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전의 그 말, “목사님은 교회 안에만 계시니까 세상이 얼마나 빡빡하게 돌아가는지 모르시잖아요. 그렇게 사는 게 현실에서는 안 돼요. 그게 말처럼 되나요. 말은 쉽지”라는 말을 되뇌어 보면, 반은 맞고 나머지 반은 틀리다. 내가 교회 안에서만 산 것은 맞지만,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은 틀리다.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말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은 무리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틀린 것이며, 성경은 현실감각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객관성을 상실한 옛날 이스라엘 역사책에 불과하게 된다. --- p.27
내 안에 은근히 도전 의욕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물질세계를 관통하는 생계의 현장에서 오히려 더 현존하시고, 더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을 직접 겪어 보고, 주님의 말씀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전하고 싶은 것 말이다. 어느새 나는 나머지 반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 세계에 뛰어들고 있었다. 정말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 소명감을 가지고 사는 것이 이리저리 치이는 생계의 현장에서는 그리도, 그리도 요원한 것인지 부딪쳐 봐야만했다. 만일 일터에서는 하나님을 결코 경험하지 못하고, 느낄 수도 없다면 지금껏 교회 안에서 내가 만난 하나님은 반쪽짜리 가짜 하나님이시라는 말밖에 되지 않으니 말이다.--- p. 28
그전에는 생업에만 매달려서 물고기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자신의 죄가 있는지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어부였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물고기가 인생의 전부였다. 물고기에 울고 웃는 사람이었다. 물고기는 어부에게 돈이다. 곧 돈에 인생의 행복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인생관이 바뀌었다. 직업관이 바뀐 것이다. 궁극적 인생의 목적이 달라졌다. 베드로 자신의 영혼이 건짐을 받았듯이, 자신처럼 물질에만 목을 매는 사람들의 영혼이 건짐 받기를 원했다. 대신 생계는 목적에서 목적을 위한 기반(基盤)이 되었다.--- p. 54
하나님은 사람을 먹고사는 것으로만 끝나는 생으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동물은 먹는 것만 있어도 만족을 얻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때로 먹을 것이 변변치 않고 환경이 거칠고 모질다고 하더라도 생의 이유가 확고하면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이기고도 남는다. 많이 산 인생은 아니지만 나이가 차 갈수록 인생이 괴롭고 고달플 때는 환경이 열악할 때보다 목적이 불분명하고 ‘왜 살아야 하는지’ 삶의 이정표가 흔들릴 때임을 깨닫는다.--- p. 59
주님의 부름은 고작 생계에 갇히지 않는다. 생계를 뛰어넘는다. 주님의 부름은 생계에 밀려나지 않는다. 주님은 생계를 밀어내고 소명의 열정을 회복시키시며, 생의 목적을 확고하게 해 이 땅에 영광스러운 당신의 도구로 그 사람을 고용하신다. 먹고사는 것에 밀려나는 인생이 아니라, 먹고사는 것을 밀어내고 보다 가치 있는 사명을 위해 살도록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다. 그리고 그 부름의 소리에 응한 소명자에게 당신의 능력을 쏟아 부어 주신다.--- p. 79
예수님을 진정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에게는 공통분모가 있는데, 앞에서 언급했듯 삶에 대한 진지한 소명 의식이다. “나는 예수는 믿지만 그런 것에 관심 없습니다. 먹고사는 게 바쁘다 보니 소명(하나님의 나라나 하나님의 의)에 대해 심각하게 고심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가슴으로 믿은 자는 애초에 그런 말이 입 밖에 나올 수 없다. 그런 모순적인 말은 성경 사전에 없다. 적어도 소명의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본인의 무능과 무기력함을 주님 앞에 한탄이라도 한다. 물고기가 전부였던 삶에서 물고기 너머의 삶을 동경한다. 소명 의식이 생성될 수밖에 없다. 베드로와 삭개오에게 보듯 말이다.--- p. 88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위치에 서 있는가? 내 삶의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확신하는가? 누군가의 평가에 따라 내 직업관이 흔들리지 않고 내가 하는 일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는가? 언제든지 내려가시라면 기꺼이 내려놓고 내려갈 수 있고, 올라가라시면 열심히 노력해 올라가겠는가? 소명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직은 하나님의 부름이 있는 고지요, 곧 성직(聖職)이다.--- p.149
흔히 소명을 받았다 하면 목회자를 주로 생각하는 교인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교로 가는 것을 받은 소명에 순종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를 그대로 적용하면 진짜 그리스도인은 모두 다 신학교로 가야 한다. 가지 않는다면 소명을 받지 못했거나 받은 소명에 순종하지 않는 가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주님이 열어 주신 소명의 스펙트럼이 언제부터 그렇게 협소했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좁디좁은 시야로 넓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나온 소명의 길을 하나의 길로 제한하는 것은 무례한 것이다.--- p.154
북 카페를 열며 직업군에 대한 이해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확실히 시장경제를 책이나 신문으로 이해한 것과 직접 자영업자로서 경험해 본 것은 확연히 차이가 났고, 얻는 것도 많았다. 이전에 경험했던 일들에 비해 이 세계는 훨씬 넓고 매서웠다. 신학교 시절 신학자 칼 바르트가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나아가라”라고 했듯이 성경만 보지 말고 신문도 열심히 읽을 것을 교육받았다. 아쉽게도 신문 종이가 담아내는 세상은 남이 경험한 세상이었지 내가 경험한 세상은 아니었다. 두 발이 세상에 있다 보면 완전히 다른 생태계다.--- p.217
“사람은 그의 생활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다.” 라틴어 ‘코람 데오’(Coram Deo)의 의미다. ‘코람’(coram)은 ‘앞에’, ‘데오’(Deo)는 ‘하나님’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생활 전반의 영역이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있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어떤 종류의 일을 하든 코람 데오. 그리스도인에게 교회 복사기나 회사의 복사기나 차이가 없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p.228
그런데 이후 일터에서의 소명 의식에 눈을 뜨면서 이와 같이 버거 만드는 일도 해보니, 설교 때 느꼈던 희열과 낙담이 고스란히 이 현장에도 있는 것이 아닌가. 좋고 건강한 버거를 만들어서 손님이 즐겁게 먹고 나가는 것을 보면 정말 기쁘다. 행여 조리가 미숙해서 만족스럽지 못하게 나가는 손님의 표정을 보면(초창기 때 특히 그랬다) 그렇게 마음이 불편할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음식 한 접시에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상호 인격이 담겨 있음이 깨달아졌다.
--- p.229
그리스도인은 현실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꿈꾸며 현실을 조합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직을 맡겨 주신 것은, 세속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라는 소명의 본업을 망각하지 않으며, 세계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세우기 위해서다. 세계‘직’인 그리스도인으로 말이다.
--- p.268
[소명의 기도]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주님.
매서운 생계의 현장에 내몰릴 때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을 생각하게 하옵시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을 향한 소명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생계의 고통이 아니라 소명의 즐거움으로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그럼에도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어제는 마음을 굳건히 붙잡았지만 오늘은 그 마음을 걷잡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그 움직임을 조절 못하오니 주님의 긍휼로 붙들어 주옵소서.
--- p.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