…… 전혀.”
순간, 다케루의 귀여운 입술이 립글로스를 바른 나의 입술을 덮었다. 결국 말하지 못했다. 내일, 나는 또 한 명의 네 여자를 만나러 간다고. --- pp.65~66
“그럼, 들어 봐. 내가 점을 한번 볼 테니. ……4년 만에 당신에게 생긴 애인이 지금 양다리를 걸치고 있습니다.”
“앗, 들었구나!”
“미안, 마유, 들렸거든.”
“나 좀 내버려둬.”
“어쨌든 내가 들어서 다행이야.”
언니는 뻔뻔하게 웃었다. 당신은 세상 누구보다 알리고 싶지 않은 상대라고요.
“그런데 적은 어떤 여자지?”
“……말하고 싶지 않아!”
“그래, 하지만 얼마 전에 나에게 질문한 건 네 얘기지?”
“……아아!”
“마유, 인생 선배가 하는 말 잘 들어. 세상 사람들이 겪는 실연의 80퍼센트는 자기 자신에 의한 거야. 지구 온난화와 똑같이 온난화되면 곤란해.” -78
마지막에는 나 자신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주변의 여자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여러 타입의 친구들로부터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싶어서 ‘파자마 파티’라는 이름으로 ‘긴급?아침까지 러브 토크’를 열기도 했다. 그때는 정말 많은 의견과 체험담을 들을 수 있었다. 나에게 제시된 사랑의 충고는 운다, 교태를 부린다, 매달린다, 협박한다, 시험해 본다, 함정을 판다, 포기한다…… 등이었다. 그리고 한 발 나아가 울면서 협박하거나, 시험해 보면서 운다, 는 충고도 나왔다. 그때 에미가 말했다. 다들 차례로 잠이 들던 새벽 무렵이었을 것이다. “마유, 모두가 말했듯이 연애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거야. 하지만 난 이렇게 생각해. 그를 설득해 보면 어떨까.” 나는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혼자 생각했다.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난 그런 식으로는 할 수 없다고……. 나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있었다. 간단하다. 그와 관계된 일, 몇 군데 밀접한 장소에서 멀어지기만 하면 된다. 발걸음을 끊은 가게, 가까이 하지 않게 된 공간, 관계가 멀어진 친구들. 잃어버린 건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 p.94
“마유 씨는 확실히 해 주길 바라지?”
“예. 그 사람이 그녀와 이야기하는 것도 싫어요. 어수선한 꿈도 많이 꾸고 다른 쪽으로 상상을 하게 되거든요. 지금쯤 그녀를 만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계속 하고. 보내온 메일의 의미를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그녀와 나 자신을 비교하며 좌절하기도 하고.”
“질투로……?”
“예…….” 나는 힘없이 고개를 떨군다. “질투…… 그것 때문에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못하는 거예요. 각색하거나, 돌려 말하거나 일부러 그녀의 이름을 꺼내기도 하면서…….”
“그럼 우리가 오늘 만난 기념으로 변호인으로서의 전략을 알려 줄까?” 다다 씨가 마른오징어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예, 꼭!”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자기 자신을 주어로 해서 말하기.” “아.” 나는 집중했다.
“……이상.”
“에, 진짜요?”
“응. 진짜야. 진짜, 진짜.”
“간단하네요.”
“이런 게 오히려 힘들다니까. 나도 자주 이혼 소송을 담당하지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아주 간단해. ‘나는 이런 게 싫다’라는 말.”
“아아…….” 나는 한숨을 쉰다. “진짜,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왠지 그를 상대하고 있을 때 본심을 말하면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고, 그래서 자꾸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게 되고,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즐거운 척 기쁜 척하기도 하고…….” -163~164
“우리 인생 대부분이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만나는 거잖아? 난 매머드 시대의 젊은이들도 분명히 안전한 나무 아래나 동굴에서 기다리며 사랑을 했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만났을 때 다음 약속을 정하고 매머드를 신경 쓰면서 계속 만났을 거야. 어느 쪽이 초대하거나 초대를 받겠지. 같은 집에서 살기 전까지는 계속…….”
“왠지…… 네 말을 듣고 있자니 너무 슬퍼져…….”
“그럼, 아주 슬프지. 여자란 존재는 어떤 시대라도.”
“그러니까 감정을 다스리면서 사는 거야. 계속 자기 안에 있는 사랑을 분산시키거나 디톡스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아? ……난 내 감정도 컨트롤할 수 없어서 바보 같아.”
“바보라서 좋잖아. 연애 세계에서 컨트롤 같은 건 불온한 말이야.” 에미가 말했다.
“나도 바보고 너도 바보고 모두 바보야. 저기 저쪽에 있는 개도, 남자나 여자도…… 사랑하는 동물은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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