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같은 것은 아예 형식적으로도 진행되지 않았다. 기장인 마빈 와킨스(Marvin S. Watkins) 소령은 정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심문을 위해 도쿄로 이송되었고 나머지 8명은 처형이 결정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후쿠오카 규슈제국대학(현 규슈대학) 출신 군의관인 코모리 타카시(小森卓)는 일본 서부군사령부의 사토 요시나오(佐藤吉直) 대좌와 함께 미군 포로들의 처리 문제를 협의했다. 회의 결과 이들은 포로로 잡힌 미군들을 그냥 죽일 것이 아니라 생체 해부용 마루타로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합의했다. 이에 코모리는 자신의 모교 주임 외과부장인 이시야마 후쿠지로(石山福二?) 교수에게 달려갔다. 이시야마 교수는 전적으로 환영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 규슈제국대학에서는 후쿠오카 교도소에 갇혀 있던 조선인 사상범들에게 생체 실험을 하고 있던 차였다.
p. 14
아버지 윤영석이 일본으로 떠난 후 또 한 통의 전보가 왔다.
‘동주 위독. 원하면 보석 가능. 만약 사망 시 시체 인수할 것. 그렇지 않으면 규슈제국대학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당시 도쿄에 유학 중이던 당숙 윤영춘과 함께 감옥에 도착한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은 윤동주와 함께 갇혀 있던 송몽규(宋夢奎)를 면회했다. 그런데 반쯤 깨진 안경을 쓴 송몽규의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피폐해져 있었다. 몸은 뼈와 가죽뿐이었다. 휑한 눈에 이미 이 세상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저놈들이 강제로 주사를 놓아서 이 모양이 되었어요. 동주도 그 주사 때문에….”
윤영석이 아들 윤동주를 화장해 고향으로 떠난 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 송몽규 역시 3월 7일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p. 19
윤동주에 대한 그의 열정은 계속 이어졌다.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은 오무라 교수의 노력으로 세상에 나왔다. 시인의 모든 자필 원고를 사진으로 찍어 책으로 낸 것이다. 이미 출판된 시와 산문들의 원고는 물론 사소한 낙서까지도 포함하였다. 처음에 일본인 오무라 교수가 유족의 허락을 받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유족은 한국 사람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는 것을 어떻게 일본인 이 출판하도록 하겠느냐며 반대했다. 하지만 그 후 10년을 기다린 후 허락을 받아 마침내 책이 나올 수 있었다. 유족들의 말에 따르면 그동안 이 원고를 보자는 한국인들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이 책을 내기 위해 사비까지 털어 넣었다.
p. 27-28
“인간은 누구라도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 정직한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이것이 양심의 소리다. 나는 그 목소리에 따라 엄숙하게 ‘자기 혁명’을 선언한다. 사회운동의 급격한 조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종래의 나는 ‘법정의 전사’라고 말할 수 있는 변호사였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사회 운동의 일개 병사로서의 변호사’로서 살아갈 것을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민중의 권위를 위해 선언한다. 나는 중요한 활동의 장소를 법정에서 사회로 옮기겠다.”
후세는 자기 혁명의 고백의 구체적인 실현 방안으로 다음과 같은 사건만 맡겠다고 선언했다.
1. 관헌으로부터 무고죄, 부당한 부담을 강요받은 사람에 대한 사건
2. 자본가와 부호의 횡포에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에 대한 사건
3. 관헌이 진리의 주장에 간섭하는 언론범 사건
4.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과 싸우는 무산계급의 사건
5. 조선인과 타이완인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사건
p. 29-30
조선 청년들이 후세를 찾아가 변호를 부탁한 것은 위에 말한 두 사람의 저명한 변호사들의 주장이 그들의 생각과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조선 강점을 기정사실화하고 동정을 구하는 그들의 변론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 “만약 일본 재판관이 이를 내란 음모 등 중죄로 다스린다면 일본은 그야말로 무법의 야만국가로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출처 : 《백관수 회고록》)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청년들의 요청에 부합한 후세의 변론은 조선 민족의 존엄성에 걸맞고 일제의 수도 도쿄에서 벌어진 최초의 조선독립선언 사건에 상징성을 더욱 빛나게 한 것이었다.
p. 35
후세 다츠지는 도합 네 차례에 걸쳐 조선을 방문했다. 1923년 7월 말 부산에 도착한 것이 첫 번째였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의열단 사건 재판의 피고인들을 변호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며 주요 도시마다 들러 강연회를 열었다. 그는 《사기(史記)》의 “덕을 의탁하는 이는 번영할 것이요, 힘을 의탁하는 이는 멸망하리라”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비난해 조선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후세는 학생 사상 연구회인 북성회가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주최한 강연회에 참석해 ‘인간 생활의 개조 운동과 조선 민족의 사명’이라는 제목의 연설로 일제를 비판했다. 연설 도중 단상에 앉아 있던 일본 고등계 형사가 그에게 수차례 경고를 보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전국을 돌며 백정 차별 철폐 운동을 지원한 후 8월 말 조선을 떠났다.
