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것과 여행은 다르다. 런던에 몇 주간, 혹은 몇 개월간 머물며 겪은 런던에 대해 쓴 책들을 보면서, 아, 이들은 너무나도 영국의 화려한 겉모습에 빠져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들른 여행지는 아름답다. 경험해야 할 좋은 것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너무 많아서 다 보고 갈 수도 없다. 하지만 한 나라에 뿌리내리고 산다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 p.8
런던만큼 열린 도시가 또 어디 있겠는가. 다인종, 다민족, 다언어 도시에서 살고 있는 나는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이다! 정부의 다양한 지원 정책 덕에 체제는 잘도 굴러간다. 범죄가 줄어드니 동네가 안전해지고, 가난한 이에게 이것저것 지원해주니 유토피아가 따로 없다. --- p.10
나는 이 책 또한 하나의 민족지라 부르고 싶다. 물론 거창한 학술적 담론이나 ‘여기 가면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어요 ’ 식의 여행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저널리스트로, 아이 엄마로, 한 남자의 아내로, 그리고 대학원생으로 런던에 살면서 부닥치고 느낀 삶의 소중한 편린들이다. --- p.11
영국이 얼마나 다인종, 다민족, 다언어 국가인지 체험하려면 시내버스를 타보면 안다. 얼굴도 가지각색, 언어도 가지각색이다. 시끄럽게 전화통화를 하는 이탈리아 여자, 머리에 히잡 (Hijab, 이슬람 여자들이 머리에 쓰는 수건)을 예쁘게 두른 채 아랍어로 수다를 떠는 모슬렘 아줌마, 맨 뒷줄에 쭈그리고 앉아 쿵쿵거리는 16비트 음악을 듣고 있는 흑인 청소년, 한 일주일은 머리를 감지 않은 듯 심하게 윤기가 흐르는 중국인 아저씨도 있다. 이쯤 되면 이 버스를 ‘지구촌 버스’ 라고 불러야 한다. --- p.18
사실 영국인에게 삶의 행복이란 소박한 데서 온다. 오후에 티타임을 갖고, 개를 데리고 공원을 산책하고,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그릇과 가구를 후손에게 물려주고, 채소나 꽃을 키울 조그만 뒷마당이 있으면 그걸로 끝이다. --- p.82
영국 남자들에게 최고의 호사는 펍에 가는 것이다. 그것도 애 딸린 마누라는 떼어놓은 채 홀로 고독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역시나 이웃집에서 ‘탈출’한 남자와 맥주 한 병을 사이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영국 남자들에게 펍은 없어서는 안 될 생활의 한 부분이다. --- p.86
하지만 이곳 런던에서는 다르다. 실용성과 소박함이 사회 전체에 깔려 있다. 런던에서 외모로 부자들을 가려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다들 낡은 옷을 입고 낡은 신발을 신고 다닌다. 여자들은 동네 슈퍼에서 산 10파운드짜리 비닐가죽 가방을 들거나 심지어 배낭을 메고 다닌다. 편하고 가볍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도 명품족들이다. 하지만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철철이 사재기하는 것도 아니고 몇 십 년간 모아온 명품들이다. 그들은 대신 그 돈을 문화생활에 투자한다. --- pp.105-106
자동차도 가고, 축구팀도 가고, 신문도 갔다. 모두 영국인들의 손 안에서 떠나갔다. 그럼 영국에는 무엇이 남았단 말인가. 영국산 쇠고기와 우유, 일부 먹을거리만 남았다. 플라스틱 그릇, 어린이 장난감 등은 ‘메이드 인 차이나’다. 프라이마크, 갭 등 영국산 의류는 모두 ‘메이드 인 스리랑카’ 혹은 ‘메이드 인 인디아’다. 사과와 자두는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왔고, 일부는 저 멀리 뉴질랜드에서 건너오기도 한다. 산업혁명이 제일 먼저 시작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 만들어진 공산품을 만나기는 극히 어렵다. --- p.131
런던 밤거리를 한번 걸어보라. 몇 년을 이곳에 살아도 끝끝내 소화하지 못할 뮤지컬과 연극, 무용이 곳곳에서 쏟아져 나온다. 그것도 비교적 저렴한 가격이라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도 마음만 먹으면 즐길 수 있다. 미술관은 또 어떤가. ‘어드미션 프리’라는 대형 현수막을 내걸고 지나가는 행인을 손짓한다. 주머니에 돈 한푼 없이도 고흐며 르느와르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맘껏 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환상적인 도시인가. --- p.172~173
영국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렇게 헐렁할 수가!’라며 이마를 탁 치게 된다. 영국에서 사업을 할 경우 천국이 따로 없다. 각종 규제도 없다. 개인사업자의 경우, 사업자 등록을 할 필요도 사업에 걸맞은 자격 요건도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사업이 있으면 그냥 시작하면 된다. 그리고선 정부에 자발적으로 세금만 내면 된다. --- p.177
청문회가 시작되면 양 당의 당수들이 중앙에 놓인 큰 테이블의 양쪽 끝에 마주 선다. 그리고 설전이 시작된다.
“당신이 주장하는 정책(보수당의 상속세 감세 정책)은 백만장자들에게만 이로울 뿐입니다. 흥, 이튼 학교 운동장에서 놀 때부터 꿈꿔온 정책인가 보지?”-고든 브라운 총리
브라운 총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동당 의원들이 포복절도하며 웃는다.
“사립학교 출신 배경을 문제 삼는 건 계급 전쟁을 일으키자는 것인가? 투표권자들이 당신에게 등을 돌릴 것이오.” -제임스 카메론 보수당 당수
보수당 의원들은 카메론 당수의 말에 “옳소!” 하며 박수를 친다.’
설전은 설전인데 위트 있는 설전이다. --- p.199
런던은 매년 10만 명 이상의 외지인이 새로 유입돼 덩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다. 런던 시는 향후 8년간 5만 명의 초등학교 학생 수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당연히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초등학교를 신설하거나 학교의 학급 수를 늘려서라도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겠지만, 이곳에선 모든 것이 달팽이 기어가듯 느리고 또 무심하다. --- p.219
하지만 런던은 전혀 딴 세상이다. 누구 하나 눈을 치우러 나오는 사람도 없다. 도로에 제설차도 없다. 물론 눈이 드문 나라니 제설차도 별로 없을 뿐더러 염화칼슘은 자연을 해친다며 극도로 싫어한다. 눈은 그냥 놔두면 녹게 되어 있다,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라, 이것이 영국 정부와 시민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 p.248
영국인은 뭔가를 의도적으로 바꾸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냥 내버려둔다. 자연의 힘을 거스르지 않고 그냥 묵묵히 받아들이고 불편함을 견뎌낸다. --- p.249
런던에 산 지 만 3년이 됐다. 이제는 이 체제에 녹아들 때도 됐는데, 즐길 일만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점점 싸움닭이 되어가고 있다. 한국에 잠깐 들를 때면 다들 나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세계 최고의 도시 런던에서 문화생활을 맘껏 향유하고 유럽여행도 실컷 하는 등 팔자가 늘어졌다고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환상적인 런던’은 일주일, 혹은 몇 달간 여행을 왔을 때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나 같은 외국인이 런던에서 살려면 잔 다르크가 되어야 한다. --- p.371
때론 정도를 넘는 이 소박함과 실용성, 그리고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 분위기는 영국 사회에 흐르는 하나의 코드 같다. 자율과 이성의 두 바퀴로 굴러가는 수레 속에서 나는 선진국을 보았다.
--- p.3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