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7년 11월 14일 |
---|---|
쪽수, 무게, 크기 | 512쪽 | 410g | 133*203*35mm |
ISBN13 | 9781455563920 |
ISBN10 | 1455563927 |
발행일 | 2017년 11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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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512쪽 | 410g | 133*203*35mm |
ISBN13 | 9781455563920 |
ISBN10 | 1455563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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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 한마디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부산의 작은 하숙집에서 시작된다. 혼란스러운 시절,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향하게 된 선자를 중심으로 그의 부모님과 자식, 손자들의 삶을 조망하며 1900년대를 관통한다. 애플TV+를 통해 전 세계를 뒤흔든 동명의 드라마 원작 소설. -외국도서MD 정송
이 책을 오디오로 들었다.
처음 이 오디오를 산지는 좀 되었는데 영어로 표현되는 1930년대의 부산 영도를 상상하기 힘들어 그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이 소설이 미국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끝내기로 했다. 일단 영어로 표현되는, 낯선 일제 시대의 영도를 상상하는 벽을 넘자 일사 천리로 끝까지 듣게 되었다. 일단 영어가 쉽다. 물론 군데군데 일본어가 들어 오기는 하지만 몰라도 책을 이해하는데는 문제가 없을 정도이다.
소설의 시작은 아주 오래 전에 읽은 하아디의 '테스'와 비슷하다. 능력있고 자신감 넘치는 남자에 이끌리는 가진 것 없고, 전망도 없는(선자는 장애인 아버지 때문에 좋은 집안에 시집갈 가능성이 낮았다.) 순진한 어린 여자들. 그러나 임신한 선자는 고한수의 '현지처'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어릴 때 들었던 '일본 현지처'라는 단어를 기억해 냈다. 정말 오랫동안 잊고 있던 단어였다. 어른들끼리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 때 그들을 천대시하던 어른들의 말투가 생각났다. 다른 사람들보다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살았지만 뒤로는 천대를 받는 '존재'였다. 그 때 나는 아무 생각없는 아이였으므로 어른들의 그런 생각을 그냥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금 할머니가 되어가는 시점에서 볼 때 그들에게는 절실한 '생존 수단' 아니였을까, 가족들을 위해 희생해야했던 또 다른 여자들이 아니였을까하는 생각이든다.
일제시대부터 1989년까지 재일한국인(자이니치)들의 일본에서의 생존 투쟁의 역사는 눈물겹다. 해방전에는 '더러운 조선인'이라는 멸시와 함께 생존 그 자체에 위협을 받았지만 해방 후에는 경제적 상황은 좋아졌지만 여젼히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다. 소설에서처럼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3년마다 외국인 등록을 해야하는 이방인인 것이다.
소설을 읽어 가면서 그들에 대한 연민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두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그들만 봐서는 그들의 삶은 힘들었다. 그러나 그들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한국에 있던 나의 할머니나 부모님의 삶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해방되었을 때 한국의 실정이 불안정해서 귀국하지 못했고 아들들이 전쟁에 나가게될까봐 한국전쟁 때에 귀국하지 못했다. 또 1960년대는 한국이 너무 가난해서 귀국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자 이번에는 한국과 너무 달라진 삶 때문에, 한국어가 제대로 되지 않아 귀국을 하지 못했다. 소설을 읽다보니 최소한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고 그들은 일본에 남는 것을 택한 사람들이다. 그 때 한국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런 선택없이 일제 시대의 고난과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겪고 1960년대의 가난을 겪어야 했다. 그들에게는 선택이란 없었다.
따라서 현재의 한국인인 나는 그들의 삶에, 그들의 생존의식에 경의를 표하지만 나의 친정엄마(사춘기 때 춘천에서 제주까지 때로는 걸어서, 때로는 피난열차를 타고 피난을 가야했고 피난 전 고등학생이었지만 피난지에서 노점상을 해야했던 ) 가 이 책을 읽는다면 달리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특별히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기 보다는 동지의식을 가질 것 같다.
또한 소설의 주인공인 '선자' 세대의 한국인 여자들에게는 그들이 어디에 있었던지 (한국, 북한, 일본, 심지어 미국) '삶은 고통'이었다. 그들의 삶에는 끝없는 노동만이 있었다.
소설 마지막에는 파친코를 운영해서 엄청 잘 사는 아들을 두었지만 글을 읽지 못하는 선자가 야학에 나가 글을 배워볼까 하는 내용이 나온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아직도 문해프로그램에 나오시는 할머니들이 있다.
