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달은 여종에게서 아기를 건네받아 발목을 잡고 거꾸로 들어 엉덩이를 철썩, 소리 나게 내리쳤다. 아기는 입만 조금 벙긋하더니 이내 얼굴을 찌푸리며 배냇짓을 할 뿐 울지 않았다.
“아이고 마님, 아기가 울지를 못합니다. 이 무슨 변고인지…….”
(……) 그 시간, 봉당에 서서 날아가는 기러기를 바라보며 이종달의 목소리를 엿듣고 있던 함익현도 자식이 벙어리라는 것을 알고는 도포 자락을 그러잡고 소리 낮춰 비통한 눈물을 쏟아냈다. 함복배가 세상에 태어난 날이었다. --- p.8~9
신설기관의 수장이라지만 지금 내 처지는 귀양살이나 다름없었다. (……) 하지만 아주 절망적인 것만도 아니었다. 신문물검역소는 올봄, 왜국의 사신이 임금께 진상한 신문물의 용처를 파악하여 보고문을 작성하는 임시기관의 성격을 띠고 있다. 당연히 보고문은 누구의 손도 거치지 않고 직접 임금에게 전달된다. 열과 성을 다해 임무를 완수해낸다면 다시 도성에 입성할 기회가 줄어질지 모른다는 희망이 남아 있었다. --- p.22
“벨테브레! 베엘테으브으레에!”
그의 이름이 밸투부레인 모양이다. 생선의 배알과 부레를 섞어놓은 이름 같기도 하고, 언뜻 욕지거리 같기도 했다. 네 자인 이름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다른 세상에는 밸씨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래, 밸투부레 선생. 시장하지는 않으신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손님을 굶길 수야 없지.”
체면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으로 배를 짚고 볼을 꺼뜨리며 배가 고픈 시늉을 했다. 밸투부레가 비로소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도 배를 짚고 볼을 꺼뜨렸다. --- p.33
“Condoom!”
이름을 알고 있는 걸 보니 사용에도 능할 터였다. 나는 이번 물건도 쉽게 보고문을 쓸 수 있겠다고 짐작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박연은 선 자리에서 꽤나 꾸물대더니 가죽 주머니를 자신의 가랑이 사이에 갖다 댔다. 그러고는 허리를 조금 흔드는가 싶더니 이내 멋쩍은 표정이 되어 의자에 털썩 앉았다. 바지와 연관이 있는 물건이란 말인가? 박연은 뭔가 생각이 난 듯이 검지와 중지를 한데 모아 가죽 주머니를 그 위에 씌웠다. 옳다. 저것은 골무였다. --- p.79~80
“오늘의 연회 제목은 동정녀(童貞女) 함락(陷落)으로 정했습니다. 부디 즐거운 잔치가 되길 앙망하나이다.”
퉁퉁퉁, 북소리가 들리자 이층 한편에 있던 방문이 열리고 포승줄에 묶인 처녀 하나가 여자들에게 이끌려 섬으로 옮겨졌다. 재갈을 물린 것도 아닌데 처녀는 얼어붙은 듯, 신음 소리조차 흘리지 못하고 여자들의 지시에 따라 순순히 의자에 앉았다. 처녀의 행색은 기녀와는 사뭇 달랐다.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곱상한 처녀의 나이는 열예닐곱 살로 보였다. --- p.204~205
“그자는 어지자지입니다. 여자인 동시에 남자지만,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요물이지요.”
(……) 어지자지란 남녀추니라고도 불리는 희귀한 종류의 사람을 일컫는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남자와 여자의 성기가 한데 붙어 있다고 했다. 대부분은 성격이나 외모에 따라 여자 또는 남자를 택해 살아가지만 기수영처럼 양성의 매력을 모두 갖춘 자는 드물다. 조선뿐 아니라 청국이나 왜국의 문헌에도 야사처럼 단 한두 줄 정도 남아 있을 만큼 드믄 존재인 탓에 실제로 만난다는 건 머리 위로 유성이 떨어지는 것만큼이나 낮은 확률이었다. --- p.225~226
들창의 글씨를 눈으로 읽으며 막 기수영을 밀치려던 찰나, 빛이 쏟아졌다. 그건 들창으로 든 햇빛이 아니었다. 붉은 혀 같은 불길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방 안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왔다. 때아닌 불길에 기수영이 겁을 집어먹고 주저앉아 몸을 떨었다.
“나도 데려가시오!”
(……) 기수영의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되지 않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막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려 들창을 넘으려던 내 허리춤으로 차가운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왔다. 그 무언가를 조종한 사람은 기수영이었다. 그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미호의 은장도를 쥐고 있었다. --- p.254~255
“괴물 등에 괴물이 올라탄 격이로세.”
기방은 모래성처럼 서서히, 순차적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사람들이 혼을 빼놓은 건 위풍당당하던 기방의 붕괴만은 아닌 듯했다. 제주에서 노란 머리와 회색 몸뚱이를 가진 괴물로 비유될 존재는 박연과 코길이뿐이었다. 나는 말에서 내려 사람들을 헤치고 중심부로 파고들었다. 기방의 마당 안에는 의복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여인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원통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누구 하나 여인들에게 덮을 옷가지를 가져다주거나 더러운 얼굴을 닦아주지 않았다. --- p.263
“진정 연지 낭자가 실종되었단 말입니까?”
이상도 어른이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목울대만 꿀렁거렸다.
“오늘 아침, 심마니 하나가 산방산 자락에서 오도성 겸도사의 딸 오익선의 시신을 발견했네. 수법은 여송화 사건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네. 목이 잘리고 거기서 흐른 피에 산짐승이 꾀어 만신창이가 되었지.”
(……) 천지연폭포 아래서 옥비를 머리에 꽂고 한없이 다정스레 웃던 연지의 얼굴이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말뜻을 전부 헤아리지 못할 테지만 박연의 푸른 눈망울에 시름이 가득했다. --- p.266~267
“모두 잃었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지금 함 소장님 앞에는 조선 최고의 신문물이 함께 울고 있지 않습니까.”
고개를 들었다. 거기엔 정말 나를 위해 진심으로 눈물짓고 있는 신문물이 있었다. 화란이라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나라에서 떠내려와 노란 피부에 검은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 일생을 맡긴 사내, 박연이었다. --- p.297
“나리, 방금 머리가 노란 자들이 떼로 제주에 밀려왔답니다. 하멜인지, 하메리인지 하는 자가 대장 격인데 화란 말을 한답니다. 막말로 이게 그놈 대가리에서 뽑은 머리카락인데, 보십쇼.”
(……) 함복배는 말을 타고 감영으로 향하는 우탁의 등을 맥없이 바라보았다.
“웰― 꼼!”
그건 박연이 함복배에게 가장 처음 가르쳐준 ‘환영합니다’라는 뜻의 화란 말이었다.
--- p.309~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