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이야기 될 수밖에 없는 이 세상
-- 김정희(candy@yes24.com)
이 책에 실린 글들이 처음 소개되는 것은 아니다.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 수상, 이후 한겨레신문사의 사회부 기자 생활 등 그의 행보와 그 와중에 쓰여진 김훈의 글들을 관심 있게 봐왔던 독자들은 이 책에 실린 글들이 낯익을 것이다. 이미 써왔던 칼럼이나 조각글들을 묶어서 책을 만드는 것은 익숙한 풍경이지만 그래서 이 책 또한 그런 익숙한 풍경 속의 하나 정도로 넘어갈 수 있겠지만, 그의 글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고 낯설다.
글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세상을 살아가고 바라보며 생각하는 방법이 낯설기 때문일 것인데, 그것은 ‘아날로그’라는 말로 집약될 수 있을 듯하다. 그는 글을 쓸 때 종이와 연필, 지우개를 가지고 쓴다. “연필로 글을 쓰면 팔목과 어깨가 아프고, 빼고 지우고 다시 끼워 맞추는 일이 힘들”지만 연필로 쓰면, 자신의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 느낌은 그에게 소중하다. 그는 이 느낌이 없이는 한 줄도 쓰지 못한다. 이 느낌은 고통스럽고 행복하다. “나의 몸의 느낌을 스스로 조율하면서 나는 말을 선택하고 음악을 부여하고 지우고 빼고 다시 쓰고 찢어버린다.”
디지털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곧바로 가고, 기호와 수치로 그 결과를 나타내지만 아날로그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슬픔과 기쁨, 고난과 희망을 챙겨서 간다. “아날로그가 끌고 나가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고난과 희망을” 어떤 추상명사나 이념이나 누구의 말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몸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세상과 만나 그것을 표현하는 그의 글쓰기는 “겨우” 이루어지고, 그래서 힘겹다. 하지만 망치를 들고 못을 박을 때, 수직으로 제대로 못대가리를 내리찍으면 못이 똑바로 박히는 이치처럼 그의 글은 믿음직스럽다. 그 믿음 안에서만 더듬더듬 말을 하려는 그는 공부를 잘하지 못한 일을, 책을 많이 읽지 못한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지만, 삽으로 땅을 파서 김장독을 묻을 때, 삽날이 땅 속에 깊이 박히지 못하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아날로그가 끌고 나가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고난과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하기 때문에 세상의 이런저런 일을 얘기할 때 역시 그는 힘들어한다. 이 복잡한 세상.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세상을 글로 그대로 옮겨다 놓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것들을 다른 아름다운 것들과 비교해야만 한 아름다움의 형식과 질감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의 말을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는 그로서는 더욱 이 세상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무엇에 대하여 진술하는 인간의 언어가, 먼저 그 대상의 본질을 과학화함으로써 대상이 한 존재로서 온전해지기를 바라는 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바람 때문에 그의 글은 자꾸 자꾸 보아도 새롭고 귀담아들을 만한 내용이 있다.
책의 제목이 ‘밥 벌이의 지겨움’이다. 밥벌이는 힘들다. 나무들은 엽록소를 가지고 있어서 스스로 자신의 생명 속에서 밥을 지어내지만, 사람의 밥은 그렇지 않다. 사람의 밥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굴러다니기 때문에 핸드폰이 없으면 안 되고,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술이 덜 깬 아침에 속이 뒤집혀져도, 다시 거리로 나가기 위해서는 밥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벌기 위하여 넘길 수가 없도록 몸을 부려야 한다는, 대체 왜 이것을 이토록 필사적으로 벌어야 하는가. 하지만 대책이 없다. 아무 도리기 없다. 그렇게 세상이 생겨 먹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겨 먹은 세상은 그 자체가 옳지도 않고 그르지도 않다. 그 어쩔 수 없음을 헤아리는 아날로그의 철학. 그래서 그의 글은 어쩌면 이 세상과 가장 비슷할지 모르겠다.
“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세상의 더러움에 치가 떨렸고, 세상의 다러움을 말할 때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까워서 가슴 아팠다. 저물어서 강가에 나가니, 내 마을의 늙은 강은 증오조차도 마침내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 비틀거림은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을 게다. 그리하여 나는 말할 수 있는 것들, 말하여질 수 있는 것들의 한계 안에서만 겨우 말하려 한다. 그 작은 자리에서 모르던 글자를 한 개씩 써보면서 나는 말더듬이를 닮으려 한다. 그리고 그 한계는 점점 좁아진다. 다행한 일로 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