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향전이란 인류의 것이 아니겠는가. 모차르트의 「사랑의 시련」처럼 동서고금에 통하는 영원한 과제인만큼 유네스코의 이름까지 빌릴 필요가 새삼 있었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자 이번엔 제 느낌이 옹색해져 문득 부끄러워졌소. 그러자 어느새 어둠이 스며와 제 붉어진 얼굴을 가려주지 않겠는가. 기차 바퀴 소리에 묻혀 환청인 듯 다감한 목소리 하나가 제 부끄러움을 또 한 번 덮어주지 않았겠소. “그래 옳소. 내 누님, 오오 누이님/ 우리나라 섬기던 한 옛적에는/ 춘향과 이도령도 살았다지요”(김소월, 「춘향과 이도령」 부분) --- ‘좋고도 좋구나, 77년 이어온 춘향제’ 중에서
… 전쟁으로 폐허가 된 먼 극동의 작은 나라로 떠나는 딸을 향해 친정 오지리의 아비가 이렇게 말했다 했다. “너는 거기 가서 거기 사라들을 나를 섬기듯 하라!”라고. 그 순간 가슴이 찡했다고 어느 자리에서 무심코 실토했더니, 잠시 침묵이 스친 뒤에 이런 반응이 오지 않았겠는가. “냉철한 문학평론가 주제에 그 따위 감상에 젖다니, 쯧쯧”이라고. --- ‘호암상의 어떤 인간적인 면모’ 중에서
… 연병장에서 말을 조련할 때 저쪽 구석에서 어떤 부인이 자전거 타기를 연습하고 있었다 하오. 부인에게 방해되지 않기 위해 아주 조심한다는 것이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말을 몰아 결국은 충돌하고 말았다는 것. 자기와는 정반대였지만, 체호프도 꼭 같았다고. 체호프는 「귀여운 여인」을 쓰러뜨리고자 마음먹고서 온 힘을 모아 노력했는데, 저도 모르게 거꾸로 축복한 결과에 이르렀다고, 문학에서는, 그러고 보면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소중한 것이 따로 있는 법. 저 마음의 흐름 말이외다. --- ‘이념보다 소중한 ‘마음의 흐름’’ 중에서
… 「소련기행」(1947), 「농토」(1948)의 작가,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회장인 이태준이 반동작가로 규정, 교정원, 고철 수집 노동자로 전락된 바 있다 하오. 고철 수집의 막노동 속에서 혹시 이태준의 머릿속엔 ‘세계사의 대사조 속에 한 조각 티끌처럼 가라앉아가는 김직원의 표표한 뒷모양’이 스쳐가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작가란 자기 소설 속의 인물의 운명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수인(囚人)이라 할 수 없을까.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듯 자연도 예술을 모방하니까. --- ‘작중인물 속에 갇힌 수인(囚人)들’ 중에서
… 대체 인문학이란 무엇이뇨. 거짓 희망이란 무엇인가를 밝히는 학문이 아니었겠는가. 살아 있는 시간을 가득 채워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 쉼 없이 묻는 공부가 아니었겠는가.
민중을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하는 척하는 연기도 할 수 없는 자리. 거기 깃드는 정신의 이름이 인문학이 아니었던가. 어느 쪽에 편들지 않으면서 쉼 없이 감행하는 자기 넘어서기, 거짓 희망에 눈멀지 않기, 요컨대 주인·노예 변증법의 고리 끊기. 이를 자양분으로 하여 자라는 이상한 나무. 인문학이 이 나무를 닮지 않았다면 대체 무엇을 닮아야 할까. --- ‘인문학의 자리 되새겨준 논문’ 중에서
… 어렵긴 해도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1910)의 목소리라면 어떠할까. 가출하여 예술가로 대성한 토니오가 시민사회에 자리 잡은 불알친구들이 춤추는 장면을 창 너머로 바라보면서 저도 모르게 이렇게 가만히 뇌어 마지않았으니까. “내가 혼자서 아홉 개의 교향곡을 짓고 「최후의 만찬」을 그렸더라도 너희들은 영원히 나를 비웃을 권리가 있다”라고. 길 잃은 시민(예술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시민사회의 일원(속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 자기의 선 자리, 가문, 국가의 내력을 배우고 익히고 지켜야 한다는 것. 시민사회의 덕목에로 회귀하는 공부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 예지란 이성 속에 있지 않을지 모르나 이성 속에서가 아니라면 대체 그런 예지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를 음미해야 한다는 것. 주변의 그 누구도 이미 사랑할 수 없게 되어버린 이 탕아에게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귀에 솔깃해질 이치가 없긴 하다. 그렇다고 그는 되돌아온 자리에 죽치고 앉을 수도 없지 않겠는가. 필시 그는 또 떠날 것이다. 이번엔 보다 큰 사랑을 위하여. 그 큰 사랑 쪽이 손짓하고 있다고 믿었으니까. 시민사회의 이성보다 더 큰 사랑을 위해. --- ‘갈 수 있고 가야 할 세 가지 출발의 형식’ 중에서
… 나도 어찌 쉽사리 질까 보냐. 재빨리 이렇게 대들었소. 그래도 그는 귀국 직후 「태평양 항로의 문주란 설화」(2005)를 썼다, 라고. 또 덧붙였소. 이 소설쟁이는 소주에 취하기만 하면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저기 엉터리 평론가가 있다!”라고 외치기 일쑤였다고. 그래도, 아니, 그렇기에 그는, 키 큰 평론가 김현의 표현으로 하면 제 어미를 팔아 「눈길」(1977)을 썼고, ‘자생적 운명’을 다룬 천금 무게의 『?신들의 천국』(1976)을 썼소. 조국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다시 그곳을 잊어야 했다」(2007)를 그만이 쓸 수 있었소.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4?3 사건의 합동위령제를 다룬 대작 「신화를 삼킨 섬」(2003)을 썼소. 그것은 다름 아닌 이상욱(『당신들의 천국』)이 정요선으로 변장하여 제주도로 간 얘기에 다름 아닌 것. 민족적 악업에 대한 자기 정화력이란 무엇이며 치유의 가능성은 있는가, 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라고 스스로 우기는 이 야생 당나귀 모양 고집스런 키 큰 소설쟁이 이청준이여, 우리의 국민작가 이청준 사백이여. --- ‘그대, 이제 그대의 천국으로 가시는가’ 중에서
… 참으로 다행히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 늙고 초라한 허깨비 소년을 격려하고 또 위로해주는 사람이 둘씩이나 있었소.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칼 포퍼가 그 하나. 진리가 진리일 수 있는 것은 그 진리 속에 거짓이 될 가능성(falsifiability)이 깃들어 있는 동안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M. 베버의 조언. 학문이란 무엇이뇨. 예술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면 능가 당한다는 사실이 그것. 이것이 학문의 운명이자 의의라는 것. 이 운명에 복종하고 헌신하기, 이것을 스스로 원하고 있다는 것.
--- ‘한 몸으로 두 세기 살아가기의 문법과 어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