아마도 그 세대 여자들의 '끝없는 노동'과 놀라운 생존력은 비단 한국인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당시, 아니 현재에도 못사는 나라의 대부분 여자들은 선자의 삶을 살았고 살고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이 소설이 아주 narrow local history임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얻은 이유는 그런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묘사된 것처럼 평생을 자식과 집안을 위해 끊임없이 일했던 '여자'의 딸인 나는 엄마만큼 부지런하지도 않고 의지력도 약하다. 어릴 때 나는 나의 엄마가 한번도 낮에 누워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나는 늘 누워 있다.). 엄마는 전업주부였지만 항상 바빴다. 지금도 나의 엄마는 덜걱거리는 무릎을 가지고도 끝없이 청소하고 움직인다. 마치 노동이 그들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약이라고 생각하거나 노동이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엄마는 아들이 없지만 아들없음보다는 딸들이 당신을 닮지 않고 다 게으른 것을 한탄하신다. 딸들은 많이 배울 수록 더 게으르다. 나의 시어머님도 마찬가지이다. 좀 편하게 사시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본인의 오랜 습성을 버리지 못하신다.
소설 말기에 이제 할일이 없으니 손자가 결혼하면 그 곳에 가서 음식도 만들고 아기도 보아주겠다는 선자의 말에 나의 엄마를 떠 올렸다. 80이 넘었지만 아직도 초등학생인 조카들을 돌보고 계시다.
소설을 끝내고 나니 저자가 굉장히 독똑하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는 주인공들을 기독교인들로 설정했다. 일제시대 당시 평양을 중심으로 개신교가 번성했기에 무리한 설정은 아니다. 저자는 미국인들에게(영어소설이니 당연히 첫번째 독자는 미국인들일 것이다.) 낯선 자이니치의 삶을 소개하면서 기독교과 기독교식 이름을 설정했다. 미국 독자들에게는 '낯설지만 왠지 익숙한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것울 바라면서도 너무 낯설면 이해하기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오디오 북을 들을면서 주인공들의 이름에 흥미가 들었다. 이삭, 요셉, 솔로몬은 아이작, 조셉의 한국식 발음이라는 것을 알겠는데 모자주는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목사가 모자주를 모세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모세라는 것을 이해했는데 한국인들은 모세를 모세라고 부르지 모자주라고 부르지 않는다. 모세의 일본식 발음인가? 궁금하다.
20세기는 누구말대로 이념 과잉의 시대였다. 이념 때문에 죽고 죽였다. 해방 후 자이니치들은 이념을 선택하라고 강요 받았다. 한국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대다수 하는대로 미국의 자본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이니치들은 선택을 강요 받았고 그 선택은 정말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삶이 급격하게 변했다. 내가 그 시절 살았다 하더라도 '선택'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공산주의에 대한 매력은 '사후 천국'만큼 달콤했을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책에 인용된 베네딕트 앤더슨의 '국가, 공동체는 imagine이다라는 글귀가 이 책에 너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 말을 유발 하라리의 책 '사피엔스'에서 처음 접했는데 하라리가 앤더슨의 사상을 인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하라리는 국가뿐만 아니라 돈도 기업도 상상의 산물이라고 했다. 저자는 '고한수'라는 인물을 통해 이런 상상의 산물을 더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원작은 영어로 쓰여져 우리나라의 사투리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는데 한국어로 찍는다는 드라마나 번역서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번역을 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사실 평양 출신 사람과 부산 출신 사람이 처음 만나면 서로 이야기가 잘 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또 이 소설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1990년 대 초 나는 1년 동안 미국에서 체류할 기회가 있었다. 힘들게 공부할 필요도 없었고 또 돈을 벌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는 체류였다. 그저 1년 동안 미국 구경하고 간다는 생각이 있어서 열심히 구경하며 살았었다. 물론 아파트 렌트비와 식료품을 살 돈은 있었지만 당시 나의 눈을 크게 뜨게할 미국의 화려한 '물건들'을 살 돈은 없었다. 사실 나는 화장도 하지 않고 옷도 잘 사지 않는 사람이라 별로 개의치는 않았다. 오히려 한국에 있을 때는 체면 때문에 의복에 신경을 써야 했지만 미국에서는 아무도 아는 사람들이 없기에 '히피'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이 기쁘기까지 했었다. 그저 당시 우리나라에는 없었던 대형마트나 대형전자제품 파는 곳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사지는 않고). 또 미국 대학과 동네 커뮤니티가 주는 공짜 혜택을 마음껏 누렸다.
