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가량의 깡마른 남자 승객이 유독 나의 눈길을 끌었다. 포마드를 듬뿍 발라서 단단하게 고정시킨 머리는 조개껍질 같았고, 콧수염 끝은 살짝 추켜올려 놓았다. 조끼에 비해 품이 터무니없이 큰 셔츠는 단추와 소매의 장식 단추 모두 가짜 금제품인데, 칠이 벗겨져 본래의 구리 바탕이 보였다. 묵직해 보이는 시계 줄도 가짜였다. 한마디로 그는 가짜 명품광이었다. 그가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진짜가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는 자신을 영국의 황태자라고 상상하고 있으며, 왕자의 사고와 행동 방식을 과시하려 한다는 걸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좌석에 길게 드러누워 포마드 떡칠한 머리를 팔걸이에 올려놓은 다음 창가에 발을 얹고는 왕자로서의 완벽한 포즈를 취함으로써, 상상이 세계를 현실에 노출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벌어진 외투 사이로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는 듯이, 그러나 가장 의도적으로 예의 가짜 금시계 줄이 사람들 시야에 드러났다. 담배 광고로 써도 좋을 만큼 완벽한 왕자의 포즈였다.
―가짜 명품광
마누엘의 후임자로 온 하인도 마누엘이 그랬던 것처럼 손끝을 이마에 대고 인도식으로 인사했지만, 일 처리 스타일은 정반대였다. 영민하고 반짝이는 눈을 한 새 하인이 나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유난히 까만 피부를 지닌 이 왜소한 사내를 보면서 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그는 명랑한 음성으로 자기 이름을 알려주었다.
“글쎄, 그 이름은 길어서 부르기가 어렵구먼. 뭐 간단한 이름은 없을까?”
그는 마우사(Mousa)라는 이름을 제안했지만, 왠지 쥐(Mouse)가 연상되었다.
“마우사는 쉬운 이름이기는 한데, 자네하고는 그리 어울리지가 않아. 더 좋은 이름이 생각났는데, 자네를 사탄(Satan)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예, 주인님. 사탄 좋습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사탄은 잰걸음으로 나가서 몇 마디 나누더니,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무슨 일인가, 사탄?”
“하느님이 주인님을 만나러 오셨습니다.”
“뭐, 누구?”
“하느님이요. 안으로 모실까요?”
이럴 수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황당해 하는 나에게 사탄이 손님의 명함을 건네주었다. 나를 찾아온 사람은 페르시아계 왕족으로, 어느 예언자의 후손인지라 주민들 사이에서 신으로 숭배받는 인물이었다. 주민들은 그가 신이라 믿고, 그를 향해 기도하고 헌물을 바쳤다. 하느님치고는 젊은 나이인 35세가량 되어 보였지만, 어쨌거나 내 평생 처음 목격한 하느님이었다. 30분가량 대화를 나눈 후에 그가 작별 인사를 건넬 무렵, 사탄이 살며시 다가와서는 이렇게 물었다.
“주인님, 사탄이 하느님을 배웅해 드릴까요?”
“그렇게 하게.”
그리하여 이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은 함께 문을 나섰다. 사탄이 앞장을 서고 하느님이 그 뒤를 따라갔다.
―인도인 사탄과 페르시아계 하느님
나는 마크 트웨인 클럽에 대해 진저리를 내고 있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내 작품에 대한 찬사, 독후감, 토론 내용이 처음에는 반가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내게 심각한 압박감을 더해주었다. 게다가 작품의 어느 한 문장, 또는 한 구절을 끄집어내어 미주알고주알 파헤치고 작가의 답변을 요구하니, 정말 견디기가 어려웠다. 코리건 성의 마크 트웨인 클럽은 이제 끔찍한 저주이자 악몽이 되어버렸다. 그러기를 무려 5년간이나 계속하던 나는 마침내 중대한 결단을 내리고 말았다. 마크 트웨인 클럽에서 보내는 편지에 답장을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들이 보내는 두툼한 편지는 개봉도 하지 않은 채 모두 불태웠다. 그러자 편지는 점점 뜸해지고 마침내 더 이상 오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5년이나 얽매어 있던 사슬을 끊고,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코리건 성의 마크 트웨인 클럽
세상의 모든 배들이 한 방향으로만, 즉 동쪽에서 서쪽으로만 항해한다면 날짜 변경선을 넘을 때마다 수많은 승객과 승무원들의 시간이 바다에 무수히 버려지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모든 배가 서쪽으로만 운행하는 것은 아니다. 절반은 서쪽에서 동쪽으로도 운행한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볼 때 결코 손해나는 일은 아니다. 서쪽으로 가는 배가 버린 시간은, 동쪽으로 가는 배가 건져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짠 바닷물이 버려진 시간을 잘 보존해 줄 것이다.
―적도무풍대, 그리고 잃어버린 하루
욕망이 있기 때문에 행동이 발생한다.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얼마 동안 마시지 않는다고 해도, 술을 마시고자 하는 욕망 자체는 그대로 잠재되어 있다. 결국 어느 시점에 이르면 욕망은 행동을 부추기고, 맹세는 깨어지고 만다.
나도 굳게 맹세했다가 금세 위반하기를 수없이 되풀이한 경험이 있었다. 의지가 강하지 못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청년 시절, 나는 담배를 끊어보려고 하루에 한 개비씩만 피우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었다. 잠자리에 들 때까지 간신히 참고 있다가,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난 다음 기분 좋게 잠들었다. 그러나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끈질기게 흡연을 부추겼다. 1주일이 지나자 나는 한 개비는 한 개비이되, 이전보다 크기가 훨씬 더 큰 것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며칠 후에는 그보다 더 큰 담배를, 또 며칠 후에는 더 큰 담배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한 달이 흐르자 나는 더 커다란 담배를 손수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직접 만든 담배의 크기는 점점 커져서, 결국 담배 한 개비가 말뚝만큼 커지게 되었다.
어떤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할수록, 즉 욕망을 거부하면 할수록 오히려 욕망은 더욱 커지고, 언젠가는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그러므로 욕망을 억지로 밀어내려 하는 것은 현명한 전략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다면 욕망에 대처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그 욕망과 함께 평생을 보내야 한다는 걸 인정하는 길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걸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나쁜 습관을 고치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