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제일 마음 아픈 건, 헤어지자는 말을 들은 순간이 아닐 겁니다. 그 사람에게서 더 이상 사랑을 못 느낄 때, 모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알아질 때, 그때가 사실은 가장 마음 아픈 순간이지요. 그때가 사실상 헤어지기 시작하는 순간이고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비행기 안을 채울 때, 내 몸도 45도로 젖혀질 때, 작은 비행기 창으로 바깥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점점 작아지면서 모든 것이 점점 시시하고 모든 것이 점점 그리워지지. 나는 심장이 두근두근하면서 괜히 숨이 가쁘면서 지금 좀 행복한 것 같다고 생각하지. 그래, 비행기, 비행기를 타고 싶어.
여행 생각이 난다. 공항버스를 볼 때, 트렁크를 끌고 가는 사람을 볼 때, 애완동물 가게 쇼윈도에서 쳇바퀴를 너무 열심히 돌리는 햄스터를 보다 마음이 서글퍼질 때, 카페 옆자리에서 대학생 2명이 배낭여행 루트를 짜며 큰 소리로 떠들 때, 가입만 해 놓은 여행 카페에서 메일이 날아 올 때, 불편한 모임에 억지로 나갔는데 내가 꼭 오지 않았어도 됐다는 생각이 들 때, 스팸 문자 한 통에 벌컥 짜증이 날 때, 내가 당연한 누군가에게 내 빈자리를 느끼게 해 주고 싶을 때….
여행을 준비하는 동안은 이런 식이 된다. 길에서 공항버스를 볼 때마다 괜히 내 자가용을 보는 듯 흐뭇하다. 조금만 기다려요. 곧 타요. 옷장의 옷들이 다 한 번씩 트렁크에 담겼다가 대부분 옷걸이에 다시 걸린다. 정말 옷장째로 다 갖다 버려도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행 갔다 오면 옷들부터 싹 다 정리하겠다는 결심도 한다. 괜히 주위 사람들에게 잘하고 싶어진다. 혼자 가는 게 미안해서, 없는 동안 내 흉 보지 말라고 선물은 어차피 못 사 올 테니까.
어른들에게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말은, 어린 시절 들었던 ‘넌 무엇이든 될 수 있다’만큼이나 희망적인 말이다. 물론 희망만 주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평화로워도 괜찮은 거겠지? 그래도 된다는 대답을 나는 너한테 듣고 싶은 것 같다. 괜찮아. 당연하지. 뭐 어때. 네가 어때서. 너는 분명히 그렇게 말해 주겠지. 고맙다. 생각만으로도 든든하네.
낯선 곳에서 나는 정말 네 살짜리 아이가 되는 것 같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지만 글을 읽을 줄 모르고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더더욱 모르지. 그래서 아무나에게 의지해. 그러면 신기하게도 누군가가 도와주지. 온통 낯선 세상이 무서울수록 그 낯선 사람들을 믿고 의지하게 된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야.
왜 남들은 잘도 찾는 길을 나만 못 찾고 이렇게 헤맬까, 스스로를 한심해하며 아픈 다리를 끌고 다니던 시간들이 나중에 돌아보면 가장 빛나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가끔 몸으로나 마음으로나 여행이 힘들어질 때면 행아는 그런 생각을 한다. 이제 곧 그리워질 시간을 걷고 있다고.
공연을 본다는 것은 멀리 떠나지 않아도 일상에서 가장 먼 곳에서 머물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취하도록 술을 마시지 않아도, 깊은 잠에 빠지지 않아도, 가장 비현실적인 시간 속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일지도.
남들은 다들 열심히 돌아다닐 텐데 난 왜 이럴까 싶은 마음. 하지만 곧 그런 비교가 얼마나 쓸데없는 것인지를 기억한다. 너 런던 가서 둘째 날 뭐 했어? 몇 시까지 돌아다녔어? 거기까지 가 놓고 설마 피곤하다고 일찍 들어가서 잔 건 아니지? 아무도 그렇게는 묻지 않을 것이다. 물으면 또 어때. 그날은 피곤해서 일찍 들어가 쉬었다. 그러면 그만이다.
처음 배낭여행 갔을 때, 그땐 왜 그렇게 돈을 아끼는 데만 목숨 걸었을까, 왜 그 좋은 풍경 속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도 부리지 못했을까, 왜 남들보다 더 많은 곳을 가 보는 데만 목숨 걸었을까, 어디가 어디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왜 그렇게 서둘러 떠나려고만 했을까, 왜 사진 대신 마음을 남길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이제 와 생각하면 그때는 거기에 있어도 거기에 있지 않았던 것도 같다.
킬데어 같은 곳에 살면 어떨까. 한나절 부지런히 둘러보면 동네 구경을 다 할 수 있는 곳, 늘 보는 사람과 꼭 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아낄 것도 없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단골집 하나 정해 그곳에서 늘 먹던 메뉴로 점심을 먹고, 저녁이면 약속도 없는데 한둘씩 모여드는 술집에서 다 같이 맥주 한잔, 날마다 구둣방 할아버지에게 안부를 여쭙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행아 자신조차 헤어진 이유만 기억하려 든다. 문득 데미안이 농구를 하다 만났다는 열네 살 소년의 말이 떠오른다. 왜 헤어졌는지에 대해서만 말하지 말고 왜 만나게 됐는지를 말하라고 했던가.
그동안 이 방을 거쳐 간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그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서 어떤 꿈을 꾸었을까, 세상 어딘가에서 스쳐 지나간 사람들 중 이 방에서 잠들었던 사람이 있지 않았을까, 서로 얼굴도 알지 못한 채 며칠 밤이나 같은 베개를 쓴 인연을 가진 사람들은 다음 생에 어떤 관계로 태어나게 될까.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