그 당시 미국에 처음 온 외국인들을 위한 프로그램(공짜다)에 열심히 다녔는데 한번은 서로 자신이 온 나라의 풍습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한국, 중국, 일본, 동유럽 출신자들이 떠듬거리며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 일본 출신 학생이 약간 머뭇거리며 설명을 하는 데 내용이 우리나라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당시 나는 일본과 중국에 정말 관심이 없었다. 당시 중국과 외교관계가 없었던 터라 거기서 '중공사람'을 처음 보았다. 서로 호기심있게 바라 보았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그 일본학생이 사실은 자이니치였고 한국여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의 풍습을 설명해야했던 그 순간이 그에게는 힘든 시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미국에 까지 와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우쳐야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새삼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생각없었던 아줌마의 호기심이 그들에게는 상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제야 하게 되었다.
흡인력이 강한 소설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Pachinko_(novel)
https://en.wikipedia.org/wiki/Koreans_in_Japan
https://en.wikipedia.org/wiki/Benedict_Anderson
(줄거리 내용 많음)
Eventually, I finished reading <Pachinko>. It took almost 50 days to read it all. From the beginning, I was fascinated with the story and the characters. As book2 was ended with a shocking letter written by Noa, I couldn’t stop reading the next part book 3 although our book club is not until June. The story line was changed altogether in book3. It’s moved from Sunja’s story to Solomon’s ? yet we can see other characters too ? which was not much interesting to me at first. However, I was impressed with the lives of Koreans in Japan, Jainichi.
I’ve heard that the Koreans had no choice but to operate pachinko parlors, because employers thought Koreans are filthy and would not hire them. I felt sorry that Mozasu, Noa and Solomon ended up making a living from pachinko parlors. Mozasu did his best for Solomon to avoid the same job as his. Noa and Solomon studied a lot and hadn’t thought about it as their ways, but the fate made them accept it.
Why did Noa shoot himself after meeting Sunja? He was too stubborn. As a mother of one son, I could feel how Sunja felt about his death. I sobbed and sobbed when I found his death and his visiting Isak’s grave in the last part. To me, Noa is the saddest character in the book. He resembles his mother as for the righteousness. Sunja ought to avoid being Hansu’s mistress and having a child without a father, and those thoughts were driven from her traits and how Hoonie rasied her.
It was really a good opportunity to read this book and to discuss it with good members. It enabled me to understand how difficult the lives during the war were and living in other countries as a foreigner is. As a woman, I wonder if the life of women is suffering, indeed, looking back my life. But I couldn’t say anything yet because I haven’t lived as long as I can tell it. Besides, I couldn’t have handled much emotions which rose while reading without ‘bookus members.’ I feel empathy for Sunja a lot the same as a woman and a mother. She lived in a happy and sad life like anybody. I like the ending.
마침내 파친코를 다 읽었다. 처음 받았을 때는 두께와 빽빽한 페이지에 압도되긴 했지만, 무척이나 기대했던 책이라 거부감 없이 펼쳤다. 처음에는 낯선 단어들에 당황하고, 다 읽을 수 있을지 걱정도 했지만, 읽다보니 우리 나라 문화라서 그런가 그림이 그려져서 쉽게 이해 되었다. 원서 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분이라면 쉽지 않을 책이리라. 그럼에도 강권하는 이유는 내용상으로 우리가 살펴볼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번역본은 출판사가 넘어가면서 현재 인플루엔셜에서 작업 중인 걸로 알고 있다. 원서든 번역본이든 많은 분들이 읽어보셨으면 좋겠다.
