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은 역사적 예수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소평가되어 왔고 제대로 활용되어 오지 못했다. 고고학은 복음서들을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해 얻은 정보로써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고고학과 복음서, 둘 다 문제가 있기는 하다. 고고학적 유물은 너무 단편적이어서 잘못 해석될 가능성이 있고, 문자화된 자료는 전달과정에서 왜곡되거나 필사에 의해 오류가 생겼을 수 있다. 따라서 고고학은 적절하게 이용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예수의 마지막 날들에 관한 이야기를 뒷받침하거나 그 이야기의 역사성을 논박하고 부인하는 데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고고학은 복음서의 이야기들을 역사적 연구와 비교·대조해 타당성을 검증하는 독립된 수단이어야 한다. 고고학은 예수의 재판 같은 특정한 사건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런 사건들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 「프롤로그_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고고학 발굴지」 중에서
복음서들, 특히 마가복음의 비판적 분석에 따르면, 예수의 행적과 마지막 여행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가 갈릴리에 있을 때 제자들에게 알려준 예언, 즉 그가 예루살렘에 들어가 그곳의 지배계급과 충돌을 일으켜 싸우다가 결국 죽음을 맞을 거라는 예언에 맞추려고 짜맞춰진 것이 분명하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미리 전략을 세웠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내 생각에는 예수가 ‘세례자’의 입지를 굳히고 치유활동을 확대하기 위해 예루살렘까지 여행한 듯하다.
예수의 예루살렘 여행은 분명 계획적이었다. 예수는 유월절 기간을 이용해 성전과 다른 곳들을 돌아다니며 예루살렘을 찾아온 순례자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계획했던 궁극적인 목표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예수는 정말로 유대와 로마 당국과 맞붙어 싸울 계획이었을까? 아니면 일이 그렇게 전개되었을 따름일까? --- 「1장_예루살렘 가는 길」 중에서
나사로에 대한 예수의 행동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1세기에 죽음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손발이 절단되거나 처형당해 죽지 않는 경우, 유대인들은 당사자가 정말로 죽었는지 아니면 셰올과 깨어있는 세계 사이에서 가사상태에 있는지 판단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런 이유에서 망자는 땅을 판 묘혈에 묻지 않고 동굴묘에 있는 긴 의자에 며칠간 눕혀두었다. 주로 가난한 농부와 양치기가 묘혈에 묻혔지만, 그들도 공동묘지에 마련된 시체안치실에 적어도 사흘은 눕혀둔 후에 매장되었다. 예수 시대에는 많은 이들이 산 채로 매장될까 두려워했고 그런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특별한 방법들을 고안했다. 따라서 마리아가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간 예나, 많은 여성들이 예수의 무덤을 방문한 예는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들은 사흘 이상 지난 후 고인의 상태를 살펴보려고 찾아갔던 것이다. --- 「2장_죽은 사람을 살리다」 중에서
예수는 평화적으로 행동했지만 시 당국이 오해해서 신성모독죄 혹은 선동죄를 씌워 결국 사형에 처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할 증거가 있을까? 예수가 복음서에 쓰인 대로 정말 시끌벅적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했다면 로마는 예수를 고약한 ‘이방인’ 폭도들의 지도자로 여겨 위험인물로 점찍었을 것이다. 예수가 로마법을 정면으로 부인하며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 자처한 것도 그런 주장의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아주 조용히 들어왔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는 곧바로 베다니에서, 적어도 올리브 산으로 오는 길에서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었을 것이다. 로마 군인들의 입장에서도 비좁은 도시보다 올리브 산처럼 널찍한 곳에서 군중들을 진압하기가 훨씬 편했을 것이다. 예수가 성전 바깥뜰에서 좌판을 엎고 소동을 부린 것을 이유로도 얼마든지 체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시위’를 벌인 직후에 그곳에서 설교까지 했다. 따라서 성전 관리들은 그 사건을 우발적으로 일어난 대수롭지 않은 소동 정도로 생각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예수의 추종자들에게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예수가 예루살렘 시내 곳곳에서 병자들을 치료하고 기적을 보여주며 군중들을 끌어들이자, 지배계급이 두려움에 휩싸여 예수를 체포한 것일까? --- 「4장_베데스다와 실로암에서 보여준 기적과 표적들」 중에서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어떤 짓이라도 하던 폭력적 성향에 비춰볼 때, 빌라도가 예수처럼 변변찮은 인물을 직접 재판하는 번거로운 일을 할 이유가 있었을까? 