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정도전이 들뜬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려는데, 문득 병영 앞에 서 있는 장대한 소나무가 눈에 띄었다. 어제 그 둘레를 돌며 병영을 내려다보았던 바로 그 소나무였다. 정도전은 소나무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품에서 작은 칼을 꺼내 소나무 껍질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작업은 쉽지 않았다. 정도전은 구슬땀을 흘리며 칼을 꽂고 비틀고 당기기를 반복했다. 철갑 같은 소나무 껍질을 솜씨도 없고 변변한 도구도 없이 벗겨내기란 생각보다 무척 힘겨웠다. 사람 등판만큼 벗겨내는 데 몇 시간이 걸렸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교련 중이던 이성계의 병사들은 대체 저 선비가 뭘 하나 싶어 흘깃흘깃 쳐다보곤 했다.
마침내 적당한 크기로 소나무 껍질이 벗겨지고 속살이 드러나자, 정도전의 손은 피부가 벗겨지고 군데군데 피가 흐르는 지경이 되었다. 그렇지만 만족스러운 듯, 그는 이마의 땀을 소맷자락으로 쓱쓱 닦아냈다. 그러고는 봇짐을 뒤적거려 붓과 먹을 꺼내더니, 하얗게 드러난 나무 속살에다 이렇게 시를 썼다.
한 그루의 소나무여, 아득한 세월을 견뎌(蒼茫歲月一株松)
몇 만 겹으로 둘러싼 산속에서 자라났구나.(生長靑山幾萬重)
다행히도 훗날 다시 보게 되려는가.(好在他年相見否)
인간 세상의 만남은 잠시 지나간 자취 되는 것을.(人間俯仰便陳?)
이것이 이성계와 정도전의 첫 만남이었다. 이 만남 후에 한국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두 사람의 만남은 실로 김유신과 김춘추의 만남 이상으로 효과적이고 위력적인 문과 무의 결합을 이루었다. 아득한 세월을 견뎌온 왕조가 두 사람의 협력으로 무너졌고, 한 사람은 옥좌를, 다른 사람은 재상의 지위를 차지하여 새로운 사상과 제도로 다스리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정도전의 마지막 행동은 약간의 의문을 남긴다. 그가 이성계에게 어떤 메시지를 남기려 한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 왜 그것을 편지에 쓰지 않고, 진땀을 흘려가며 껍질을 벗겨 소나무에 남겼을까? 마침 종이를 가진 게 없어 그랬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정도전은 함주 여행 도중에 몇 편이나 시를 남겼다. 그걸 볼 때 늘 지필묵을 가지고 다녔다고 짐작할 수 있다. 설령 마침 종이가 떨어졌다 해도 잠깐 발길을 돌려 막사에서 시를 쓰고 이성계에게 직접 전해주면 될 것을, 뭐 하러 모든 사람이 지나가며 볼 수 있는 병영 앞 나무에다 글을 남겼단 말인가? --- pp. 56-57
“함께 백제를 친다, 그래서 백제 땅을 나누어 먹는다, 이 말씀이겠지? 괜찮겠군. 좋아요. 동맹을 합시다.”
“아, 정말 다행입니다! 그러면 정식으로 문서를……”
“다만, 조건이 있소. 귀국이 동맹을 맺는 신의의 표시로, 원래 우리 땅이었던 마현과 죽령을 되돌려주시오. 그러면 동맹을 맺으리다.”
“……제게는 그런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신의 표시로는 너무 과하다고 여겨집니다.”
“흥! 과하기는 개뿔이 과한가?”
갑자기 연개소문이 언성을 높이며 쾅 하고 대전 바닥을 발로 굴렀다. 김춘추는 물론 옥좌의 보장왕까지 흠칫 떨었다. 연개소문의 표정과 말투에서 김춘추는 회담이 끝났음을, 아니 처음부터 결렬되어 있었음을 직감했다.
“과거 왜구가 쳐들어와서 나라가 망하게 되었을 때, 너희 신라는 어찌했느냐? 우리 광개토호태왕께 제발 살려달라는 요청을 했지! 태왕께서 그 간청을 받아들여 군대를 보내서 구해주시지 않았더냐! 그런데 너희가 무슨 보상을 했더냐? 보상은커녕, 나중에 백제와 손을 잡고 우리 고구려를 치더니만, 이번에는 백제를 배신해서 백제의 왕을 죽인 게 너희 신라 놈들 아니냐? 너희처럼 신의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놈들과 무슨 동맹을 할까? 여봐라! 어서 이 신라 놈을 옥에 가둬라!”
