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는 실천적인 중도와 연기적인 중도가 있으며, 해탈은 중도에 의지합니다. 중도의 구체적 실천 내용은 팔정도이고, 팔정도는 사성제 중에서 도제에 속합니다. 팔정도를 실행하면 법안이 열리고, 여실관의 지혜가 생겨서 세간의 진실상을 또렷이 볼 수 있습니다. 무상·고가 다가옴을 또렷이 보아 고성제의 진리를 명백히 알고, 생멸의 인연을 또렷이 보아 집성제의 진리를 분명히 이해하며, 계속해서 도성제를 성취하고 멸성제로 증입證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성제는 수행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모두 포함하고, 두 가지 측면의 중도를 포괄한다고 말합니다.--- p.48
부처님께서 개오하고 중도를 실현하셨을 때 완전히 번뇌의 종자를 끊어버리는 법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완전히 번뇌종자를 끊어버릴 수 있다면 다시는 윤회하지 않을 것이고, 계속해서 오취온 가운데 있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고제를 실현하셨고, 오취온 안에 주인이 없음을 발견하셨습니다. 만약 주인의 개념이 있다면 완전히 해탈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의 개념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여전히 가장 미세한 주인의 개념이 있다면 모두 다 마음의 괴로움(苦), 마음의 결박(縛), 마음의 유루(漏), 마음의 근심(憂), 마음의 응어리(結)입니다. 진정으로 해탈하려면 주인의 개념을 완전히 없애버려야 하고, 무아無我의 참뜻을 몸으로 증득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아야 진정한 고제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으며, 진정한 집제를 끊을 수 있으며, 진정한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를 실현할 수 있으며, 진정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아서 중도의 내용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p.64
우리들이 만약 무량심無量心을 실현하여 삿된 집착(邪執)의 마음을 버리려면 마땅히 중도를 실현하여야 합니다. 중도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있으려면 반드시 도를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도를 깨닫지 못한다면 해탈의 소연도 볼 수 없고, 사성제 피차간의 관계도 통찰할 수 없습니다. 도를 깨달아야 사성제가 동시에 현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성제가 다 같이 출현할 때 주인, 자아(我)의 개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해탈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현관現觀의 과정이 바로 사성제의 과정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아의 개념이 있으면 마음은 진정한 해탈경계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자아의 개념이 없어야 마음은 해탈경계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전법륜경』에서 왜 고행을 떼어놓으라고 설명하셨겠습니까? 고행으로는 해탈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중도에 의지하여 해탈을 실현하셨습니다. 그때 이미 어떠한 주인의 개념도 없으셨고,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한계를 멀리 여의고 고행·쾌락 두 가지 극단을 멀리 여의고서 구경에 괴로움을 벗어나셨습니다.
인도철학은 해탈경계가 바로 삼매이고, 진정한 삼매가 있으면 진정한 해탈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직 부처님만 “삼매(定)”가 있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적멸寂滅이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만약 중도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면 진정한 해탈은 없습니다. 중도가 있어야 고·집·멸·도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고행이 해탈의 경계를 실현할 수 없고, 오직 중도에 의지해야 실현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고행을 벗어났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들이 무슨 법문을 수행하던 관계없이 만약 중도가 없다면 해탈의 목표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p.66
괴로움은 끊임없이 연속해서 괴로운 느낌(苦受)을 받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연속해서 무상한 핍박을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약 어떠한 “자아”, “주인”의 개념이든 그것이 있다면 무상의 핍박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설사 매우 깊은 삼매를 닦아 지닐지라도 여전히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무상 핍박의 경계가 없음을 분명히 이해할 수 없으며, 오직 중도를 실현할 때 “자아”의 개념이 없어야 무상을 이해하고, 괴로움의 조건을 분명히 이해하여 괴로움을 벗어나며, 무상핍박의 경계가 없음을 경험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열반의 경계라고 생각하셨습니다. --- p.68
부처님께서는 팔정도를 밖으로 드러내셨고, 무루지혜의 경계를 실현하셨습니다. 만약 무루지혜로 견도를 실현할 수 있다면 선업·불선업이 있으나, 이미 선업·악업을 짓는 주인 혹은 과보를 받는 사람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무루지혜 중에 「주인」의 개념이 존재할 수가 없을까요? 왜냐하면 무행심無行心의 경계를 실현하였기 때문입니다. 무행심이 있어야 사성제와 팔정도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교리문답의 짧은 경(有明小經)』에서 법수 비구니(Dhammadinn? bhikkhun?)는 팔정도를 「신견의 멸에 이르는 도(身見滅道)」라고 하고, 바로 중도이며, 또한 「무루팔정도無漏八正道」라고 설명합니다. 왜 팔정도를 「신견이 멸하는 도」라고 할까요? 왜냐하면 견도를 실현하여 무루지혜 속에 선업·악업의 주체가 있을 수가 없고, 또한 미래에 선악의 과보를 받을 주체라는 생각이 없어져 신견身見을 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p.109
사념처가 있어야 해탈이 있고, 사념처가 없으면 수행에 의한 해탈은 없습니다. 수념修念은 지관止觀의 조건을 성취하는 것으로 「알아차림」이 없으면 해탈도 없습니다. 그래서 남전·북전 모두 사념처를 기초로 삼아 세계의 모든 법은 모두 사념처 가운데 포괄된다고 설명합니다. 사념처 중에서 법념처는 신·수·심·법 및 일체법을 포함합니다. 사념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록 사성제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 수 있습니다. 사성제를 진정으로 철저히 알 수 있으려면 가장 먼저 반드시 성도成道를 해야 합니다. 오직 성도가 있어야 출세간심·무루심으로 사성제를 몸으로 증득할 수 있습니다.--- p.167
대승불교의 목표는 「무주열반無住涅槃」의 실현, 바로 집착이 없는 열반의 실현에 있습니다. 열반 그 자체는 소연이 없지만, 그것의 범위는 사실은 바로 진여입니다. 비록 그것이 출세간의 경계일지라도 무위법에 속하기 때문에 대승불교는 세간·출세간의 분별을 뛰어넘음을 강조하고 중생을 불쌍히 여겨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무주열반은 바로 생사에 머물지 않고 열반에 머물지 않는 자비·지혜의 대용大用입니다. 무주열반 안에 우리들은 비로소 승의법勝義法을 진정으로 실현하는 것입니다.
--- p.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