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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화가

그림자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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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0년 06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472쪽 | 603g | 148*210*30mm
ISBN13 9788993952186
ISBN10 8993952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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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그 여인들이 있군.”
파야레스가 스케치북을 가리켰다.
“그래. 나의 아비뇽의 처녀들이 모두 저 안에 있어. 비평가들이 이 그림을 놓고 얼마나 한심한 소리를 쏟아내던지. 하여튼, 이 그림을 그렸을 때 내 나이 스물여덟이었지.”
“파블로! 스물여덟이 아니라 스물다섯이었어.”
파야레스의 말에 피카소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여러 해 동안 저 여자들 생각을 떨칠 수 없었어. 그렇게 그 긴긴 세월을 보냈고 머릿속에서 그 괴물을 지워버리고 싶었는데, 그걸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어. 하지만, 그때만 해도 아직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지. 오로지 고통스럽기만 했어. 고통스럽고, 또 증오심으로 불타올랐고. 결국 멀리 떠나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어.”
피카소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탁자 위에 놓인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떤 멍청한 작자들은 내가 마티스, 드랭 등과 겨루기 위해 경쟁적으로 저 그림을 그렸다고 하지만, 그건 다 헛소리야! 내가 저 그림을 그린 건, 마침내 그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어. 숱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내가 그려낼 형상을 찾아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림상 볼라드 덕분에 난 난생처음 돈도 쥐게 되었고. 이봐, 마누엘! 저 그림의 탄생은 내게는 마치 자식을 낳은 것과도 같았네. 오로지 저 그림을 그려내겠다는 일념으로 아홉 달을 빠져 있었거든. 스케치만 8백 커트를 그렸고, 최종 작품을 만들어낼 때까지 쓴 스케치북만 해도 산더미 같았고, 실제 그림도 여섯 번이나 그렸어. 그리고 마침내 나의 내면으로부터 저 여인들을 끄집어낼 수 있었지. 여자들은 내게 뭔가를 요구하고 있었어. 가엾은 여인들! 끔찍하게도!”

아벨 폰테 청장은 부검의가 부검을 하는 동안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폰테 청장은 쉰 살 정도 되는 차분한 성격의 남자로, 쿠바에서 군 생활을 했던 탓에 시신을 보는 데에는 익숙해 있었다. 하지만, 주검을 숱하게 본 그조차도 이번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사인은 과다출혈이며, 시신이 발견된 지점이 살해 현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심장에 하나, 그리고 왼쪽 폐 쪽에 다섯 군데 찔린 자국이 있고요. 저항하며 생긴 상처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즉 피해자가 저항을 하느라 손이나 팔 같은 데 입은 자상의 흔적이 없다는 겁니다. 추측건대, 제일 먼저 목을 베인 것 같습니다. 살인자가 목을 먼저 벤 후, 이미 바닥으로 쓰러진 피해자를 상대로 마구 칼을 찔러댄 것이지요. 발견된 칼자국만도 스물다섯 군뎁니다. 아까 언급한 것 외에도 앞가슴뼈에 한 군데, 성기에 다섯 군데 찔린 자국이 있습니다. 이건 그야말로 도살 수준이네요. 자, 어디 어딘지는 아시겠죠? 하여간, 이런 시신은 처음 봅니다. 마구 칼질을 해댄 뒤, 옷을 찢어버리고 다시 시신을 상대로 분노를 폭발시킨 거예요. 성기 쪽에 낸 상처는 그야말로 끔찍합니다. 말 그대로 잔인무도 그 자체예요. 그리고 이쪽에 난, 이 기다란 칼집 있지요? 이리로 간을 꺼내 갔어요.”
“간이라고요?”
“맞습니다, 청장님. 범인이 피해자의 간을 꺼내 갔어요.”