2017년도에 상을 받으면서 유명해졌는데, 저자는 많은 백인 여성들이 읽어주었기에 인기를 끌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애플TV에서 드라마 화되면서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 같다. 그 전에도 종종 원서로 읽으시는 분들이 보였는데 드라마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꽤 잘 만들어졌다고 한다) 책도 다시 인기를 얻었다. 나 또한 제목만 몇 번 보고 도박 관련 이야기인가 라는 생각에 거부감이 들어 관심도 가지지 않는데 드라마 덕분에 대략적인 내용을 알게 되어 결국 끝까지 다 읽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 국사 교과서에서 한 줄로 나와 있던 백성들의 삶이 힘들어졌다는 내용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얼만큼 많은 걸 함축한 문장인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마냥 먹을 게 없었나 보다, 수탈 당했나 보다, 끌려갔나 보다 라고 나와 관련없는 단어들의 나열이라고만 여겼다. 파친코 책 덕분에 그들의 어려움, 고난, 고통, 나라를 뺏긴 서러움에, 일본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국적은 한국인이며 일본인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등 그런 고행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한국인이기에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난들을 낱낱이 파헤친 책 같다. 10년을 쓰셨다고 들었는데, 자료 조사에서부터 많은 노력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책 전체에서 나는 몹시도 선자에게 공감하며 읽었다. 덕분에 많이 울었다. 이삭이 끌려갔을 때도 같이 울었고, 돈을 벌어야 하니까 김치를 팔러 나섰을 때도, 이삭이 죽었을 때도, 돈 걱정을 할 때마다 자꾸 지금 내 모습이 겹쳐 더 생각나 울었고, 노아가 떠났을 때도, 노아를 찾아갔다가 죽었을 때도, 엄마 양진이 못된 말을 하고 죽었을 때도, 마지막 이삭의 무덤 장면에서도 참 많이 울었다. 원래 잘 우는 편이긴 하지만, 아들이 있는 엄마의 입장에서 더 와닿는 게 많아지니 마음이 더 힘들어져서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다. 여자의 삶은 고생이라는 저자의 문장들이 자꾸 내 마음에 돌처럼 깔렸다. Book1 에서는 선자의 여자로서의 삶, book2에서는 선자의 엄마로서의 삶, book3 에서는 세대 전환이 일어나 잘 나오진 않지만, 종종 나올 때마다 할머니로서 여전히 자신의 가족을 위해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당연히 여자라면 그렇게 살아야지, 라고 생각하기 보다 선자라는 인물의 삶은 가족을 중심으로 돌아갔고, 그 시절에는 그게 당연했던 모습이었으리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은 점도 많았던 삶. 그게 우리의 삶이지 않을까 싶기도. 선자에게는 가족이 그러했지만, 우리 삶에서 내가 추구하는 게 언제나 올바른 정답만을 보상만을 주는 것 같지는 않다.
한수가 그렇게 중요 인물일 줄 생각조차 못했는데, 선자의 인생 어디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 전체적으로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게다가 노아의 아버지이기도 하니 중요인물이긴 하다. 책을 읽는 내내 한수가 선자에게 품은 마음은 도대체 어떤 것일지 궁금했다. 정부가 된 것도 아니고, 본처에게서 딸만 셋이라 아들인 노아에게 집착한다고는 하지만 한수에게 다른 정부가 없으리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게다가 선자가 언제나 매몰차게 내치는 걸 보면서 한수가 왜 저렇게까지 도와주고 싶어서 안달하는 건지 궁금했다. 정말 아들때문만일까? 자신이 아빠인지도 모르는 아들을 위해서 선자의 모든 가족을 위해 그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여러 모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Book3에서 속 시원하게 풀어 주었고, 내가 바라던 모습이기도 해서 안도하기도 했다. 결국 한수에게 선자란 인물이 얼마나 특별했던 건지 알 수 있었다. 모임에서 이야기 나왔던 것처럼 어린 선자가 몹시도 투명하게 자신을 담아내는 걸, 온 마음으로 자신을 대했던 그 사랑을 한수도 귀하게 여겼기에 그러지 않았을까 한다.
한수가 야쿠자로 나쁜 짓을 하는 장면이 나오진 않았지만, 어린 여자 아이를 무자비하게 때리는 장면은 충격이었다. 그 여자 아이의 행동이 시기상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긴 했지만, 그렇게 인생을 망가뜨릴 정도로 때리다니… 그런 걸 보며 한수가 야쿠자가 맞구나 싶고, 그 전에는 그래도 좀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의 면모를 많이 보여주어 나름의 환상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렇게 행간에 숨어 있었을, 드러나지 않는 여러 모습이 그려져서 실망스러웠다. 선자가 어떻게든 한수에게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가장 슬펐던 장면은 역시 노아의 자살. Book2 독서모임에서 스포당하긴 했지만, 설마하는 마음으로 읽었는데… 노아의 죽음을 나타내는 그 단 한 문장이 너무 너무 가슴이 아팠다. 너무 올곧았던, 너무 강직했던, 그래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용납할 수 없었던 노아가 안타까웠다. 그러면서도 아들 엄마로서 선자에게 너무 공감하게 되어 너무 너무 속상했다. 그저 아들이 무사하기만을 바랐던 것 뿐인데… 아들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 되었는데, 그런 아들이 자신이 찾아갔다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목숨을 끊다니… 한수와의 만남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에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그래도 노아 덕분에 이삭도 만나고 자신도 잘 살 수 있었는데.. 한수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싶었다.
