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유대인의 시간 개념
유대인의 시간 개념
유대인들의 생활 관습이나 각 부면은 다른 여타 민족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독특한 부분들이 많다. 그들의 달력 체계가 그러하고 또한 그들의 시간 개념이 그러하다. 유대인들의 주(week)의 개념에서 일곱 번째 날은 안식일(Sabbath)이며,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를 말한다. 또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하루의 개념은 우리가 쓰고 있는 시간 체계와 다르다. 그들의 하루는 전통적으로 해질 때부터 시작해서 다음 날 해질 때까지, 즉 저녁부터 다음 날 저녁까지를 하루로 계산한다. 이는 창세기 1장에서 기인하는데,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말씀하시는 부분으로 하루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 내리고 있다. 『저녁과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더라』(창 1:5). 아침 6시부터 다음 날 아침 6시까지가 아닌, 저녁 6시부터 다음 날 저녁 6시까지인 것이다. 즉 저녁 6시에 하루가 시작되고 열두 시간이 지나(밤) 아침 6시에 다시 열두 시간이 계산된다. 낮을 12등분해서 시간을 분류하는데(요 11:9), “낮”이란 아침 6시에서 저녁 6시를 말하며 “밤”은 저녁 6시에서 다음 날 아침 6시까지를 말한다. 아침 6시에서 저녁 6시까지(낮)를 이렇게 보면, 유대인의 이른 아침은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 보면 오전 6시, 유대인의 시간에서 삼시면 오전 9시, 육시면 정오, 구시면 오후 3시가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현대 우리의 시계를 상하 좌우로 바꾸어 읽으면 되는 것이다.
포도원의 비유
마태복음 20장에서는 포도원의 주인이 일꾼을 구하여 일을 시키는 비유가 나온다. 일꾼들이 포도원에 일하러 온 시간을 주의깊게 보면 유대인의 시간 개념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 수 있다. 아침 일찍 온 일꾼들이 있고(우리 시간으로 오전 6시), 삼시경에 온 일꾼들이 있었는데(오전 9시) 이들은 장터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제육시(오전 12시, 즉 정오), 제구시(오후 3시)에 온 일꾼들이 있었고 또 제십일시경에 온 일꾼들이 있었다(오후 5시). 이들은 십이시(오후 6시)면 일이 끝나므로 가장 마지막에 온 사람들로 약 1시간만 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주님의 죽으심은 언제인가
『그 주의 첫날 아직도 어두운데 막달라 마리아가 일찍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요 20:1).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서 묻히신 무덤에 왔다가 돌이 무덤에서 옮겨져 있고, 그분의 시체가 없어져 있음을 목격한다. 마리아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그들과 함께 다시 무덤으로 온 이후에 슬퍼하며 서 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목격하는 영광의 증인이 된다(요 20:10-16). 이는 주의 첫날 이루어진 일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에게 있어 주(week)의 첫날은 안식일이 지나고 난 이후(즉 토요일 저녁부터 시작함)이다. 유대인의 한 주는 안식일과 더불어 끝나는데, 이는 창세기 1장에 기록하신 대로 6일간 일하시고 칠일째에 안식하신 것을 본받아 율법으로 지키는 사항 중의 하나였다(출 31:15).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있으며,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즉 금요일 해가 지기 시작하는 때부터 다음 날 해가 질 무렵인 24시간, 즉 토요일 저녁까지이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한 주간이 시작되는 것이다. 즉 마리아가 무덤이 빈 것을 목격한 것은 지금의 우리 요일의 개념으로는 일요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믿는 그분의 자녀들은 일요일인 주의 첫날에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많은 교회들이 예수님께서 금요일 날 돌아가셨다고 가르치고, 그래서 금요일을 흔히 금식하는 날로 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에 비추어 보고 유대인의 시간 개념으로 따져보건대 올바르지 않다. 만약 금요일 저녁 때 돌아가셨다면 그분의 예언하신 모든 것들이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누구라도 성경을 조금만 더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금요일 저녁 때 돌아가셨다는 것이 얼마나 어폐가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는 주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며, 또 그들이 그를 죽이리라. 그러나 인자가 죽은 후 셋째 날에 살아날 것이라.”고 하심이라』(막 9:31). 마태복음 1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언하신 부분이 나온다.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고래 뱃속에 있었듯이, 인자도 그처럼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의 심장 속에 있을 것이라』(마 12:40). 정확하게 예수님께서는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의 심장 속에 있으신 이후에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금요일 저녁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수요일 저녁에 돌아가신 것이다. 이들은 요한복음 19장의 안식일이 보통의 토요일의 안식일이라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금요일 저녁에 돌아가셨다고 주장하나 요한복음 19:31의 안식일은 “큰 날”이라 불리는 안식일로, 토요일의 안식일이 아니며, 마태복음 27장에서는 주께서 숨을 거두신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곧 주께서 숨을 거두신 그 때가 바로 예비일임을 말씀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완벽하게 유월절 어린 양의 모형으로서 어린 양을 잡는 바로 그 날에 돌아가신 것이다.
