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이 사진은 현실의 건조한 단면을 잔혹하게 드러낸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먼 데 있는 삼복서점 간판의 글씨까지 선명하게 보일 만큼 그날 광주의 공기가 지독히도 청명했다는 것,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도 햇빛은 무심히도 하얗게 밝고 강렬해서, 사진가는 조리개를 끝까지 조여야만 했다는 것. 그리고 사진 속 건물 그늘에 계엄군들이 몸을 숨기고 거리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 나는 이 사진에서 총을 들고 숨은 군인 세 명을 찾았다. 당신은 몇 명이나 찾을 수 있을까? 이 사진을 거꾸로 뒤집어 털면 얼마나 많은 계엄군이 후둑후둑 떨어질까? --- p.16 김현호, 〈들어가며〉
국내외 거의 모든 매체가 칼 빈슨 호의 한반도 이동 소식을 주요 뉴스로 띄웠다. 전쟁 위기설도 하루가 다르게 고조됐다. 항공모함은 근처에도 오지 않았는데 칼 빈슨 호 사진이 뉴스 네트워크마다 넘실거렸다. 북침 날짜를 4월 27일로 예상한 가짜 뉴스 역시 극성을 부렸다. 여기에서도 대양을 가로지르는 칼 빈슨 호의 사진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제도권 언론사와 가짜 뉴스 모두에서 유용하게활용된 칼 빈슨 호의 사진은 미 해군의 매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Mass Communication Specialist, 줄여서 MC)들이 제작한 콘텐츠였다. --- p.45 임태훈, 〈국가에 따져 묻고 싶었으나 가짜 뉴스에 화풀이하는 당신께〉
‘장미대선’을 목전에 두고 펼쳐지는 ‘여성정치’의 풍경은 꽤 참담하다. ‘촛불정신’이 황급히 ‘정권교체’로 번역된 현 정국에서 여성의제는 거의 실종되다시피 했고, ‘여성정치’와 관련해 시각장을 가득 메운 것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이성애적 규범성에 의해 강력하게 지지되는 ‘내조정치’7, 여성유세단의 경로당 유세8, 선거운동 과정에서 소비되는 여성정치인들의 율동과 눈물9 등이다. 언뜻 봐도 이 배치는 관성적인 성별분업에 의해 여성정치를 ‘감정’과 ‘돌봄’의 영역에 할당한 결과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p. 64 오혜진, 〈권력의 여성 여성의 권력 〉
청와대에서 의전을 위해 VIP의 자리를 표시한 형광 스티커가 담긴 사진들은 역사적인 장면과 결정적인 순간을 연출하는 프레임의 존재를 의식하게 만든다. 사진 안에서 반짝이는 형광 스티커는 신문에서 보았던 역사의 순간이 때로 연극처럼 계산된 동선으로 연출된다는 사실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그건 단순히 결정적 시간의 전후를 보여주면서 연출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무대 그 자체를 우리 앞에 제시하는 셈이다. --- p. 77 박지수, 〈오답노트 : 특이한 점〉
얼마 전부터 상점에서 담배를 살 때마다 마치 철갑(鐵甲)처럼 담뱃갑을 에워싸고 있는 끔찍한 사진은 사진-이미지가 얼마나 대단한 효력을 가지고 있는지 과시한다. 흡연을 하게 되면 성욕을 감퇴시키고 피부를 노화시키고 폐를 병들게 할 것이라는 등등의 협박을 전하는 그 사진-이미지들은 사진의 교육적 능력, 사진의 프로파간다가 여전히 가능하다는 듯이 능청을 떤다. 그것은 놀랍게도 사진-이미지의 실제적 효력을 입증한답시고 들이대는 인구학적 통계를 통해 뒷받침된다. 그러한 이미지를 게재하였을 때 흡연율이 어느 정도나 감소하였는지 입증하는 다양한 자료들은, 사진-이미지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자신의 능력을 잃지는 않고 있음을 증빙한다(흡연경고 사진 게재 후 흡연율 평균 4.2% 감소!). 그것은 사진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길 원하는 이들에겐 희소식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희소식이기만 한 것일까.--- p.82 서동진 〈프로파간다 사진술의 유령들〉