꼭 죽었어야 했을까. 핏줄에서부터 잘못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너무 괴롭다면 차라리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순 없었을까? 찰스 디킨스와 괴테를 좋아하던 순수 문학 청년이었던 노아에게는 그 짐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너무 아픈 손가락 노아.
그에 비해 모자수는 잘 커주어서 어찌나 기특한지. 선자가 더 큰 사고 치기 전에 파친코 가게에 일을 하게 한 게 신의 한수였던 것 같다. 당시 많은 자이니치들의 선택권이 없어서 파친코 가게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하던데, 모자수의 행보도 그런 운명 아닌 운명을 따라간 느낌이다. 요즘은 많은 이들이 고등 교육까지 받는 것이 자연스러워져서 마땅히 그 나이에는 학업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모자수처럼 도저히 그 쪽으로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는 빨리 그 밖의 일을 모색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게다가 단지 공부에 관심이 없는 것 뿐이었지만, 파친코 일은 너무 잘 맞았던 지라, 크게 성공한 모습은 뿌듯했다. 문제를 만들지 않고 깨끗하게 운영하려고 노력하고, 심지어 자신의 직원들의 자녀들의 교육비도 지원하는 모습도 감동적이었다. 모자수는 비록 공부에는 취미가 없는 자신의 큰아버지를 닮은 모습이지만, 백씨 가문의 올바름과 선자의 사랑으로 키우는 양육의 결과물로 보여진다. 그래서 사랑하는 유미를 잃고도 하던 대로 강하게 살아가고, 솔로몬도 잘 키워낸다.
솔로몬과 하나는.. 내게 너무 어려운 인물들이었다.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었을지 가늠이 되지도 않고, 나만의 의미도 만들기가 어려웠다. 단지 솔로몬이 파친코 사업을 선택하게 도와주는 인물이라고만 생각하기에는 하나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니면 순수 일본인과 자이니치를 비교하려고 했던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자이니치이고 일본인들이 더럽다고 여기는 파친코 일을 하는 모자수네 가족들이 오히려 더 서로를 아끼고 사랑으로 올바르게 살아간다. 이에 반해, 모자수의 여자친구이자 하나의 엄마가 있는 가족은 불륜과 성매매로 물들어 있고, 분열과 타락으로 망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그 대비를 보여준 것일까? 하나는 솔로몬 가족의 사랑에 위안을 받고, 따뜻함 속에서 죽어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하나 덕분에 솔로몬도 자신의 길을 명확히 잡을 수 있었고.
자이니치라는 표현이 책에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는다. 이 책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이니치라는 단어를 쓰게 되는데, 우리 말로 바꾸면 재일교포를 말한다.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국적이 한국인인. 그렇지만 이야기를 나눌 때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다. 내게 제일교포라는 단어는 자신의 선택으로 일본에 살면서 우리네 삶과 다르지 않은 그저 일본에 사는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는 아무런 주관적인 감정이 들어갈 것도 없이 실제 상황 묘사만을 보여준다. 하지만 자이니치라는 표현은 내게 있어서 일제 강점기 시절 그저 살아야겠다는 일념하나로 일본으로 넘어가 먹고 살기 위해 궂은 일은 마다하지 않고 억척스럽게 살아 내야만 했던, 그렇게 아이들만은 잘 키워내고 싶었던 한국에 있었던 우리네 선조들과 다르지 않은 이들을 의미하는 것 같다. 오히려 한국인이라는 차별이 더해진 상황이었으리라.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이니치라는 단어에 안타까움과 슬픔의 감정이 실린다. 이 책에서 이야기 하는 자이니치이자 재일교포는 여전히 국적은 한국인이고 외국인으로 분류된다. 