로마인 하급자에게 사건을 맡기지 않았을까? 다른 때라면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유월절 주간은 무척 민감한 시기였기 때문에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 사건을 직접 처리하려 했을 수 있다. 산헤드린은 그 사건을 해결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사태를 정리하고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했다. 자신이 단호한 사람임을 보여주지 않으면 길거리의 불안이 대대적인 폭동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걱정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재판을 질질 끌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예수를 곧바로 사형장에 끌고 가라고 명령했을 것이다. --- 「5장_재판을 받다」 중에서
십자가 처형은 극단적으로 잔혹한 사형방식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 죄수는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의식을 잃지 않을 정도까지 심하게 채찍질을 당했다. 그리고 벌거벗은 채 십자가에 매달렸다. 그 자신에게나 가족에게도 견디기 힘든 모욕이었을 것이다. 십자가 처형에는 하나의 고정된 방식이 없었다. 요세푸스의 기록대로 죄수들은 각양각색의 자세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요컨대 가로대와 세로대의 형태에 따라 십자가에 매달린 자세가 달라졌다. 예루살렘 주변에는 나무가 귀했기 때문에 가로대와 세로대는 흔히 재사용되었다. 때로는 옹이투성이인 올리브나무처럼 부적절한 나무도 사용되었다. 죄수의 다리는 밧줄과 철못으로 세로대에 고정시켰는데, 로는 죄수를 십자가에 밧줄로 묶고 못질한 후 똑바로 세운 경우도 있었다. 죄수는 자신의 몸을 지탱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죽음은 시간 문제였고, 근육경련과 가사상태가 동반되기 일쑤였다. --- 「6장_십자가 처형을 당하다」 중에서
예수 무덤의 정확한 위치는 가장 큰 수수께끼다. 예수가 어디 묻혔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예부터 요한복음에 근거해 예수가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곳 앞에 묻혔다고 가정하기는 했지만, 다른 세 복음은 이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있는 성묘교회의 갈보리 바위 옆에 예수의 무덤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곳이 정말 예수의 무덤일까?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은 그곳을 잠깐이라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들어 길게 줄을 선다.
예수의 무덤 위치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의견이 있었다. 동예루살렘의 올리브 산에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고, 어떤 식으로 생각해도 예루살렘 남쪽의 힌놈 계곡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에는 고고학이나 역사적 증거가 없다. 19세기에는 예루살렘 북쪽의 낭떠러지가 실제의 골고다라는 주장과 더불어, 그곳에서 발견된 동굴무덤이 예수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현재 ‘정원무덤’으로 불리는 이 지역 방문객들 사이에는 이곳이 예수의 무덤일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돈다. 그 이야기가 정말일까? --- 「7장_예수의 무덤을 찾아서」 중에서
기원후 28년 세례자 요한이 죽은 후, 예수는 유대 지방에서 최고의 세례자이자 치유자라는 입지를 굳히려 나섰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의 고향인 예루살렘 근처의 벳학게렘 지역과 요단강 계곡에서 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침례파의 저항에 부딪쳤다. 따라서 예수는 어쩔 수 없이 속셈을 드러내고, 기원후 30년에 ‘행동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첫째, 제자들과 추종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가서 유월절 축일을 보낸다. 둘째, 예루살렘에 가는 길에 침례파의 본거지인 요단강 계곡을 방문해 그곳의 추종자들과 연대를 강화한다. 셋째, 베다니를 본부를 삼는다. 넷째, 예루살렘에서는 정결의식이 행해지는 중요한 곳, 특히 베데스다 연못과 실로암 연못에서 병자를 치유하고 가르친다. 다섯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치유와 침례를 접목한 새로운 침례파를 결성해 세례자 요한의 후계자로서 입지를 굳힌다.
--- 「에필로그_예수는 왜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맞았을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