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도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아이들과 함께 풍선을 들고 돌아다니는 부모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아이는 배가 고팠다. 빵은 다 먹었고 주스 때문에 오줌이 마려웠지만, 꼼짝 말고 있으라고 한 그녀의 말을 떠올리며 감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이는 기다리는 일에 익숙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오줌을 눠야 했고, 엄마가 금방 데리러 오지 않으면 바지에 오줌을 쌀지도 몰랐다. 엄마에게 그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엄마에게 맞고 어둠 속에 혼자 남겨질지도 모르니까. 어제 엄마와 같이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가 맞아서 욱신거리는 곳에 아이는 손을 올렸다. 엄마는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쏘아보면서 버릇없는 녀석이라고 등을 철썩 때렸다. --- pp.6~7
스벤 요한손은 소년이 화장실로 뛰어가는 모습을 근심스레 지켜보며 계단에서 기다렸다. 소년이 눈에 띈 때가 오후였기에, 이제는 걱정스러웠다. 소년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스벤은 쪼그리고 앉아서 아이의 물건을 살펴보았다. 카세트 플레이어, 동화책 『밤비』, 빵 부스러기가 든 투명한 비닐봉지, 노란 플라스틱 뚜껑으로 닫혀 있고 내용물이 약간 남아 있는 작은 주스 병. 그는 아이의 이름이 적혀 있는지 보려고 책을 펼쳤다. 그러자 접힌 종잇조각이 땅으로 떨어졌다. 불길한 예감에 종이를 펼친 그는 최악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음을 확인했다. 종이 위에는 짤막한 메시지가 유려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이 아이를 돌봐주세요. 죄송합니다.’ --- p.10
결국 만사가 끝없는 권력 다툼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즈음 알리세의 뱃속에서는 이미 안니카가 자라고 있었고, 안니카가 태어나자 싸움도 끝났다. 계속되는 불화로 마지막 남은 창의력마저 잃어버린 알리세는 악셀의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지게 되었다. 알리세는 자신의 충동에 맞서 싸우려 했지만, 그 충동이 내면에서 일어난 것인지 외부에서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악셀은 당연하다는 듯이 꿈을 좇는데, 알리세는 꿈을 포기해야 했다. 아이들과 아이들이 알리세에게 요구하는 것들은, 한때 그녀의 운명이었던 모든 것을 위협했다. 그녀는 아이들이 고함을 지르면 하던 일을 제쳐두고 달려가야 했고,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했고, 자신을 의존하는 아이들에게 구속당해야 했다.
알리세 랑네르펠트는 마른 침을 삼키고 허공을 응시했다. 부엌시계가 끝없이 째깍거리는 소리만이 그녀를 현재에 머무르게 했다.
숨통을 조일 듯 위협하던 것과, 몇 번이고 다시 봐도 너무나 뻔하던 것이 사실은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45년이 지난 지금은 다시 경험할 수만 있다면 그 무엇과 바꿔도 아깝지 않을 순간.
한 번 더 기회를 얻는다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 pp.69~70
문을 닫고 서둘러 봉투를 뜯어 종이 뭉치를 꺼냈다. 보자마자 그것이 그녀의 원고라는 걸 알았다. 줄이 있는 종이에 손으로 쓴 원고였다. 첫 장에는 타이핑 된 편지가 클립에 끼워 있었다. 그는 빠르게 글을 훑었다.
악셀, 지난 시간은 외롭지 않았어요. 당신은 아직도 제 마음속에 함께 있어요. 여기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으니 그냥 책을 보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의 현명한 의견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아무도 읽지 않았어요(보면 알 테지만 토리뉘에게는 너무 수준이 높아서). 내 책은 오직 당신의 사랑스런 눈이 읽어 주기를 기다린답니다.
당신의 할리나.
추신. 드디어 만나서 너무 기뻐요! H
처음에는 무엇 때문에 더 화가 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자신의 관심이 응답받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친밀한 말투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귀중한 시간을 뻔뻔스레 요구하는 태도 때문인지. 그가 편집자가 되고 싶었다면 출판사에 일자리를 얻었을 것이다. 처녀작가의 필사적인 야심만큼 그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것도 없었다. 악셀은 편지와 원고를 다시 봉투에 넣고 벽장 자물쇠를 열었다. 그는 쌓인 것들 위에 봉투를 얹어 놓고는 타자기로 돌아갔다.
2시 20분이었다. 그는 저녁이 되도록 한 자도 쓰지 못했다.
여름 동안 이어지던 저기압이 끈덕지게 계속되었다. 나흘 동안 비가 내리더니 하늘이 너무나 어두워 오전에도 불을 켜야 했다. 우편함에 비가 샜지만, 악셀은 예르다가 가져다준 카드에 쓰인 글자를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잉크로 누구에게나 훤히 보이게 쓴 카드.
프린센 레스토랑 오늘 17시. 당신의 H --- pp.227~228
“네가 사고 싶은 게 나의 침묵이라면, 한 가지 방법이 있지. 네가 어디까지 희생하려고 하느냐에 달려 있지만.”
악셀은 가만히 앉아서, 그가 계속 말하기를 기다렸다.
“이런 말이 있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넌 내 여자를 빼앗았어.”
“토리뉘, 그때 한 번뿐이었고 ?네 여자인지도 몰랐어. 자네가 지금 이러는 게 그것 때문인가? 단 한 번의 잘못 때문에?”
단조로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 번은 실수고 두 번은 습관이라는 말도 있지?”
악셀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팔을 벌리자 토리뉘는 말을 이었다.
“나도 한 번이면 충분해.”
“이해가 안 가네. 원하는 게 뭔가?”
“똑같이 하는 것.” --- p.345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허리를 굽혀 손으로 삽자루를 쥐었을 때도. 따라잡으려고 달리기 시작했을 때도. 문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서서 자갈길에 누워 있는 움직임 없는 시신을 보았을 때조차도. 그가 느낀 것은 놀라움뿐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삽을 쥐고 있는 손에 닿자, 그는 그것이 자기 손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손이 본능에, 인류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에 따른 것이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살인도 불사하라는 본능에.
그는 자기도 모르는 새 내면 어딘가에 그 본능을 숨기고 있었다.
그 오랜 세월 분투하여 일궈 낸 작은 성공.
지극히 칭송받는 남자의 그림자에 가려진 삶.
그 작은 성공을 위해, 그는 살인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 p.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