그래서 아예 귀화를 하던지, 외국인으로 살던지,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다. 아예 국적을 옮긴 사람들은 한국계 일본인이라고 불러야 한다. 혼동되었던 단어들을 이 참에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 자이니치들이 실제로 많이 선택한 것이 바로 파친코 일이라고 한다. 이 책의 제목도 그런 맥락에서 지어졌으리라. 예전 서양에서 더러운 일이라고 무시하던 대금업을 유대인이 해야 했던 것처럼 일본에서 더러운 일이라고 여겨지던 파친코 일만이 한국인의 선택권이었던 것 같다. (완독 후 다른 자이니치의 책을 읽었는데 이 분의 부모님은 쓰레기 분류 관련 일을 하셨다고 한다. 이 또한 다른 사람들이 기꺼워할 일은 아니었지만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사셨을 수단으로 선택하셨으리라.)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였을까? 모자수는 애초에 학업과 관련이 없었어서 자연스레 고로상 밑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집을 나간 노아도 그 잘난 와세다를 다니다가 중퇴를 했다 해도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파친코 관련 일이었고, 솔로몬도 뒷통수 맞고 회사에서 잘리면서 모자수의 일을 이어받게 된다. 솔직히 솔로몬은 미국으로 가서 피비와 결혼해 미국인이 되어 그만의 삶을 살았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왜 파친코를 선택했는지 모르겠다. 엄마인 유미가 그렇게나 원하던 꿈이었는데.. 솔로몬이 대신이라도 이뤄주지 않을까 했는데 결국 가족 옆에 남기로 결정했다. 물론 선자네 가족들에게 가족이 주는 의미가 커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열려 있는 기회가 너무 아쉽다.
출간 되서부터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고 하지만, 나에겐 큰 매력이 없었는데, 드라마 덕분에 이렇게 좋은 책을 놓치지 않고 읽게 되어서 감사하다. 드라마는 또 책과는 아주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하니 기대된다. 이번 모임이 끝나면 드라마 모임도 따로 가지기로 했는데, 드라마도 모임도 기대된다. 영상을 잘 안 보는 내가 다 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우연찮게도 지난주에 본 싱가폴 드라마 "The Little Nyonya"와 작품 배경의 시기가 일치한다. 일본에게 고통받는 시기도 같고, 여인들이 척박한 환경에서 삶을 개척한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이 작품은 한일 강제 합병 전후에 한반도에서 태어난 1세대가 해방전에 일본으로 이주해서 겪게 되는 삶의 질곡을 시간 순으로 써내려 가는 대하 소설이다.
소설은 부산 영도에서 허름한 하숙집을 운영하는 부부와 그들의 딸, 선자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대로 살만했던 삶은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고달파진다. 열일곱의 선자는 자신보다 열네살이나 많은 고한수와 사랑을 나누고 노아를 임신한다. 그와 결혼을 꿈꾸던 선자는 한수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와 헤어지고 자기집에 묵던 결핵을 앓고 있는 목사 백이삭의 희생적(?) 결단으로 그와 결혼, 그의 형이 사는 일본 오사카로 이주한다. 아이가 없던 이삭의 형 요셉과 그의 처 경희는 선자의 허물을 감싸주고 가족으로 따뜻하게 대해준다. 세월이 흘러 노아 동생 모세도 태어나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날이 이어지는 듯하더니 목사 이삭이 일왕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몇년이나 갇히고 풀려나자마자 죽는다. 그의 형은 그때부터 이상해져서 여자들이 김치장사, 사탕장사 등을 하며 생활 전선에 뛰어든다. 안정되어 가던 생활도 잠시 일본의 패망으로 오사카는 전쟁터가 되지만 선자 가족은 오사카 최강의 야쿠자 두목인 고한수의 도움으로 무사히 살아남는다.