p. 39
이 극도의 혼란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집을 비롯한 재산을 모두 잃은 수많은 민중! 먹을 것도 없는 이들이 집단화해 폭동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불과 5년 전인 1918년에도 쌀값 폭등으로 인한 폭동이 있지 않았던가? 만일 이번 대지진으로 인해 폭동이 일어난다면 농민뿐만 아니라 노동자들도 가담할 우려가 있었다. 걱정으로 망연자실해 있던 한 경찰 간부의 머릿속에 전깃불이 번쩍했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국민들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한 것! 바로 이거야! 흉흉한 민심도 수습하고 인간쓰레기들도 제거하는 거다. 바로 이 엄청난 대재앙을 수습할 희생 제물로 조센징들을 쓴다면 이것이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p. 60
혼조(本庄)시 경찰서로 도피한 97명의 조선인은 일본인 경찰의 보호 아래 5대의 화물트럭을 타고 비교적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북쪽 군 마 현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하지만 경계선인 간나가와 강(神流川)에서 군마 현 신마치(新町) 자경단과 후지오카(藤岡) 경찰에 의해 제지당했다. 그러나 이들이 되돌아오는 길에 진보하라(神保原)에서 일본인들의 습격을 받아 트럭 2대에 타고 있던 32명은 처참하게 희생되었고 3대만 간신히 혼조경찰서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67명의 목숨도 겨우 몇 시간 연장되었을 뿐이었다. 일본도, 죽창, 쇠몽둥이, 권총 등으로 무장한 군중은 경찰서 내부까지 들이닥쳐 모든 조선인을 이 잡듯이 잡아 죽였다. 민간인들에 추상같이 엄격하게 군림하던 무시무시한 일본 경찰도 이때만은 웬일인지 뒷짐을 지고 있었다. 도쿄의 가메이도(龜戶) 경찰서에서만도 하룻밤 사이에 조선 사람 300여 명이 학살되었다.
p. 64
1968년에 일본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의 참사관으로 일하던 제호 슈아 니쉬리(Jehoshua Nishri)가 드디어 스기하라를 찾아냈다. 니쉬리 자신 이 10대 소년으로 카나우스에서 스시하라의 비자를 받아 생명을 건진 사람이었으니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있었던 그와 스기하라 부부의 만남은 뜨거운 눈물의 재회였다. 스기하라는 다음 해인 1969년 이스라엘을 방문해 이스라엘 정부 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그중에 이스라엘 독립선언문의 서명자들 중 한 사람이자 당시 종교부 장관이었던 제락 와하틱(Zerach Warhaftig)과 도 29년 만에 재회하게 된다. 그도 역시 스기하라의 비자 덕분에 살아남아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가 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1985년 스기하라는 이스라엘 정부보다도 더 많은 유대인의 생명을 구출한 공적으로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이방인 중의 의인(Righteous Among the Nations)’으로 선정되었다. 그해 말 예루살렘 언덕에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수가 심어졌고 공적비도 세워졌다.
p. 89
일본제국의 야욕은 결국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졌고 일본은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게 되었다. 패색이 짙어져 가던 1944년 일본은 나가노 현 가루이지와에 교전국과 중립국의 외교관들과 그 가족들을 수용하는 강제수용소를 설치했다. 스타핀도 여기로 끌려갔다. 그의 개명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의 일본 프로야구 MVP 경력도 소용없었다. 한 시즌 42승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적성 인종’으로서 분류되어 수용소에 갇히고 말았다. 그를 더욱더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고 간 것은 쇼리키 마쓰타로(正力松太?)의 도쿄 자이언츠팀이 프로야구의 존속을 위해서 스타핀을 야구계에서 추방했다는 소식이었다.
p. 102-103
1934년 일본팀은 미국 올스타팀과의 18경기를 치르면서 전패를 기록했다. 그중에서 일본으로서는 가장 아까워할 만한 게임이 있다면 0:1로 석패한 11월 20일의 게임이다. 이치오카 타다오 일본 감독은 스타핀처럼 고교를 중퇴시키면서까지 팀에 합류시킨 열일곱 살의 사와무라 에이지(?村?治)를 마운드에 올려보냈다. 그런데 이 ‘스쿨보이’가 전설을 만들었다. 그가 네 타자(찰리 게링거,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지미 폭스)를 연속으로 삼진 아웃시켜버린 것이다. 미국 야구의 전설들을 넘어 일본 야구의 전설을 만든 순간이었다. 찰리 게링거,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지미 폭스가 누구인가? 모두가 아직까지도 미국인들의 영웅으로 남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자리를 잡고 있는, 전설 속의 선수들이 아닌가? 사와무라는 7회에 커브볼을 던졌다가 아쉽게도 게링거에게 홈런을 맞았다. 그는 자그마치 9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역투했지만 불행하게도 동료 타선의 도움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이 결승점이 되고 말았다.