『그 날은 유월절 예비일이고 제육시쯤이더라. 그가 유대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왕을 보라!”고 하니』(요 19:14). 여기서의 육시는 당시 로마 시간에 따른 육시를 표기한 것이다. 즉 실제 우리의 시간으로 오전 6시경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마가복음 15:25과 비교해서 알 수 있는데, 마가복음 15:25에서는 『제삼시가 되니 그들이 주를 십자가에 못박더라.』고 적고 있다. 이 사실을 보건대 요한복음의 육시는 유대인의 시간인 육시가 아닌 로마 시간(즉 우리 시간으로 오전 6시)을 말하는 것이고, 마가복음의 제삼시는 유대인의 시간으로 삼시(즉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마가복음 15:25,33,34 외에도 마태복음 27:45-49에서도 잘 설명되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삼시(오전 9시)에 못박히셨고, 육시(정오, 12시)부터 어두움이 온 땅에 덮여 구시(오후 3시)까지 갔으며, 구시경 예수님께서 큰 음성으로 소리지르신 후 숨을 거두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저녁 제사를 드리기 위해 양을 잡고 제사가 드려지는 시간이 우리 시간으로 대략 오후 2시 30분경부터 4시 사이였다고 한다. 또한 회심하고 거듭난 많은 랍비들은 요한복음 19:30의 『그때 예수께서 그 식초를 받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다.”고 하시더니 고개를 떨구시고 숨을 거두시더라.』를 제사장이 유월절 양을 잡기 위해 목에 칼을 대는 바로 그때 양이 목을 떨구는 것과 동일시한다. 그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바로 그 시간에 죽으심으로 더더욱 그들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다.
성전에서 제사가 드려질 당시 많은 백성들은 성전에서 기도했는데, 보통 아침에 드리는 제사는 제삼시경(즉 오전 9시)에 시작했다고 한다. 누가복음 1:10에서 사카랴가 주의 성전에 들어가 향을 피우는 그 시간에 온 백성의 무리가 밖에서 기도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는 제삼시경의 일이다. 또한 사도행전 2장에서 다른 나라에서 온 수많은 유대인들이 각기 자기 나라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어떻게 무리가 함께 모여 혼란이 생기고 이상히 여겼던 것인지, 베드로의 설교를 어떻게 그 수많은 유대인들이 듣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구절이 바로 사도행전 2:15이다. 『지금은 겨우 낮 세시니 너희가 짐작하는 것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니라.』 여기서의 낮 세시는 제삼시경, 즉 오전 9시를 말하는 것으로 제자들은 기도하러 모인 수많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하게 된 것이고, 이에 그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침례를 받은 사람이 약 삼천 명이나 된 것이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제구시 기도 시간에 함께 성전으로 올라가니』(행 3:1). 제구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로, 이들은 성전에 저녁 기도를 드리러 간 것이다. 다른 유대인들 또한 성전에 기도하러 왔기에 이들이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을 수많은 사람들이 목도하였고,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믿었는데, 성경은 『남자의 수가 약 오천 명이나 되더라.』(행 4:4)고 적고 있다. 이들 사도들은 제사장들과 성전 책임자들과 사두개인들에 의해 체포당했고, 그 다음 날까지 가두어진 바 되었는데, 이는 이미 그때가 저녁이었기 때문이었다(행 4:3).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씩 의무적으로 기도했는데, 이는 시편 55:17에서 볼 수 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기도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으리니』(시 55:17). 다니엘도 비록 바빌론에 있었으나 늘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을 향해 하루 세 번씩 기도했다. 『이제 다니엘이 그 문서가 서명된 것을 알았을 때 그의 집으로 가서 그의 방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어 두고 그가 전에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으며 그의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렸더라』(단 6:10).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건하게 살고자 했던 이방인 백부장 코넬료를 보게 된다. 그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던 사람으로 제구시경에 기도 중에 환상을 보게 된다. 구시는 오후 3시를 말한다. 또한 베드로는 제육시경에 기도하러 지붕 위로 올라갔다가 보자기의 환상을 보게 된다. 육시경은 우리 시간으로 정오가 되는 때이다. 지금도 매일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기도가 드려지는 것은 기본적으로 세 번이며, 각각 샤하리트(shaharit), 민하(minha), 마아리브(ma’ariv)로 불린다.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에서 볼 수 있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의 개념을 포함한다. 즉 유대인들이 고통의 역사 속에서 이제까지 살아남고 그들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한 편에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가 그들의 의식 저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온다는 것은 그들에게 많은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안식일과 더불어 그들에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의 시간 체계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침을 기다리며 저녁을 보내고 있다. 『밤새도록 울음이 지속될지라도 아침이면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현재의 고난들이나 환난은 반드시 끝이 있게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 영광의 아침(삼하 23:4, 호 6:3)에는 기쁨만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꾼의 마음으로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다. 『밤이 많이 지났고 낮이 가까웠느니라. 그러므로 어두움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 p.152~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