고한수의 도움은 계속되어 자기 아들 노아의 대학 학비와 생활비까지 책임지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노아는 학교를 중퇴하고 가족과 절연한다. 그는 멀리 달아나 정체를 감추고 파친코 매니저가 되어 가정을 이뤄 살던 중 어머니가 찾아 온 다음 날 자살하고 만다. 이 장면이 나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야쿠자의 아들, 그의 돈을 받아 교육받은 사실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인지, 지난 시간 고생 고생 키운 어머니에 대한 배신을 그렇게 잔인하게 할 수 있는 것인지... 아무리 시대가 그렇고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랐어도 그렇지 수많은 문학 작품을 읽었다면서 어머니에 대한 측은지심과 이해심은 왜 그리 부족했는지... 그의 유약함에 이해가 조금은 가면서도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남편과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남편 왈, 아마도 노아는 야쿠자 친부와 부정한 어머니의 과거를 지우고자 도망쳤지만 정작 자신도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는 파칭코 매니저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음에 대한 창피함, 부끄러뭉, 무력함때문에, 그렇게도 야쿠자를 저주하더니 야쿠자와 거의 같은 비난과 조롱을 받는 도박업을 하고 있는 자신이 저주스러워서 그런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고. 작가의 인터뷰를 보니 지금은 한국, 그전에는 일본의 자살율이 최고였던 현실을 책 어디선가에는 넣고 싶었다고 한다. 그게 작가의 도리같았다고. 그 희생양이 노아였다는 것이 드라마틱하기는 하지만 허무한 것도 사실이다. 사실 나는 이때부터 이 소설이 조금씩 재미 없어졌다.
한편, 노아의 동생 모세는 공부 재주는 없고 장사 재주가 있어 파친고로 성공한다. 그의 아들 솔로몬은 부자 아버지 덕분에 미국에 유학하여 돌아와 금융인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지만 일본인 사장에 의해 말도 안되는 이유로 해고된다. 국제학교에서 온실처럼 자란 그가 처음 겪는 공식적 차별인 듯한데... 재일 한국인의 한계에 부딛힌 노아는 아버지 파친코를 물려받고자 결심하기에 이른다. 재미 교포 여자친구는 청혼을 계속 미루는 솔로몬에 실망하고 결국 떠난다. 백씨 남자 3대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소설은 70대의 선자가 남편과 큰아들의 묘지를 방문하며 회한에 젖는 장면으로 끝난다.
책 중간 중간에 자주 나오지만 재일 한인들은 엄청난 차별과 멸시에 시달렸다. 그런 그들에게 좋은 직업이 주어질 리 없다. 직업 선택지는 신분을 숨긴 채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아니면 파친코, 야쿠자가 되는 것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무직으로 취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나머지는 일본인들이 하기싫은 고된 노동뿐.
선자의 첫사랑 고한수는 아무리 야쿠자였지만 동족을 위한 마음과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여인과 그 가족, 특히 아들에 대한 책임은 다하려했다. 전쟁통에 죽을 번한 선자의 시아주버니를 구하고 친정 엄마까지 일본으로 데려온 그가 왜 비난만 받아야 하는 지 모르겠다. 물론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숨긴것은 골백번 잘못된 일이지만.
반면 선자의 남편 백이삭은 착하긴 하지만 유약하고 능력이 없다. 자신의 종교적 신념때문에 자신의 목숨과 가족을 버린 양심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단지 남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의 남편이 되어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추앙받아야 하는가? 고한수가 아무리 나쁜 깡패 두목이라지만 그는 최소한 자신의 자식을 져버리지는 않았다. 신앙이 자신의 목숨과 가족보다 더 소중하단 말인가. 하긴 요즘도 광화문에 모여서 바이러스를 전파시키는 종교 무리들을 보면 그런 사람들이 아직도 있긴 있는 것 같다. 이삭처럼 순수한 종교인들은 물론 아니겠지만.
한편 백씨 3대남, 솔로몬은 파칭코 머니로 사우디 왕자처럼 부유하게 자라 국제학교에 미국 콜럼비아대학까지 나온 능력남이지만 정작 비교할 수도 없는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한다. 창녀가 된 그의 첫사랑이자 아빠의 일본인 동거녀의 데려온 딸과 현재의 재미 한인 여자친구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를 보면 딱하다. 이것이 재일 청년의 현재(80년대 말)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일까? 국적조차 불분명하게 살고 있는 재일 한국인들. 한국인이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외국인으로 사는 삶. 한국을 택할 수도 일본을 택할 수도 없는 현실. 솔로몬은 결국 일본인 전 여자친구의 충고를 따른다. 아버지의 파친코를 물려받기로. 그는 경계인으로서 가장 현실 적인 선택을 하고 마는 것이다. 멸시받는 직업일망정 자신이 있을 곳은 거기밖에 없다는 자각때문이엇을까? 삼촌 노아는 야쿠자 친부의 존재와 그것을 숨겨 온 엄마를 참을 수 없어서 자살하지만, 솔로몬은 야쿠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 파친코 아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것이 세대간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같아 다시금 서글프게 느껴진다. 그는 요코하마에서 유치원부터 국제학교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아 미국에서 대학 생활을 한다. 그런데도 재일한국인이라는 그 불편한 정체성을 왜 벗어던지지 못하는 것일까? 왜 재미교포 애인을 따라가지 못했을까? 노아는 그토록 영미 문학이 좋았으면서도 왜 일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재일 한국인으로 고통받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죽어야만 했을까?
