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열쇠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히브리어 단어인 ‘헤세드’라는 명사에 놓여 있다. 이 단어는 시편 13편 NIV역에서는 “변함없는 사랑”(unfailing love)으로 번역된다. 이는 주님의 확고한 언약적 사랑과 우리 곧 그분의 백성을 향한 주님의 무한한 자비와 긍휼의 은혜를 표현한다. 이 단어는 시편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 대답한다. ‘헤세드’의 변함없는 확고함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단 한순간도 우리를 잊으신 적이 없고 앞으로도 절대 잊지 않으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헤세드’는 “얼마나 오래도록?”이라는 세 번째 질문에도 답한다. ‘헤세드’의 본질은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돌보시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지 않을 때, 또는 끝없이 계속되는 슬픔을 없애 주지 않으실 때,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돌보시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와 사랑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를 위한다. ---「01. 주님, 저는 외롭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중에서
히브리어 본문은 우리의 위급(두려움, 공포)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가를 영어 번역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보여 준다. 우리가 ‘끊어졌다’라고 번역한 동사의 근본적 의미는 근절시킨다(exterminate)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 명사 ‘도끼’와 연관되는데, 이 동사는 구약에서 이곳에만 나타난다. 이렇게 드물고도 폭력적인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시인의 공포가 그로 하여금 과도하게 두려워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자신이 주님의 시야에서 완전히 지워졌으며, 도끼로 찍혀 잘리듯 그분의 선하심에서 영원히 끊어졌다고 생각했다.
---「03. 두렵습니다. 나를 구원하소서!」중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미래에 모든 일을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항상 감사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습관이다. 우리는 악으로부터 선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환경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그분의 약속을 믿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치료되지 않은 엄청난 상처 때문에 고통스러울 때도 하나님께 감사만을 드려야 한다는 허위에 저항한다. 계속 하소연하는 대신 오직 감사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학의 위험은, 그렇게 강요된 감사는 우리의 고뇌 위에 종교성이라는 겉치장을 덮어씌우고 때로는 우리가 슬퍼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치료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슬픔으로 고통당하고 있을 때 그것을 억누르려 해서는 안 된다. 종교적 경건이라는 명목으로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08. 저녁에도, 아침에도, 정오에도 내 목소리를 들으시는 주님」중에서
비록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 몇 가지를 주님이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주님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알고 계시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마음 상하는 것으로 인해 우리와 함께 슬퍼하신다. 다시 한번 우리는 하나님 성품에 대한 문제로 되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선하신가,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시험해 보도록, 사실은 그 선하심을 찾아보도록 초청받았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하시기 때문이다. … 내가 좀 더 현명해졌을 때,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위로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도록 하나님이 나를 가르치고 계셨음을 깨달았다. 내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이 내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에 마음을 열 때마다, 나는 어떤 소원들은 내게 정말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15.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중에서
난치병과 관련해서 가장 힘든 일은 병원에서의 외로움인 것 같다. 그런 때는 친구들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문병 시간이 제한되어 있고, 세균 감염을 피하기 위해 환자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밝은 색 카드 몇 장과 시든 꽃은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병실에 가정 같은 온기를 주지 못한다. 낯선 간호사들과 여러 절차들, 마음을 움츠리게 만드는 기계와 주사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을 갖게 하는 여러 증상들은, 죽어 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소외감을 느끼게 한다.
어쩌면 당신이 바로 지금 그런 외로움을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런 외로움과 싸우고 있는 누군가를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을 이미 죽음으로 잃었는지도 모른다. 시편 116편은 죽어 가는 성도들,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 또는 이미 그들을 떠나보낸 사람들 에게 특별한 위로를 준다. ---「21. 주님은 죽음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십니다」중에서
우리는 중간 시대에 살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존재의 중심과 초점이 되신 때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거나 우리가 죽어서 천국으로 돌아가 그분과 함께 있게 될 때까지의 중간 시기(또는 진행 과정)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기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쉬운 기독교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에는 참여하지 않으면서 태평스레 “나는 이미 구원받았어.”라고 말하며 나태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우리는 간절한 열망과 고민 속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둘러싸여 있을 때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 우리의 외로움이 주님께 귀를 기울이는 ‘홀로 있음’으로 변화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최후 승리를 기다리며 의로움과 정의라는 그분의 현재 목적에 참여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는다.
---「30. 내가 초조하고 넘어질 때에도 ‘샬롬’은 있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