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왜 역사비평학(역자 주: 성경비평)을 반대합니까?” 필자는 이런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먼저 간단하게 대답을 하고자 한다. “내가 역사비평 신학에 반대하는 이유는, 먼저 나의 주님 그리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골고다에서 나를 위해 이루신 아름다운 구원사역을 영접하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루돌프 불트만, 에른스트 푹스, 프리드리히 고가르텐과 게르하르트 에벨링의 제자로서, 역사비평학에서는 최고의 학자들이 필자의 선생들이었다. 그리고 필자는 이 분야에서 전문가였다. 필자가 처녀작으로 출간한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필자는 브라운쉬바이크 공대 신학부의 정교수가 되었고, 교수자격 논문으로 마부르크 대학 신학부의 명예 교수가 되었으며, 신약연구협회(Society for New Testament Studies)의 회원이 되었다. 이로써 필자는 동료 신학 교수들에게 점점 더 많은 인정을 받게 되었다.
필자는 철저한 역사비평가였으며, 필자의 신학적 연구를 통해 하나님께 봉사를 하고, 복음 전파에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필자는 열심히 관찰하고, 여러 가지 정보들을 접하면서 반복되는 깨달음을 통해 성경 본문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서는 어떠한 진리도 찾아낼 수 없으며, 이런 작업은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찰하게 된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당시에 필자가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었던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얻은 실제적인 깨달음이었다. 그런데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필자에게 그의 은혜와 말씀을 통해 이런 신학 성격에 대해서도 이론적으로 깨달음을 주셨다.
역사비평 신학은 하나님 말씀에 기초를 두지 않고 철학을 근본으로 삼고 있는데, 철학은 먼저 진리의 정의를 스스로 내림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제외한다. 성경의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 우리의 구세주시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이런 전제 아래서는 아예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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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런 쓰디쓴 경험으로 마태복음 10장 39절,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는 말씀이 진리임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진정한 신자들에게로 나를 인도하셨다. 그리고 필자는 신자들의 간증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에서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들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한 형제를 통해 내 마음속에서 말씀하셨고, 결국 필자는 그분의 큰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필자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즉시 필자의 생명을 그분의 장중으로 거두어 주시고, 필자의 삶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하셨다. 필자는 (술)중독 증세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말씀과 신자들과의 교제에 갈급하여 찾게 되었으며, 그동안 지은 죄에 대해 변명만 해 오던 것들을 분명하게 죄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필자는 처음으로 검은 것을 검은 것으로, 흰 것을 흰 것으로 깨닫게 되고, 그것들이 구별되지 않는 회색으로 뒤섞는 것을 중단했을 때에 체험했던 그 큰 희열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필자가 스스로의 삶을 예수님께 위탁한 지 한 달쯤 지나서, 하나님께서는 필자에게 그의 약속의 말씀이 분명한 현실임을 확신시켜 주셨다. 네팔에서 활동하는 한 위클리프 선교사의 보고를 듣게 되었는데, 그의 언어 선생이 그가 없는 사이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네팔에서는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교사는 계속해서 그 초신자가 법정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들려주었다. 그런데 필자가 그 언어 선생에 대해서 그전에 들어본 적이 있는 얘기로 미루어 보아, 그가 결코 그의 능력으로는 법정에서 그렇게 말할 수 없음을 필자는 순간적으로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때 마가복음 13장 9~11절 말씀이 생각이 났다. 이 말씀은 나에게는 단지 학문적인 관심의 대상이었을 뿐인데, 필자는 갑자기 그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필자는 하나님의 약속은 현실로 이루어지고,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며, 그분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돌연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 필자가 이전에 몇 달 동안 들어왔던 믿음의 모든 증언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추어졌으며,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역사 하시는 것을 보면서,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이적들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한 필자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필자는 학생들에게 장님을 인도하는 장님이었음을 깨닫고 회개를 했다. --- 「들어가는 글」중에서
에타 린네만 교수는 루릵프 불트만의 직계 제자였다. 불트만은 성경에서의 신화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대신에 비신화화 해석을 시도한 사람으로서, 20세기 신학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신학자였다. 그는 린네만의 교수 자격 논문을 지도했다. 그녀의 처녀작, 『예수님의 비유』가 베스트셀러가 됨으로써 명성을 얻었으며 후에 신학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독일 신학 대학에서 여자 교수는 극히 드물다). 특히 린네만은 신약학 교수로서 성경비평에는 권위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교수로서 절정의 시기인 50세가 갓 넘었을 때, 그녀는 넘어졌다. 자신은 신학을 통해 하나님을 섬긴다고 믿었지만, 그와 정반대로 신학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서 있었던 확고한 기반인 역사비평학이 아무런 과학적인 근거도 없을 뿐더러, 이 역사비평학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고, 반신학적인 이론임을 깨달았다.
이를 깨닫게 되자, 그녀는 정신적인 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을 잃고 술로 자신을 달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는 마태복음 10장 39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그 후에 믿음의 형제들의 인도를 통해 하나님을 영접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새 생명을 얻었다. 그리고 성경을 다시 연구하기 시작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쓰였음을 확신하였으며, 성경이 한 마디도 오류가 없는 하나님 말씀임을 믿게 되었다. 그때는 1977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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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로서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을 한 번 통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번 읽으라는 것이다. 이 책에는 린네만의 깊은 통찰이 들어 있는 문장들이 많이 있다. 이 문장들을 지나치지 않고 계속적으로 같이 생각을 해 봄으로써 우리는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또한 구조 속에 갇혀서, 혹은 문화에 길들여져 사고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린네만이 한국에서 빛을 보게 된 것은 “부흥과개혁사” 대표 이사, 백금산 목사님의 믿음의 덕을 본 것이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미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린네만의 두 권의 책이 번역되었다. 역자는 1권, 『성경비평은 과학인가 의견인가』를 작년 초에 번역을 끝냈으나 출판사를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이 책이 교회에서 그리고 신학 대학에서 절실하게 요청되는 책인 만큼, 역자는 이에 매우 실망했다. 그러나 이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출판계가 불황이며, 이 책의 출판은 손해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대부분 교회가 자신의 교회 성장에 전력을 투구하는 이런 잘못된 한국적 분위기에서, 예수님의 보이지 않는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하고 한국의 잘못 정착된 기독교 문화를 대항해서 싸우고자 하는 자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이런 자들은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이 가운데 역자는 먼저 두 권을 번역하여 이제 출판하게 되었다. 독자들에게 많은 유익이 있기를 소망한다.
--- 「옮긴이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