고국이 아닌곳에서 자녀를 키우는 입장에서 책을 읽을때 스쳐가던 의문들을 열거해 보니 작가가 이 책에 많은 생각할 지점을 남겨놨다는 생각이 든다.
지은이는 7살에 미국으로 이민 간 재미 작가인데 성인이 되어 일본에 4년간 거주하며 수집 조사한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쓴 것 같다. 작가의 인터뷰를 보니 소설 속 모든 사건은 실화라고 한다. 여러 인터뷰를 재구성한 것. 집에 책이 있는데도 요즘 눈이 좋지 않아 못읽고 있다가 마침 이곳 전자도서관에 들어왔길래 빌려 들었다. 대개 오디오북은 저자가 읽어주는데 이책도 마찮가지였다. 그런데... 소설은 사람이 읽어 주는 것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 아무 감정 없는 로보트가 읽어주는 편이 훨씬 객관적으로 들린다. 가끔 작가가 연기를 하며 읽는 부분은 조금 억지스럽고 닭살스러워 작품에 몰입하는데 굉장히 방해가 된다. 한국어나 일본어 발음이 둘 다 너무 어색해서 역시 몰입에 방해가 된다. 영어권 청자를 염두에 두고 진행한 녹음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강연을 보고 알 수 있었다. 한국어 발음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듯.
다만 저자가 읽어주는 이 책을 들으며 세계 어디에 있든 모국어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못가르쳤다, 미국인처럼 영어 잘하게 하려고 집에서 한국말을 일부러 안썼다. 한국이 이렇게 잘살게 될 지, 한국 문화의 영향력이 이렇게 커질 지 몰랐다... 등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한국어를 배울 필요성이 없었다는 것. 미래에 한국어를 쓸 일이 생길 줄 몰랐을테니까. 그들이 떠나던 시점은 한국이 너무나 못살던 시절이었으니 이해는 간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데 한국어에 목마를 이유가 없었으니. 요즘은 K-pop이나 드라마때문에 세계적으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많은데 가끔 한인 교회를 가보면 20년전보다 확실히 아이들이 한국어를 잘하기는 한다. 내 가족 중에 영어 한마디 하는 사람이 없었음에도 나는 혼자 열심히 독학으로 영어를 배웠다. 그런데 너는 부모가 한국어를 하는데 왜 배울 생각도 안하느냐... 라고 나무라는 것은 좀 가혹한 것일 수도 있다. 다들 개인의 능력과 사정의 차이가 있을테니. 가장 효과적인 접근법은 일단 모국에 대한 자부심을 은연중에 심어주는 것이 아닐까. 아 모르겠다. 그저 안타까워 하는 말이다.
정체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긴다. 태어나 자란 곳이 내 나라면 내가 어느나라 사람인가에 대한 정체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태어나 청소년기를 지나서 이민을 간 사람들도 자신이 대한민국 사람이라는데 주저함이 없다. 어릴때 이주했거나 이민2,3세들이 정체성으로 많은 고민들을 하는 것 같다. 어떤 재미교포는 그 기준이 5세라고 하기도 하던데. 최근 한국문화가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 혼란이 더 커졌지만 오히려 정체성 갭을 줄이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단일 언어와 단일 인종이 모여 사는 나라에서 이민족으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이민자의 나라 미국, 캐나다, 호주가 아직도 이민 선호도에서 최상위에 있지 않은가. 소설 속 백씨 3대가 이삭의 첫번째 아내의 소원대로 미국으로 이주했더라면 어땠을까? 여전히 흑백 차별이 존재하는 미국이지만 일본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좀 더 개방적인 사회에서라면 노아는 그런 무의미한 죽음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같은 생각이 든다. 독자로서 소설 속 인물들 중에 가장 총명한 노아에게 많은 기대를 했어서 그런지 그의 죽음이 아주 실망스러웠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희망과 해피엔드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현실을 담담히 보여주는데 중점을 두었는데 내가 괜한 기대를 해놓고 실망을 했던 것이다. 내 책임이다. 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