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교사들이 없다면 구원의 희망은 없을 것이니, 죄의 세상이 영원히 “실재하는” 듯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기만하는 자는 기만할 것이니, 그들은 기만을 가르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 말고 무엇이 지옥이겠는가? 이것은 하느님의 교사들을 위한 지침서다. 그들은 완벽하지 않다. 그랬다면 그들은 이곳에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완벽해지는 것이 그들의 소명이므로, 그들은 완벽함을 배울 때까지 많고 많은 방법으로 다시 또다시 가르친다. 그리고는 그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비록 그들의 생각은 영원히 힘과 진리의 근원으로 남아있지만 말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떻게 선택되는가? 그들은 무엇을 하는가? 그들은 자신의 구원과 세상의 구원을 어떻게 이뤄낼 수 있는가? 이 지침서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려 한다. --- p.10
정직함은 네가 하는 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 용어는 실제로 일관성을 의미한다. 네가 하는 말 중에 너의 생각이나 행동과 모순되는 것은 전혀 없다. 다른 생각과 상반되는 생각도 전혀 없다. 네가 하는 말과 어긋나는 행위도 전혀 없다. 다른 말과 일치하지 않는 말도 전혀 없다. 이러한 자가 참으로 정직한 자다. 그 어떤 수준에서도 그는 자기 자신과 갈등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그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갈등할 수 없다. --- p.25
하느님의 교사는 판단하지 않는다. 판단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게 되는 것이니, 그것은 네가 갖지도 않은 지위를 떠맡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기만 없는 판단은 불가능하다. 판단은 네가 네 형제들을 잘못 보았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네가 어떻게 너 자신을 잘못보지 않았을 수 있겠는가? 판단은 신뢰의 결핍을 함축하는데, 신뢰는 여전히 하느님의 교사의 사고체계 전체의 기반이다. 신뢰가 상실되면, 그의 모든 배움이 사라진다. 판단이 없다면, 모든 것을 동등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과연 누가 다르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판단이 없다면, 모든 사람이 형제다. 왜냐하면, 과연 누가 따로 떨어져 있겠는가? 판단은 정직함을 파괴하고 신뢰를 산산조각 낸다. 하느님의 교사라면 그 누구도 판단하면서 배우기를 바랄 수는 없다. --- p.26
하느님의 교사는 그가 주어버릴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원치 않으니, 그것은 정의상 그에게 가치가 없을 것임을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가 과연 무엇 때문에 그것을 원하겠는가? 그는 그로 인해 잃을 수만 있을 뿐이다. 그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만이 간직할 수 있는 것은 구하지 않으니, 그것은 상실을 보장해주는 보증서이기 때문이다. 그는 고통 받기를 원치 않는다. 그가 왜 굳이 자기 자신에게 고통을 보장해 주어야 하겠는가? 그러나 그는 정녕 하느님에게서 온 것,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을 위한 것은 모두 자신의 것으로 간직하기를 원한다. 그것들이야말로 본래 그에게 속한 것이다. 그것들이야말로 그가 진정으로 아낌없이 주어버려서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다. --- p.30
치유는 고통 받는 자가 고통에서 더 이상 어떤 가치도 보지 않는 순간 이루어진다. 고통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지 않은 한, 누가 고통을 선택하겠는가? --- p.34
치유는 병의 무가치함이 인식되는 것과 정확히 비례하여 일어날 수밖에 없다. 단지 “이것에 내가 얻을 것이란 전혀 없다.”라고 말하기만 하면 치유된다. --- p.35
병이란 마음이 어떤 목적을 위해 몸을 사용하려는 결정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치유의 기반이다. 이것은 모든 형식의 치유에 해당된다. 환자가 이 말이 맞다고 결정하기만 하면, 그는 회복된다. 그가 회복되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그는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 p.36
하느님의 교사는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한 채, 축복 속에 온다. 병든 자들을 치유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들에게 이미 주신 치료법을 상기시켜 주려고 온다. --- p.38
하느님의 상급 교사들은 자신의 형제가 믿는 병의 형식은 단 한 번도 고려하지 않는다. 병의 형식을 고려하는 것은, 그 모든 형식은 목적이 같으므로 실제로 서로 다르지 않음을 잊는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고통 받을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자신을 너무나 속이려 하는 형제 안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구한다. 그리고 그 형제에게, 그는 그 자신을 만들지 않았으며, 따라서 틀림없이 하느님이 창조하신 대로 남아있다고 상기시켜준다. 그들은 환상이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음을 인식한다. 그들의 마음에 있는 진리는 형제들의 마음에 있는 진리에게 다가가서, 환상이 강화되지 않도록 한다. 이와 같이 환상을 진리로 가져가며, 진리를 환상으로 가져가지는 않는다. 따라서 환상이 물리쳐지는데, 다른 이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일한 뜻이 그 자체와 연합하는 것을 통해 그렇게 된다. 그 어떤 뜻도 자신의 뜻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자신의 뜻도 하느님의 뜻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보기, 이것이 하느님의 교사의 기능이다. --- p.39
하느님의 교사라면 치유를 제공했는데 수령되지(received, 받아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그의 선물이 언제 받아들여져야(acceted) 할지 판단하는 것은 그에게 달려있지 않다. 그로 하여금 그것이 이미 수령되었음을 확신하고, 그것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인식되는 순간 받아들여질 것임을 신뢰하게 하라. --- p.41
그러니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한숨을 내쉬며 판단을 내려놓아라. 이제 너는 그저 휘청거리다가 넘어져 그 밑에 깔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큰 짐을 내려놓았다. 그 짐은 모두 환상이었다.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하느님의 교사는 짐 없이 일어나 가볍게 걸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얻는 혜택은 이것만이 아니다. 그의 걱정이 사라진다. 왜냐하면 이제 그에겐 어떤 걱정거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판단과 함께 걱정거리도 드렸다. 그는 자기 자신을 성령께 드렸고, 이제 자신의 판단 대신에 성령의 판단을 신뢰하기로 선택했다. 이제 그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그의 안내자는 확실하다. 전에 판단하러 왔던 곳에, 이제 그는 축복하러 온다. 지금 웃고 있는 그곳에, 전에 그는 울려고 오곤 했다. --- p.55
세상은 슬픈 곳이므로, 기쁨 속에 끝날 것이다. 기쁨이 왔을 때, 세상의 목적은 사라졌다. 세상은 전쟁터이므로, 평화 속에 끝날 것이다. 평화가 왔을 때, 무엇이 세상의 목적이란 말인가? 세상은 눈물바다이므로, 웃음 속에 끝날 것이다. 웃음이 있는 곳에서, 누가 더 이상 울 수 있겠는가? 완전한 용서만이 이 모든 것을 가져와 세상을 축복할 것이다. 세상은 축복 속에 떠나니, 세상은 시작된 것처럼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는 것이 하느님의 교사들의 기능이니,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천국이 반영된 레슨이기 때문이다. --- p.71
하느님의 보호를 받아들인 하느님의 교사에게 하루가 얼마나 단순하고도 얼마나 편안하게 지나가는지! 그가 전에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온갖 것은 더 이상 흥미를 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안전하며, 그의 하루가 그럴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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