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대한민국의 치부가 드러나고, 국민들의 분노는 광장의 수백만 함성으로 표출되었다. 막장 드라마나 삼류소설에서 가능할 것 같은 국정농단과 비리, 청문회와 검찰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관련자들의 파렴치한 모습은 과연 이 나라에 법과 정의가 존재하는지를 의심케 한다. 이런 대한민국의 현실은 한국 교회 안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심지어 심화되어왔다. 역사적으로 해방 이후 남하한 북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재구성된 남한 교회는 분단과 반공의 최대 피해자이자 수혜자였다. 묵시적 종말론과 성서무오설을 신봉하는 근본주의적 신학에 영향을 받고, 재림신앙과 성령체험을 중시하는 부흥운동, 개인 전도와 영혼구원에 전념한 전도활동, 그리고 교회 성장과 번영신학을 지향하는 목회 속에서, ‘민주주의’나 ‘정의’가 설 자리는 거의 없었다. 영혼, 내세, 개인에 집중하면서, 몸, 현세, 사회는 간과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정의가 배제된 사랑, 권리가 부정된 희생, 현실이 간과된 신학, 세상을 포기한 천국이 강단을 지배했고, 그것이 곧 한국 교회의 지배적 실체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하나님의 정의』는 한국 교회에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도전이자 선물이다.
이 책에서, 월터스토프는 자신이 남아프리카공화국, 팔레스타인, 그리고 온두라스에서 직접 체험한 것들이 정의에 대한 그의 철학적·윤리적·신학적 사유에 끼친 영향을 때로는 감동적인 고백으로, 때로는 치밀한 논리와 논쟁으로 서술한다. 즉, 그는 정의에 대한 학계의 지배적 담론들과 치열하게 논쟁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정의론을 전개한다.
먼저 월터스토프는 자신의 복잡하고 난해한 윤리적 담론을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서술한다. 세상을 머릿속에서 상상한 이상적 상태에 근거해서 이해하거나, 글과 화면을 통해 경험하는 것과 현실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직접 듣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는 이 점에서 월터스토프의 주장에 압도되었다. 둘째, 월터스토프는 정의를 ‘권리’를 통해 설명하고 입증한다. 셋째,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월터스토프는 성경과 교부의 글을 통해, 정의에 대한 신학적 토대를 놓는다. 넷째, 월터스토프는 미학자로서 자신의 전공을 정의에 대한 윤리적 성찰에도 적용한다. 끝으로, 이 책에서 월터스토프는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토대로 자신의 치밀한 철학적 사유를 발전시키지만, 결국 ‘희망’에 대한 서술로 글을 마무리한다. 그가 경험했고 고민했듯이, 현실의 불의는 대단히 거대하며 막강하다. 그런 불의에 저항하며 정의를 수립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은 수적으로 적고, 현실적 힘도 미약해 보인다. 따라서 불의가 지배하는 것 같은 현실에서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은 자칫 무모하고 부질없는 공상 혹은 망상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바로 이 맥락에서 기독인 철학자로서 월터스토프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이 땅에 정의를 이루는 것이 단지 철학적 사색으로 실현될 수 없으며, 용감한 실천이 현실의 장벽 앞에 좌절하는 상황에서, 이성적 사유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연결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옮긴이의 글’」중에서
이 책 대부분의 장들은 짧다. 각 장마다 한 주제씩 다룬다. 나는 그것들을 여섯 개의 부로 묶었다. 1부 ‘각성’에서는 내가 어떻게 정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지금처럼 생각하게 되었는지 서술한다. 2부 ‘정의와 권리’에서는 내가 전에 쓴 정의에 대한 글들에서 정교하게 발전시킨 정의론을 간략히 소개한다. 나는 정의가 권리에 근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권리에 대해 설명한다. 3부 ‘성경의 정의’에서는 정의가 얼마나 깊이 기독교 성경, 즉 구약과 신약에 스며들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4부 ‘불의 바로잡기’에서는 불의를 교정하려는 투쟁의 다양한 차원들과 왜 그 투쟁이 그렇게 어렵고 논쟁적인지 생각해본다. 몇 년 전에 온두라스를 방문한 후에야, 나는 정당한 처벌 없이는 근본적 혹은 ‘기본적’ 정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5부, ‘정당한 처벌’의 주제다. 끝으로, 6부 ‘아름다움, 희망, 그리고 정의’에서는, 정의와 아름다움의 관계, 정의와 희망의 관계에 대해 숙고하고 간략한 재정리로 글을 마무리한다.
---「‘저자 서문’ 」중에서
샬롬은 우리 서로 간의 관계 속에 번영을 포함한다. 사회가 세상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개인들의 집합일 때, 샬롬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의가 존재하고, 사람들이 부당한 대접을 받는 곳마다, 샬롬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를 때, 혹은 누군가가 존재하는 것은 알지만 그것에 대해 무관심할 때조차,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 비록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삶에서 자신들의 운명에 만족할 경우에도, 샬롬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모든 흑인과 유색인들이 아파르트헤이트에 만족했을지라도(물론 그들은 만족하지 않았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남아공에는 샬롬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의 모든 흑인들이 자신들의 노예 상태에 대해 만족했을지라도(물론 그들은 만족하지 않았다), 해방 전에는 샬롬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정한 번영은 단지 감정적 만족이 아니다. 진정한 번영은 오직 우리가 더 이상 서로를 부당하게 대하거나 억압하지 않을 때 존재한다. 샬롬은 정의를 자신의 토대로 삼는다. 샬롬은 정의를 초월하지만, 샬롬은 정의만큼 중요하다.
---「18장 ‘정의, 사랑, 그리고 샬롬’ 」중에서
봉사기관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단지 음식을 먹고 옷을 입고 집에 거주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편견의 덫에 걸리기 쉽다. 대체로 그런 기관에서 접촉하는 사람들은 먹을 음식이 충분하지 않고, 입을 옷이 별로 없으며, 그들의 집은 지저분하거나 집 자체가 없다. 음식, 옷, 그리고 집 문제가 절박하다. 정의는 그런 문제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을 훨씬 넘어선다. 인간에게 교육이 박탈되면, 그는 무례하게 취급받는 것이다. 인간에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삶의 진로를 결정할 기회가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는 무례하게 취급받는 것이다. 인간이 미학적 불결함 속에 살도록 강요된다면, 그는 무례하게 취급되는 것이다. 사회적 상황이 우리 동료 가운데 어떤 사람들을 빈곤 속에 살도록 강요한다면, 그들은 학대받고 부당하게 취급받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상황이 우리 동료 가운데 어떤 이들을 미학적 불결함 속에 살도록 강요한다면, 그들도 학대받고 부당하게 취급받는 것이다. 우리 동료 인간들이 어떤 감각적 즐거움도 제공될 수 없는 환경에서 살 때, 혹은 그들이 그런 환경에서 살도록 방치되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다. 미학적 품위의 환경에서 살 기회는 선택적 사치가 아니다. 정의가 그것을 요구한다.
---「29장 ‘정의와 아름다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