이렇게 해서 연개소문과 김춘추 사이의 ‘평양회담’은 실패로 끝났다. 이는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짓는 회담으로서 현대의 김구-김일성 회담이나 김대중-김정일 회담에 비할 만했다. 그런데 김춘추와 연개소문은 기본적으로 합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성격부터 판이했다. 김춘추가 문을 대표한다면 연개소문은 무를 대표했는데, 김춘추-김유신의 경우에는 문과 무의 완벽한 조화가 가능했으나 이 경우에는 완벽한 배척이었다. (…중략…)
여라 동맹에 실패한 김춘추는 6년 뒤 당나라를 방문해 나당동맹을 맺는다. 그 이후로 고구려는 매우 불리한 세력구도에 놓였고, 결국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 고구려로서는 잠정적으로라도 신라의 동맹 제의에 긍정하는 자세를 보였어야 했던 것이다.
한편 신라도 나당동맹이 좋지만은 않았다. 늑대를 물리치려 호랑이를 끌어들인 셈이었고, 결국 나당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당나라를 상국으로 받들어 그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 땅을 중국화하는 속국의 길로 가야 했다. 늑대와 겨루기 위해 호랑이와 한편이 되었다고 할까. 여라 동맹이 이루어졌다면 고구려와 신라의 ‘남북조 시대’가 열려, 중국의 군사적?문화적 침략을 오랫동안 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성격은 쉽게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냉철한 이성과 겸허한 마음은 도저히 맞지 않는 상대와의 대립을 누그러뜨린다. 그리고 대립의 벽 너머 멀리, 진정한 이익을 볼 수 있게 한다. --- pp. 93-98
“나이샷!”
털털한 셔츠와 면바지 차림의 작달막한 사내가 호쾌하게 드라이브샷을 날리자, 옆에 늘어서 있던 세 명의 남자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탄성을 질렀다. 샷을 때린 남자는 멋쩍게 웃으며 공이 날아간 방향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1978년 봄. 경기도의 모 골프장. 오늘은 이 네 사람과 그 몇 배는 되는 경호원들 외에 손님은 전혀 없었다.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중앙정보부장과 청와대 경호실장, 경호실 작전차장보, 그리고 제8대 대통령 박정희가 행차했기 때문이다. (…중략…)
골프를 마친 네 사람은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모여 앉았다. 김재규와 차지철은 아직도 낯빛이 안 좋았고 서로 말을 섞지 않았지만, 박정희 앞에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한동안 골프 이야기와 정치 이야기를 뒤섞어서 이야기하던 박정희는 실한 총각김치 한 쪽을 우적우적 씹으며, 공손히 잔을 떠받친 전두환에게 막걸리를 따라주었다.
“임자는 경호실 근무가 별 재미 없다며?”
“아, 아닙니다! 무슨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각하 가까이에서 각하를 모시며 호위하는 임무를 맡아 필생의 영광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겁하며 대답하는 전두환에게 박정희는 괜찮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 사단장으로 나가고 싶은 모양이던데, 아닌가?”
“네…… 각하. 경호실 업무에 불편한 점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군인의 길에 몸담은 이상 사단장 근무는 누구에게나 꿈이 아니겠습니까?”
“허허. 그렇지. 전 소장은 그런 점이 좋아. 정치놀음에 혹하지 않고 군인 정신이 아직 살아 있거든. 그 누구들하고는 다르게 말이지.”
김재규와 차지철은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그러면 꿈을 이뤄야지? 기다려봐. 이번 정기 인사에서 1사단장 자리가 나갈 거야.”
“각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 전두환, 각하께 목숨을 걸고 충성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허허.”
“전 차장, 아니 참, 전 사단장! 축하해요!”
“고맙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그 자리는 화기애애하게 끝났다. 그러나 훗날 보자면 이렇게 묘한 자리도 없었다. 지금 함께 술을 마시며 웃고 있는 네 사람. 앞으로 그중 한 사람이 두 사람을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이 그 한 사람을 죽일 것이다.
이날은 그 운명의 포석이 깔린 자리였다. 유신체제의 최고권력기구를 분점한 두 실력자의 대립이 마침내 최고 권력자 면전에서까지 불거져 나왔으며, 이는 이후의 정치사정에 따라 갈수록 격화되다가 끝내 궁정동의 총성으로 끝장을 보게 된다. 그리고 사단장으로 내정된 이가 총을 쏜 사람을 심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날 모임을 통해 그가 사단장을 거쳐 보안사령관으로 승진했기 때문이었다.
--- pp. 150-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