p. 106
아무튼 장훈의 별명이 안타 제조기 아니었던가? 그를 대표하는 기록은 누가 뭐래도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다 안타 3,085개인 것이다. 그런데 이 기록이 2009년도에 한국인들이 별로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스즈키 이치로 선수에 의해서 깨진 것이다. 하지만 일본 언론 매체들은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다.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치로 선수가 위업을 달성한 것은 경하할만한 일이지만 장훈의 기록과 단순 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장훈은 시즌당 130게임 정도에 출장했지만 이치로는 기록의 반을 162게임씩 하는 미국에서 세운 것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니 일본의 기록은 하리모토(장훈의 일본 이름)의 것이다.
p. 124
그러다 나이 50세가 되던 1874년 현직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이소노 카미 신궁(石上神宮)의 주지인 대궁사(大宮司)로 취임해 1877년까지 약 4년간 재직한다. 그는 1874년 8월, 부임하자마자 1,500년가량이나 신궁의 땅속 보물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칠지도를 꺼내 들었다. 철로 된 칼의 몸체에는 음각으로 글씨를 새기고 금실을 박아 넣었으나 오랜 기간이 지나면서 칼은 녹으로 덮여 있었다. 스가 마사토모가 녹을 벗겨내고 칼로 금박을 긁어내자 글씨가 드러났다. 앞면에 34자, 뒷면에 새겨진 27자! 숨을 멈춰가며 칼 위의 글씨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스가의 얼굴은 예기치 못한 내용이 나타나자 곧바로 일그러져 버렸다. 얼마 후 그는 무언가 결심을 한 듯 굳어진 얼굴로 칠지도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곧 칼 위의 글자 몇 개를 날카로운 칼로 뭉개버리고 만다.
p. 132
당시 경성제대 교수였고 후에 일본제국 문부대신을 지낸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는 《조선도자명고》를 보고 “조선의 학도가 조국의 문화에 눈을 뜰 때 아마 한일합방 이래 일본인이 한일 중에서 가장 많이 감사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라고 말했다.그것은 전국의 흩어진 가마터를 두 발로 뒤지고 다님으로써 얻은 결과로, 《조선도자명고》에서는 한국 사람도 모르는 그릇 본래의 이름과 쓰임새를 자세히 정리한 책이다. 연구 논문이 나오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다쿠미의 안목을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조선 민예의 아름다움에 눈이 활짝 뜨게 되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다쿠미가 지은 《조선의 도자명고》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과거가 아무런 아쉬움도 없이 희미하게 사라져 가는 오늘날, 만약 이 저술이 10년만 늦었더라도 여기 모아져 기록된 명칭의 수는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지은이는 잃어버리게 될 인간의 기억들을 교묘하게 보완해 주었다. 즉, 묻혀버릴 뻔한 진리를 사라지지 않는 문자로 담아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과 후대의 사람들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아야 할 저작이다.”
p. 156
1927년 무렵부터 다쿠미와 알게 되어 다쿠미가 죽을 때까지 3년 남짓 교제한 경성제국대학 교수 아베 요시시게(阿倍能成)는 ‘아사카와 다쿠미를 애도한다’라는 제목의 추도문을 썼는데, 이 글은 경성일보에 4월 24일부터 5월 6일까지 5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여기서 아베는 다쿠미의 죽음을 “인류의 손실이다”라고 말했다. 아베의 애도문은 당시 일본 최고의 수필로 평가되었다. 1934년부 터 1947년까지 이와나미(岩波) 서점에서 출판한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 ‘인간의 가치’라는 제목으로 실려 학생들의 마음의 양식이 되었다.
“(전략) 다쿠미처럼 올바르고 의무를 중시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만을 경외하여 독립적이며 명석함과 더불어 미에 대한 조예까지 깊던 사람은 정말로 드물다. (중략) 이런 사람의 존재는 ‘세상을 살만하다’고 느끼게 한다. 특히 당시 조선처럼 인간적인 생활이 거의 불가능하던 곳에서는 더욱 그랬다. 나는 다쿠미의 죽음이 조선의 더할 수 없는 손실인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인류의 손실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중략) 특히 내지인이 조선인을 사랑하는 일은 일본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감상적인 인도주의자도 추상적인 자유주의자도 실질적인 문제 앞에서는 바로 무릎을 꿇고 말기 때문이다. (중략) 다쿠미의 생애는 ‘인간의 가치는 실로 인간 그 자체이며 그보다 많지도 적지도 않다’는 칸트의 말을 실제로 증명했다. 나는 진심으로 인간 ‘아사카와 다쿠미’의 영전에 깊이 머리를 숙인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