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여행이 더 이상 ‘무용’하지 않고 무엇이든 수단으로 전락한 치열한 이 사회, 기필코 무엇을 얻고자 목표를 세우고 그곳만 바라보고 걸어가는 것은 참 피곤한 일이다.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즐거운데 책 읽기를 통해, 여행을 통해 무엇을 더 얻으려는 것은 과한 욕심이 아닐까. 여행도, 독서도, 인생도, 무용한 것이 좋다. _여행의 무용담
여행은 켜켜이 쌓인 수많은 기억으로 이루어진 인생의 지층에서 유독 화석이 풍부한 지질시대 같다.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찰나의 시간일지라도 기후와 지각 운동, 수량과 공기 성분 등의 조건이 잘 맞아떨어져 수많은
생명체가 출현하고 번성했던, 그래서 수억 년이 지난 후에도 끊임없이 재발견되고 회자되고 연구되는 지질학적 황금시대. 두께는 얇지만, ‘여행층’이 품고 있는 화석의 양과 질은 나의 ‘인생 고고학 박물관’ 팸플릿 표지를 차지하며 가장 넓은 전시실을 채울 만큼 존재감이 크다. 시간이 지나도 풍화되지 않는 추억들이 밀도 높게 박혀 있는 ‘황금지층’. _ 황금지층
모든 사람이 똑같은 사건을 겪고 나서도 저마다 다르게 정의해 놓은 단어들. 자의로 혹은 타의로 읽게 된 다른 이의 사전을 참고 문헌 삼아서 자신만의 경험으로, 자신만의 ‘사전’을 쓴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관찰하고, 다양한 관계로 얽힌 온갖 상황 속에서 다채로운 기분들을 직접 경험하고서 새로운 단어들과 전례 없던 사용법들로 나만의 ‘사전’을 채워간다.
‘짝사랑’이나 ‘직장 상사’처럼 꽤나 분량이 많은 단어에서부터 처음 눌려본 ‘가위’, ‘그린티 프라푸치노’처럼 사소한 단어까지, 나만의 경험에 의해 다듬어진 나만의 주관적인 언어로 내 ‘사전’의 어휘 수를 늘려가고, 이미 등재된 어휘에 대해서 새로운 의미를 추가하고 수정하고 때론 과감하게 삭제하기. 그리고 단어의 용법 및 뉘앙스를 잘 표현하는 사전의 ‘예문’에 해당하는 ‘경험’ 항목을 늘려가는 것, 그것이 시간을 쌓고 ‘인생사전’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_인생사전
여행이란 이런 소소한 행복을 발견하는 훈련이다. 근육을 반복적으로 운동해서 단련하듯 여행 중에 소소한 것에서 만족하고 기뻐하는 경험을 학습하고 나면, 돌아온 일상에서도 작고 하찮은 일들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발달된 근육’을 가질 수 있다.
여행에서 특별히 거창한 무엇을 얻겠다고 의도하지 않아도 낯선 풍경 속에서 나에게 주어진 낯선 자유가 주는 하루하루의 소박한 즐거움들 사이에서 결정적이고 소중한 무언가가 자라나고 있었던 것 같다. 앞으로 ‘무엇’이 되든 간에 어떻게든 일상에서 행복의 조각들을 찾아내어 더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그리고 그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보다 ‘어떻게’ 살고 싶다는 방식에 대한 목표를 위해 나 자신을 최대한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여행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_행복 단련
여행이 아무리 길어도 여행은 여행일 뿐, 일상의 무게에 비하면 깃털처럼 가벼워서 쉬이 날아가 버린다. 인간이 만든 물체를 아무리 멀리 쏘아 올려도 지구의 중력권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 이상 금세 땅으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일상의 관성은 어마어마하다. 일상의 인력을 벗어나려면, 그래서 그곳의 삶이 새로운 일상이 되려면 이민이든 유학이든 여행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이 필요하다. 기껏 여행 다녀온 것이 억울하기도 하고 아깝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사람과의 이별은 대체로 그때가 마지막인 줄 알지 못하는 반면 여행은 마지막 순간임을 잘 알고 있으니 노력이라도 해볼 수 있다는 것._일상의 관성
무엇보다 나를 잘 알게 되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나의 매력이 무엇이고 나쁜 점은 무엇인지,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하고 어떤 순간을 제일 불편해하는지, 내가 남들에 비해 잘하는 일은 무엇이고 못 하는 일은 무엇인지.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1위부터 5위까지 매길 수 있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맥주도 꼽을 수 있고, 나를 감동시킬 수 있는 음악과 책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나와 친해질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쉽게 구별해낼 수 있게 되었다.
직접 써보고 올리는 사용자 리뷰처럼, 이런저런 일을 겪어가면서 ‘나’라는 제품에 대한 꼼꼼한 매뉴얼을 어느 정도 완성한 것 같다. 차를 오래 몰다 보면 엔진 소리만 들어도 이상을 알 수 있다는 베테랑 운전자처럼, 나
라는 개체에 어떤 입력을 가했을 때 어떤 출력이 나올지 꽤 숙지하게 된 것이다. 매뉴얼과 데이터 시트 덕분에 나의 성능과 한계를 정확히 알기에 무리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달릴 수 있는지 알고, 잘 맞춰줄 수 있다. 그래서 몸은 낡아갈지언정 마음의 실수도, 무리도, 고장도, 불편과 아픔도, 20대에 비해 훨씬 적다._‘나’ 사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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