우리는 사진으로 ‘투성이’뿐인 자신을 스스럼없이 보여준 박근혜를 통해 웃플 수도, 혐오할 수도, 짜증낼 수도 있었다. 지난해 겨울 우리는 선거의 여왕, 탁월한 정치 묘수를 지닌 사람이 알고 보니 되게 시시한 사람이었다는 허탈함에 빠졌다. 종편에 출연한 코멘테이터들은 이에 화답하듯 시시한 박근혜에 초점을 맞추고 어울리는 주석을 달았다. 박근혜가 참 시시한 적대자였다고 안심하는 사이 우리는 정작 정치인을 가리는 베일이, 정치인의 뒤에 달라붙은 그림자 그 자체가 실은 얼마나 시시한지 물을 기회를 놓치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그렇게 작동한다. 시시한 것은 박근혜가 아니라, 그림자였음이 폭로되지 않길 바라는 조용한 현실로. --- p.142 김신식 〈그림자는 시시하다〉
오래도록 얼어붙어 있던 시절이었다. 그 아래 실은 무엇이 흐르고 있었는지, 사람들은 아는 듯 모르는 듯 촛불을 들고 광장에 서 있었다. 멀리서 오래된 군가가 들려왔다. 국기들이 군가의 박자대로 흔들렸다. 얼음은 쉬이 녹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얼음 아래 흐르던 것들은 이미 떠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일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얼음을 떠미는 것처럼. 그전과는 다른 어떤 시절처럼.
- 윤성희, ‘해빙시절’ --- p.180 주용성, 윤성희, 노순택, 홍진훤 〈그 모든 곳이 광장〉)
이 괴물 같은 도시는 자신을 그런 식으로 지탱해 나간다. 도시 가득 넘실대는 이 사람들, 엄청난 돈뭉치이자, 빚 구덩이에 빠진 도박광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인간의 형상을 한 이 괴상한 생명체들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알 길이 없다.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오듯 매일 조금씩 잃고 있는 이들은 대체 무슨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일까? 어떤 꿈이 이들의 삶을 지탱하는가? 삶이란 결국 매일 조금씩 뭔가를 잃어가는, 마침내 죽음에 패배하는 과정이라고 하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일까. --- p.219 김사과 〈뉴욕의 봄〉
이 영화에서 자신의 사진에 대한 알릭스의 설명과 사진에 담긴 광경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외스타슈가 그녀에게 사진이 실제로 보여주고 있는 것과 무관하게 엉뚱한 이야기를 풀어보라고 주문했기 때문이 아니다. 알릭스는 자신의 사진에 대해 시종일관 솔직하게 이야기했을 것이고, 외스타슈는 이를 충실히 기록했을 것이다. 다만 후반작업 과정에서, A라는 사진에 대해 설명하는 알릭스의 목소리와 B라는 사진을 가까이에서 포착한 이미지를 한데 붙인 것이다. 우리는 한 장의 사진을 보면서 다른 한 장의 사진을 듣는다. 혹은 한 장의 사진을 들으면서 다른 한 장의 사진을 본다. 여기에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불일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진과 사진의 중첩(superimposition)이 있는 것이다. --- p.223 유운성 〈사진을 듣는다는 것〉
지난 4월, 멀리 희진에게서 이메일이 한 통 날아왔다. 우리는 지난 2008년, 광화문에서 우연히 만난 뒤 몇 번 이메일만 주고받다가 연락이 끊어진 상태였다. 열어보니 “이메일 주소가 바뀌거나 하진 않았겠지?”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아주 긴, 정말 긴 편지가 나왔다. 그다음 문장은 “지금 여기는 서울이 아니라 도쿄의 요쓰야야”였다. 도쿄에는 한 번 가본 적이 있지만, 시부야나 신주쿠 혹은 긴자만 간신히 생각날 뿐, 요쓰야란 곳은 어딘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가 멀리 있다거나 낯선 곳에 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그즈음 이메일을 쓴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언급했을 그 사건, 그러니까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들을 태운 여객선이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사건 때문이리라.
--- p.260 김연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