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가 없었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 하지만 내가 더 좋은 작품을 그리지 못한 것이 전부 내 탓만은 아니야. 내 시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난 그저 배운 대로 그림을 그렸을 뿐이야. 난 내 스승들을 믿었고, 그들은 우리에게 전통과 규율 그리고 거장들의 화풍과 그들에게 충성하는 법만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훈련시켰지. 그들은 내게 진정한 자유는 무엇보다 순종에 있으며,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 또한 끊임없는 훈련 속에서 얻어진다고 가르쳤어. 나머지는 모두 부차적이었지. 난 그 가르침을 따랐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어. 나름대로 꽤 재능이 있었던 난 듣고 배우고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화가라는 직업에 들어섰지. 그리고 어느 순간, 난 그림이 내 삶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헌데, 궁극에 가서는 규율에 잘 순응한 사람에게 보상처럼 찾아온다던 독자적인 화풍이 내게서는 보이지 않는 거야. 덫에 갇힌 기분이었지. 아니, 실은 그것을 제대로 보기는 했어. 내게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서. --- pp.21∼22
식사를 마치자, 그들은 평소와 같이 정원으로 나가 작지만 고풍스러운 퍼걸러 아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정원과 붙은 풀밭에는 잡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있었으며, 오래되어 굵고 비틀어진 사과나무들도 눈에 띄었다. 사내아이들은 풀밭에서 놀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허락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아이들은 풀밭에 나가서 놀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들은 집으로 들어가 늘어지게 낮잠을 즐기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하지만 어른들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풀밭에서라도 자기로 마음을 먹었다.
퍼걸러 아래에서는 라드미랄 씨와 공자그가 작은 술잔을 들어 아주 천천히 목을 축이고 있었다. 얼굴이 약간 발갛게 상기된 마리-테레즈는 놀라울 만큼 빠른 손놀림으로 양말을 뜨고 있었다. 이따금 뜨개코가 바뀔 때마다 뜨개바늘이 햇살을 받으며 반짝거리자, 라드미랄 씨는 앞에 앉은 젊은 여인이 두 손 가득 별을 쥐고 있는 것만 같다고 느껴졌다. 선잠에서 그를 깨운 것이 바로 이 때문이라 생각되자,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 pp.79∼80
그녀는 이미 떠날 준비를 마쳤다. 아니, 그녀는 이미 떠나고 있었다. 이렌느에게서 조금 전까지 보아 왔던 자신감과 당당함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이제 민첩함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녀는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파리를 향해 도망치고 있었다. 그녀에겐 이에 저항할 아무런 힘도 없었다. 그녀를 잡기 위해서라면 울면서 애원하고 온갖 사정이라도 하고 싶었던 라드미랄 씨도 이제는 어서 가라며 그녀의 등을 떠밀고 싶었다. 그토록 간절히 그녀가 떠나고 싶어 했기에, 그토록 간절히 그녀가 떠나겠다고 했기에. 그러나 그녀의 등을 밀칠 수 있는 기회조차 그에겐 없었다. 그녀는 혼자서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서둘러 정원으로 간 이렌느는 공자그와 마리-테레즈에게 미안하다는 짧은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세 조카들과는 조급하게 작별인사를 나눴으며, 순간의 발길로 잠자는 개를 깨운 뒤, 메르세데스에게 간단한 인사말을 던졌다. 그녀의 손에 1백 프랑짜리 지폐를 쥐어주며 이렌느는 고작 한마디만을 남겼다.
- 아버지를 잘 부탁해. --- pp.130∼131
집까지 돌아가는 데 라드미랄 씨는 거의 20분이나 걸렸다. 그가 다리를 약간씩 절며 걸은 것도 있지만 그다지 서두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석양빛은 너무도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옅게 드리워진 잿빛과 석류의 검붉음, 그리고 자로 선을 그은 듯 겹겹이 모습을 드러내는 초록빛으로 밤하늘은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누구도 이 모습을 화폭에 담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월요일, 늘 그랬던 것처럼 라드미랄 씨는 돌아오는 일요일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로 가는 길에 그와 마주 친 투른느빌 씨가 물었다.
─ 라드미랄 씨, 일요일은 잘 보내셨어요?
─ 그럼요. 너무 잘 지냈어요.
라드미랄 씨의 목소리엔 생기가 넘쳐 나 있었다.
─ 가족들이 왔었나 봐요?
─ 네.
라드미랄 씨가 말했다.
─ 딸아이요.
--- pp.136∼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