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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 신야, 여행의 순간들

후지와라 신야, 여행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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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0년 08월 04일
쪽수, 무게, 크기 214쪽 | 316g | 128*188*20mm
ISBN13 9788992492874
ISBN10 8992492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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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나를 마니푸리 족으로 착각한 것이라면 그들이 소수민족을 차별하듯 인도 변두리의 나락에서 나를 부당하게 차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최초로 허리에서 산탄총을 빼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카운터 옆의 낡은 등의자에 기대앉아 사뭇 무거운 짐이라도 내려놓듯 지친 표정으로 허리에서 천천히 총을 빼냈다. 그리고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순간 남자들의 표정이 달라진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도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총기 소유를 금지하고 있다. 그들은 그러한 커다란 총을 난생 처음 보았을 것이다. 남자들과 노파의 태도가 급변했다. 남자들은 신기한 듯 산탄총을 어루만졌고, 이런 것을 휴대하고 다니는 나에게 일종의 공포심을 느끼게 된 것처럼 보였다. --- p.20쪽

다와의 예도 있고 해서 어린 승려들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야반도주하는 승려는 40대가 압도적이었다. 흥미로웠다. 속세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늙음을 의식하게 되는 40대는 미혹의 계절이다. 자신의 위치를 옮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그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속세로의 회귀를 결심했더라면 40대라는 나이는 마지막 기회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사원을 뛰쳐나갔다면 ‘인간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가련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다. 그 대신 산을 내려가는 나의 등에는 한 가지 죄가 짊어져 있었다. 다와는 나를 통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속인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견딜 수가 없어서 도망친 게 분명하다. --- pp.29-30

3K는 제3세계인이 맡아야 한다는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이 솔직히 말해서 역겨웠다. 우리 또래에게 학창 시절의 아르바이트라고 하면 3K가 전부였다. 나의 몸은 여름방학에 토관을 파묻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그로기 상태가 되었던 지난 과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젊었을 때는 세계와 사회를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겸손함이 필요한데 육체를 혹사하는 아르바이트가 적격이라고 생각한다. 내 손은 언제까지나 깨끗해야 하고, 그래서 3K는 외국인 노동자가 맡아도 상관없다는 발상은 역겨움을 넘어서는 무의식적인 차별이었다. 머리로는 차별을 부정하고 있지만 차별을 부정한다는 의식 속에 이미 차별이 난무하고 있다. --- p.68

여행자는 주변의 이슬람 국가에서 터키로 월경할 때 상당한 섹스컬처쇼크를 받는다. 여행자가 아니더라도 터키 인근의 이슬람 국가 남성들은 터키라는 나라에 굴절된 감정을 품고 있다. 터키에서 시리아의 시골 국경을 지나갈 때였다. 시리아의 세관원은 나의 짐을 샅샅이 조사했다. 여자의 나체사진이나 인쇄물을 숨기지는 않았는지 철저히 조사했다. 그런 종류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세관원은 만족과는 거리가 먼 비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애원하듯이, “포르노, 포르노.” 하고 중얼거렸다. 요컨대 그는 포르노의 침입을 막아내고자 직무에 충실했던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사용할 포르노 사진을 구하려고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 pp.79-82

배가 사라진 저녁의 조용한 바다를 바라보며 청년이 중얼거린다.
“…미국은 어떤 곳이야?”
‘목숨을 걸면서까지 굳이…’라고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문다.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나라야.”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의 숙부 일가가 무의미하게 개죽음 당했다고 선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다 저편에 낙원이 있다는 그의 확신은, 가령 그것이 환상이라고 해도 이 젊은이의 삶에 조그마한 위안이 될 것이다.
“갖고 싶은 건 뭐든 다 가질 수 있어. 좋은 나라야.”
침묵을 깨고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 p.144

미국 영화를 보면 이런 장면에서는 ‘유색인종’이 자신을 차별한 자들에게 되돌아가 대시보드에 넣어둔 38구경을 꺼내 무차별적으로 쏘아대는 스토리가 전개되겠지만, 나는 그들보다 약간 냉정한 편이다. 도넛 몇 개를 둘러싼 다툼치고는 심장박동이 지나치게 빠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의 절반 이상을 빼앗긴 것처럼 화가 난다. 차별받는다는 것은 그런 느낌이다. 겪어본 자가 아니면 모른다. 다음과 같은 한마디를 해주기 위해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무뢰한처럼 가죽구두 끝으로 문을 박차고 들어간다.
“차별하는 놈은 차별받는 놈보다 못하다는 걸 명심해!”
자동차를 유턴해 식당으로 되돌아가는 동안 이 까다로운 표현의 영어를 몇 번이고 연습했다. 요란한 문소리에 세 사람이 놀란 눈으로 이쪽을 쳐다본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고 연습한 대로 이 까다로운 문장이 멋지게, 뿐만 아니라 위엄 있게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 pp.194-195

여행할 때 반드시 찾아가는 장소가 있다. 묘지다. 묘지에는 민족의 인생관과 인간의 생사에 대한 견해가 나타기 때문에 매우 흥미롭다. 젊은 시절부터 뻔질나게 다녔던 인도에는 묘지라는 개념이 없다. 사람이 죽으면 태워버리거나(화장), 강에 던지거나(수장), 숲에 버리거나(임장), 새의 먹이(조장)가 된다. 대지와 강, 동물의 위 속으로 환원되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굳이 말한다면 인도 대륙 자체가 거대한 묘지라고 할 수 있다.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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