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동요가 쉬이 스러졌다. 나는 분수대 물에 번져 이르게 저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가 붉은 허공을 실눈으로 응시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긴 여행 중 만날 낯선 세계의 연속에서 내가 속해 있는 단 하나의 세상에 대해 명확한 목소리로 이야기해줄 사람, 스스로의 존재로 말미암아 내 존재의 오롯함을 확인시켜줄 사람, 내 삶의 심장박동을 그 가슴 안에 쥐고 있는 사람.
나는 이 사람과 동행할 것이다……. --- p.33, 〈우리가 꿈꿔왔던 파라다이스를 찾아 떠나다〉 중에서
우리가 막연히 꿈꾸었던 파라다이스의 조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쾌적한 기후와 안전한 생활이 보장되는 곳, 각자의 사회적 흥미와 인류적 소신을 실천할 수 있는 곳, 또한 각자가 이룰 삶의 방식이 상대방의 그것에 완벽한 리듬으로 맞물리는 곳. 즉, 그 어디든 될 수 있기도 혹은 그 어디든 될 수 없기도 한 곳이었다.
어쩌면 우리 두 사람이 꿈꾸는 삶의 이상理想은 여행 중 스치듯 배우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통해 그 진정한 모습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동안 넉넉한 마음으로 여행하며 소홀히 스쳐 보낸 수많은 삶의 모습들이야말로 우리만의 파라다이스를 구체화시킬 수 있게 해줄 현실적인 단서였을지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그의 카메라 안에 가장 생생한 모습으로 담겨져 있을 ‘그곳’은 아직도 꽤나 멀리에 존재하는 무인도처럼 보인다. 다만 이 여행이 길어질수록 더욱 가까워지게 될 어딘가임을 짐작할 따름이다. --- p.72, 〈우리가 꿈꿔왔던 파라다이스를 찾아 떠나다〉 중에서
모두가 식사를 마친 후 삼베 지붕의 성긴 틈 사이로 들어오던 태양의 열기가 짙은 오후의 색을 띨 때, 알리와 친구는 무언가에 홀린 듯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차가 주차된 도로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에 우리는 따라가지 않고 그저 지켜보았다.
그들은 차분한 걸음걸이로 태양이 작열하는 가장 먼 곳까지 천천히 나아가더니, 이내 뜨거운 모래밭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사그라드는 수평선 위로 퍼지는 빛줄기를 향해 몇 번이고 엎드려 절을 했다. 두 사람은 몸을 두르고 있던 하얀 홑옷까지 바닥에 넓게 펼쳐 놓았는데, 초연하게 내리눌린 맨살의 정강이가 무척이나 뜨거워 보였다.
그들이 등을 굽힐 때마다 태양과 조우하던 순백의 린넨이 수평선에 머물던 빛 한줄기에 반사되어 온 사막을 하얗게 바꿔 놓았다. 그 장면을 지켜보는 이의 눈이 황홀할 만큼 시려왔다. 사막은 어느새 북극처럼 하얀 곳이 되어버리고, 더위는 온전한 태양에 타버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그날 알게 되었다. 사막을 지나치는 자와 사막에 머무르는 자는 각기 다른 색채로 사막을 기억한다는 것을. --- p.105, 〈영원과 찰나를 동시에 약속하는 땅에서〉 중에서
여행 중에 아프리카를 찾아온 다른 수많은 이방인들을 만나고, 또 그들과 한데 섞여 이방인이 되기도 하지만 저 길을 지나는 사람도, 이 길을 떠나는 사람도, 그리고 그 길에 머무는 사람들조차 서로가 원래부터 닮아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 어떤 목적에 의해서든 여행 혹은 인생이라는 것은 지구라는 행성 전체를 삶의 영역으로 삼은 채 제 한 몸 거할 그 작은 자리 하나 찾는 이들의 이런저런 섞임일 테니까. --- p.112, 〈영원과 찰나를 동시에 약속하는 땅에서〉 중에서
매일같이 주어진 자리에서 하루 일과를 수행해내는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 두 사람으로 하여금 매일 같은 거리를 걷도록 했음이 분명했다. 어제 생수를 팔던 이는 오늘도 생수를 팔고, 오늘 고기를 굽는 이는 내일도 고기를 구울 것이라는 그 익숙한 공식 안에 우리의 일상을 내맡기고 싶었다. --- p.168, 〈지구 위 모든 삶은 닮아 있다〉 중에서
사랑이란 관심과 애정으로 시작해 시간이 지나면서는 존경과 성실함으로 상대의 곁에 그저 남아주는 것. 뤼시앙은 밭에서 일해 집에 먹을 것을 갖다 줄 것이고, 그녀는 집 안의 잔일을 도맡으며 지친 모습으로 돌아올 남편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 p.182, 〈지구 위 모든 삶은 닮아 있다〉 중에서
사랑은 오히려 평범한 것을 아름다움으로 만들어내는 힘이었다.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을 삶의 지속에 대한 감사로 여기게 하고, 그래도 인생이 지루하다면 모든 것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마주 잡은 두 손에 의지한 채 아프리카로, 아니 더 멀리까지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하는 힘이었다. --- p.220, 〈나 자신보다 누군가를 더 사랑하게 된 기적〉 중에서
우리 두 사람 앞에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는 모르겠다. 아프리카에 남아 평생을 정착하게 될지도, 어느 날 오세아니아로 훌쩍 떠나 뉴칼레도니아와 같은 천혜의 섬에서 환경구호 활동을 하게 될지도, 서울이나 쓆리와 같은 대도시에서 번듯한 직장을 얻게 될지도, 아니면 남프랑스 시골 구석에서 까치밥나무 농사를 짓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확실한 단 하나의 사실이 있다. 아프리카의 오지이든 중동의 전쟁지구이든, 우연이 데려다줄 그 어디에서든 나는 언제나 그와 함께이리라는 사실이다. 그와 함께하는 한, 언제나 그의 가슴 한 뼘 크기만큼의 내 작은 파라다이스가 보장되는 셈일 테니 나의 삶은 언제든 충분히 완전할 것이다.
--- p.254, 〈그와 함께, 내 작은 파라다이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