마넹이 청장에게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오늘 아침에 배달된 겁니다.”
「와! 이번 일 진짜 재미있었어! 오늘 창부 하나를 개복수술 해줬거든. 경찰들은 다들 자고 있나 봐? 안녕! -잭으로부터」
폰테 청장이 편지를 읽었다. 증거물만 아니었으면 두 손으로 박박 찢어버렸을 것이다.
“시신은 새벽 5시에 발견되었습니다.”
“저도 일찌감치 신문사에 나와 있다가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잠도 오지 않고, 집에 가고 싶지도 않더군요. 그런데 책상 위에 이게 있었어요. 그 개자식이 여자를 죽이고 제게 편지를 남긴 겁니다. 우릴 조롱하고 약 올리면서 신이 나는 모양이에요.”
지난번 사건이 일어나고 다시 이번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꼭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마넹은 경찰청장에게 무슨 쓸 만한 증거라도 찾아낸 게 있느냐고 캐물었다. 폰테 청장은 마넹이라는 기자가 몹시 신경에 거슬렸다. 새벽부터 그 염병할 사진기자를 대동하고 사건 현장에 나타나 사진기 셔터를 마구 눌러댈 때부터 참고 참으려 했지만, 이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 뜻대로 다 되었어요.”
“무슨 뜻입니까? 내 뜻대로 되었다니요?”
“조만간 영국에서 귀신같은 사람이 하나 올 겁니다. 지원차 오는 건지, 조사 총책임을 맡게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일단 지금은 오늘 밤에 있을 또 다른 살인을 예방하는 데 총력을 집중해야 합니다.”
애로우가 칠판 앞으로 가 지도를 그리더니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된 지점을 표시했다. 그리고 그 두 지점을 포함하는 원을 그린 뒤 말했다.
“우리의 살인마가 새로운 범행을 ?지를 장소는 아마도 이 근방일 겁니다. 오늘 밤, 동원 가능한 모든 인력을 이 지역에 2인 1조로 풀었으면 합니다.”
애로우가 청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범인은 키가 180센티미터 정도의 장신이며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입니다. 아마도 스포츠광일 겁니다. 몸무게는 80킬로그램 정도 되고요.”
“범행예상 장소가 그곳이라고 어떻게 확신합니까?”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단순히 제 직감이 아니라 다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추론한 결과라는 겁니다. 그리고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범행은 그 지점에서 오늘 밤이나 내일 새벽 사이에 일어날 겁니다.”

“런던에서 잭 더 리퍼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지. 잠시 생각을 정리해 퍼즐을 맞춰보자고. 1889년 윈저 궁, 여왕과 사적으로는 친구이며 바르셀로나에서도 사업을 운영하는 한 신사가 궁으로 불려 갔어.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 것 같아?”
“내가 여왕을 해볼까요, 아니면 신사를 할까요?”
“내가 여왕이 되어볼게. 내가 먼저 시작하지. 지금까지 그대는 우리 왕실을 위해 참으로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도리를 다한 겁니다.”
“저는 영원히 폐하께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내가 미스터리한 신사가 되어 말했다.
“내 손자가 잠시 이곳을 떠야 할 것 같습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가게 놓아둘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애로우가 말했다.
나는 신사가 무슨 말을 했을까 잠시 생각해보다가 대사를 읊었다.
“모든 일이 우리가 바라던 대로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왕실도 무탈하고요.”
“여왕으로서 꼭 알아야 할 일이 아닌 일은 굳이 알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것이 아무 문제 없다는 경의 말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폐하.”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헉! 뭐라고 하지?’ 나는 생각했다.
“계속해요, 셰린포드! 생각에 날개를 달아주라고. 멋진 소설을 쓸 때 하듯이 말이야. 상상이 좋은 대사를 만드는 법이니까. 자, 다시.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가 다시 물었다.
“그렇습니다, 폐하. 대영제국의 안녕을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조용히 외곽으로 빠져 지내게 하는 게 좋겠다는 폐하의 말씀도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모든 게 끝나게 될 테니까요.”
내가 즉흥적으로 지어낸 이 대사가 애로우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한마디를 덧붙였다.
“공작은 오래 살지 못할 겁니다. 병이 중해서요. 매독균이 온몸에 퍼진 상태입니다. 제가 친구를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인사드리거라. 친구 분이시란다.”
어린 파블로가 파블로 피카소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고는 곧 다시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피카소는 스케치북을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우리 둘만 남자 피카소가 눈짓으로 내게 물었다.
“맞아요. 카르멘의 아들이에요. 애로우가 아이를 입양했고, 우리 셋이 함께 이 마을로 온 거예요. 아주 착한 아이랍니다. 애로우를 많이 따랐고요. 또래치고는 아주 영민해요. 제 엄마 얼굴도 모르고 자랐는데, 양아버지까지…… 휴!”
나는 이쯤에서 이야기를 끝냈다.
피카소가 마당으로 나와 막대기로 땅바닥을 끼적이고 있던 꼬마 곁으로 다가갔다.
“뭐 하니?”
“그림 그려요. 제가 하나 그려 드릴까요?”
“그래.”
“뭘 그려 드릴까요?”
“비둘기?”
“어디서부터 시작해요?”
“아무 데서나…… 잠깐만! 아저씨 금방 올게.”
피카소는 마당을 떠나 저만치 멀어져갔다.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잠시 후, 그가 팔에 상자 하나를 끼고 돌아왔다.
“비둘기를 그려놨어요.”
꼬마 파블로가 말했다.
파블로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그림도구 상자를 내밀었다.
“이거 받아. 아저씨가 주는 선물이야. 아저씨도 아버지에게서 받은 거란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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