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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피

현명한 피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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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4월 28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268쪽 | 378g | 135*195*20mm
ISBN13 9788932814773
ISBN10 893281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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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즐 모츠는 녹색 플러시 천을 입힌 좌석에 몸을 앞으로 숙이고 앉아, 마치 기차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하려는 듯 잠시 창문을 응시하더니, 통로를 따라 객실 맨 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같은 칸 좌석에 마주 앉아 있던 월리 비 히치콕 부인은 이런 초저녁 광경이야말로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면서, 모츠에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집으로 돌아가나 봐요.” 부인은 그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부인 눈에는 그가 스무 살이 갓 넘어 보였지만, 그의 무릎 위에는 나이 지긋한 시골 목사가 쓸 것 같은 테가 넓고 뻣뻣한 검은 모자가 놓여 있었다. 그는 화려한 푸른색 양복을 입었는데, 소매에는 아직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그는 대꾸는커녕 무언가를 바라보면서 부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부인은 멋쩍어서 짐짓 무심한 척하며 가격표를 슬쩍 훔쳐보았다. 그의 양복은 11달러 98센트짜리였다. 그녀는 그가 그만 한 가격의 사람이라 생각하고는, 이제 당당하게 그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 p.19-21

톨킨햄에서 둘째 날 밤, 헤이즐 모츠는 번화가를 따라 상점들에 바짝 붙어서 걸었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마치 발판처럼 보이는 긴 은빛 광선이 검은 하늘을 가로지르고, 그 뒤로 깊숙이 펼쳐진 수천 개의 별들은 우주의 온 질서가 담긴 거대한 건축 작업이 영원에 걸쳐 완성되어 가는 것처럼 매우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하늘을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톨킨햄의 상점들이 목요일에는 밤까지 영업을 하기 때문에 손님들은 쇼핑을 더 즐길 수 있었다. 헤이즈의 그림자는 그의 뒤에 있기도 앞에 있기도 했고, 때로 다른 사람들의 그림자로 인해 흐트러지기도 했다. 하지만 홀로 그의 뒤에 늘어져 있을 때는 뒷걸음질 치는 빼빼 마른 소심한 그림자일 뿐이었다. --- p.51

어머니가 물통을 두고 회초리를 들고서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물었다.
“너 뭐 봤니?”
“너 뭐 봤어?”
“너 뭐 봤어?” 계속 같은 어조로 물었다. 어머니가 회초리로 그의 종아리를 때렸지만, 그는 나무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어머니가 말했다. “예수님은 너를 구원하기 위해 돌아가셨어.”
“난 부탁한 적 없는데.” 그가 중얼거렸다. --- p.81

공원은 도시의 심장부였다. 그는 도시에 왔고-피를 통해 깨달은 바로는-도시의 심장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매일 도시의 심장부를 보았다. 매일, 놀라고 경외감에 휩싸이고 압도당해서, 그런 것을 생각만 해도 땀이 흘렀다. 공원의 중심에는 그가 발견한 무언가가 있었다. 미스터리였다. 물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유리관 안에 들어 있었고 그 위에는 타자기로 적은 카드가 있어 그에 관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카드가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는 바로 에녹 안에 있었다. 말로 할 수 없는 끔찍한 지식, 그의 안에서 큰 불안이 자라는 것 같은 끔찍한 지식이었다. 그 미스터리를 아무에게나 보여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보여 주어야 했다. 그것을 볼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어야 했다. 이 도시 출신이 아니어야 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그 사람을 보면 알아볼 수 있다고 확신했고, 그를 빨리 보지 않으면 자기 안에 있는 불안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커져서, 차를 훔치거나 은행을 털거나 어둑한 길목에 나와 여자를 덮칠 것임을 알았다. 아침 내내 그의 피는 오늘 분명 그 사람이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p.97

헤이즈는 한 시간 정도 차 안에 있으면서 나쁜 경험을 했다. 죽지 않은 채로 땅에 파묻히는 악몽을 꾼 것이다.…어떤 이들은 동물원에 온 아이처럼 꽤나 경이감 어린 눈빛으로, 어떤 이들은 눈앞에 펼쳐진 것을 그저 바라보는 그런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종이 가방을 든 여자 세 명이, 그가 구매할 수 있는 생선이나 되는 듯 자세히 살펴보더니, 잠시 후 그냥 지나갔다. 캔버스 모자를 쓴 남자가 안을 쳐다보며 엄지손가락을 코에 갖다 대고 다른 손가락들을 흔들었다. 그다음 어떤 여자가 양쪽에 두 어린 사내아이를 데리고 지나가다가 안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잠시 후, 그녀가 아이들을 밀쳐내 시야에서 사라지자, 안으로 들어와 잠시 그의 곁에 있어 주겠다는 의사를 보였지만, 유리가 막혀 들어올 수 없자 결국 가 버렸다. 그러는 동안 헤이즈는 차 밖으로 나가려고 애썼지만, 소용없었고 이리저리 막혀 꼼짝도 못했다. 호크스가 렌치를 들고 타원형 창문에 나타나 주길 계속 기대했지만 결국 그 맹인은 오지 않았다.--- p.183


어디서 비추는지 확실하지 않은 빛 아래에서, 그의 여위고 하얀 다리 하나가 사라지는 듯했고 또 다른 하나마저 사라지고 팔도 그렇게 하나씩 사라지는 듯했다. 더 육중하고 텁수룩한 검은 형체가 그를 대신했다.…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처음에는 작고 불분명했지만 금세 커지기 시작했다. 소리가 낮고 으스스하더니 다시 커졌다가 또다시 낮고 으스스했고 그러다가 모두 사라졌다. 그 형체는 아무것도 잡지 않고 팔을 뻗었다가 또 격렬하게 흔들었다. 팔을 끌어당겼다가 다시 뻗더니 흔들었다. 이러한 동작을 네다섯 번 반복했다. 그다음 뾰족한 막대기를 들어 올려 당당한 모습으로 팔 아래 끼고 숲을 벗어나 고속도로로 향했다. 이때까지 존재한 어떤 고릴라도, 아프리카 정글에 있든, 캘리포니아에 있든, 세계에서 가장 멋진 뉴욕의 아파트에 있든, 지금 이 고릴라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그의 신에게서 보상을 받았다.--- p.217-218


헤이즈는 그가 일하는 동안 계속 따라다니면서 무엇을 믿는 것이 올바른지 말해 주었다. 볼 수 없는 것과 손으로 쥘 수 없는 것과 이빨로 물어 확인할 수 없는 것은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그는 며칠 전만 해도 신성모독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은 신성모독을 할 만한 무언가를 믿어야 하므로 그것조차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사람들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하는 예수에 대해서도 예수는 제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머리에 담기에는 가증스러운 개념이라고 말한 뒤, 자신의 말을 강조하려고 소년의 물통을 들어 콘크리트 바닥에 내던졌다. 그가 조용하지만 강렬한 확신을 보이며 예수를 저주하고 모독하기 시작하자, 소년은 일손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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