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뒤 한구석에 앉는 아이. 식물처럼 조용한 아이. 마치 전염병이라도 걸린 듯 모두가 피하는 아이. 물론 친구도 없고. 아, 2학년 때 한 명 있었다. 항상 손톱 밑에 어제 놀던 흙이 그대로던 아이였는데, 그리 오래 친구로 지내지는 못했다. 다른 여자애들이 빼앗아 가 버렸으니까. 즐겨 하던 ‘이자벨 가까이 가지 마.’ 놀이의 일환으로. 놀이 규칙은 이렇다. ‘한 명을(저 이상한 이자벨을) 밖으로 몬다. 그리하여 나머지는(이자벨 빼고 모두는) 안에 속해 있음을 자축하고 기뻐한다.’ 그래, 그래. 다 아는 그런 얘기. --- p.22
시간이 조금 있다면, 지금 당신의 방으로 가 문손잡이를 살며시 잡아 보라. 그리고 그대로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쉬어 보라. 자, 어떤 소리가 들리나? 책장의 책들끼리 서로 소근소근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 주는 소리? 혹시 키우는 금붕어가 휘파람으로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뮤지크를 흥얼거리진 않나? 툭툭, 퍽퍽! 아, 베개들이 베개 싸움 하는 소리? 혹시 흙냄새와 개구리 냄새가 섞인 트롤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진 않고? 당신이 방에 없을 때, 그곳에서는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 p.30
이자벨은 그 캠프라는 곳으로는, 아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그곳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이 어떤지를, 누군가에게 무언가 티끌만큼이라도 다른 점이 있으면 어떻게 나오는지를 이자벨은 알고 있었으니까. 누구의 한쪽 귀가 다른 쪽 귀보다 높게 달려 있다는 이유로, 팔에 난 주근깨가 희한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는 이유로(‘어, 늑대네, 이건 돼지 머리통이고’) 아이들은 등을 돌린다. 그리고 소문을 낸다. ‘쟤 조심해, 보름달이 뜰 때마다 좀비로 변한대.’ ‘쟤 좀 봐. 모기가 팔에 앉으면 때려 죽여서 그 피 핥아 먹는대.’
아니, 싫었다. 아이들로 가득 찬 캠프로는 가기 싫었다. 그렇다면 마녀는?
마녀는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었다.
개울에 다다라, 이자벨은 남쪽으로 향했다.
--- p.45
……그래, 난 체인질링이었어, 하는 생각 말이다. 남쪽으로 코린을 향해 걷는 동안 이자벨은 머릿속에서 그 생각을 이리저리 찔러 보고 튕겨 보고 주물러 보았다. 내가 정말로 체인질링이었던 걸까?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많은 일들이 설명되는데! 왜 그동안 다른 아이들이 하는 놀이 방법을 절대 이해 못했는지. 왜 잡기놀이 요령이 죽어도 터득이 안 됐는지. 왜 발야구를 하면 늘 허우적대며 헛발질만 했는지. 왜 공기놀이를 하면 공깃돌이 사방으로 튀어 증발해 버렸는지. 구슬치기는 어떻고? 이자벨에게 구슬이란 비켜 가라고 치는 것이었다. 줄넘기? 말하기 입 아프다.
--- p.50
“끔찍한 전쟁이었지.”
그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일어서서 앞치마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많은 목숨이 희생되었어. 아무 의미도 없이 말이야. 난 그렇게 생각해. 왕들의 전쟁이라면서 싸우긴 마을의 아들들이 싸웠지. 참 어리석은 일이었지, 전부 다.”
--- p.80~81
그 점을 한번 생각해 보길 권한다. 다음번에 혹시 인도를 기어가는 개미 한 마리를 밟아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 때나(그렛은 말한다. 개미는 가족에게 충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참으로 고귀한 생명체라고. 그리고 해가 저물기 직전, 낑낑거리며 짐을 나르고 집을 짓는 일과를 마치고, 이제 미친 듯이 서두르던 움직임을 마침내 늦추고 있는 개미를 만난다면, 개미에게 얼마나 유머 감각이 넘치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나비를 잡아 판지에다 핀으로 고정해 놓고 싶은 욕구가 들 때 말이다.
우리가 뭉개고 핀을 꽂음으로 해서 이 세상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이야기되지 못할까? 어떤 농담들이 사라질까? 어떤 노래들이 불려지지 못할까?
--- p.88
이자벨이 복도를 지나가면 교사들이 수근수근 이상한 아이라고 했고, 이자벨이 점심시간에 도시락 뚜껑을 열어 핫도그 빵 사이에 라벤더 젤리를 끼운 샌드위치를 꺼내면 여자애들이 키득거리며 이상한 아이라고 했다. 운동장에서 놀던 남자애들은 지나가는 이자벨에게 ‘외계인’, ‘찐따’, ‘멍청이’ 같은 말들과 더불어 이상한 아이라고 외쳤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까지 이상하게도 이자벨을 이상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자벨은 한 번도 자신을 이상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냥 자기 자신 같다고 느낄 뿐이었다. 그냥 이자벨 빈 같았다. 거기에 뭐가 그리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일까?
--- p.91~92
“넌 조금 더 큰 다음에 아마 치유사의 도제가 될 수도 있을 거야. 내가 보기에 넌 타고난 소질이 있어.”
그렛의 말에 헨의 얼굴이 붉어졌다. 갑자기 제 신발에 앉은 티끌이 눈부시게 예뻐 보이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헨은 말했다.
“뭔가에 재능이 있다는 건 좋은 일 같아요. 그런데 여자애들은 도제로 안 받아 주지 않아요? 받아 주나?”
그러자 그렛이 쳇, 하고는 말했다.
“참 멍청한 무리들이지. 그런 사회 구조를 생각해 낸 사람들 말이야. 그렇게 하면 이 세상 지적 능력 절반은 소용없어지는 건데.”
“지금은 그게 현실인 것 같아요.”
헨은 어깨를 으쓱했다.
--- p.104
“간단히 말하자면, 너희 엄마는 어느 문손잡이에 손을 얹고 ‘이 문 너머 다른 세계가 있어서 그리로 빠져 들어갔으면 좋겠다.’ 하는 상상을 하는 아이는 아니었던 거야.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네 엄마는 그 문들 중 하나에도 다가가지 않았지.”
이자벨은 눈을 깜빡였다. 또 한 번 깜빡였다.
“문…… 들이요? 문이 한 개가 아니에요?”
“그럼, 한 개뿐인 줄 알았어? 문은 온 천지에 수두룩해. 그 문을 찾고 싶어 하는 아이들은 찾아. 찾고 싶어 하지 않는 아이들은 찾지 않고. 네 엄마는 찾고 싶어 하지 않았어. 그렇지만……”
“전 찾고 싶었어요.”
“알아. 네가 태어난 순간부터 알았어.”
--- p.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