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웰은 가난한 것으로 의심되는 아이들이 당하는 “악의적이고 고약한 질문들”에 대해 말한다. “네 아빠는 연봉이 얼마나 되니? 런던의 어느 동네에 살아? 사는 동네가 나이츠 브리지야, 아니면 켄싱턴이야? 집에는 욕실이 몇 개야? 하인은 몇 명이나 두고 있어? 집에 관리인은 있어? 좋아, 그러면, 요리사는? 넌 옷을 어디서 맞춰 입니? 방학 동안 공연을 몇 번이나 갔어? 용돈은 얼마나 받아? 등등.” 에릭은 돈의 역할과 사회적 계급에 따라 달라지는 개인의 운명을 아주 빨리 깨닫는다. “나는 일찌감치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10만 파운드 이상을 갖지 못하면 하찮은 인간이라는 사실…… 그런 사회적 명예의 기준에 따르면, 나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였다.”
---「2. “곤들매기로 가득찬 수족관의 빨간 금붕어처럼”」중에서
에릭은 헉슬리 선생에게서 플로베르, 졸라, 모파상, 아나톨 프랑스를 배웠다. 헉슬리와 함께 이따금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특히 헉슬리의 어법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의 주목을 끌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단어야’라고 우리는 서로에게 이야기해주곤 했다. 우리는 단어에 대한 취미, 즉 구체적이고 의미 있는 단어 사용에 대한 취미를 갖게 되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에게 큰 빚을 졌다.” 오웰이 훗날에도 구체적인 영어, 즉 고유의 의미를 가지되 진부하지 않은 단어들을 찾아내려 애썼던 것은 헉슬리의 영향임이 분명하다.
---「3. 이튼이여, 영원하라」중에서
“나는 경찰에서 근무했다. 즉, 나는 전제군주제의 기계설비 심장부에 있었던 거다. 더구나 경찰은 제국의 가장 저급한 일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기회를 제공하는데, 더러운 일을 직접 하는 것과 그 열매만 따먹는 일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존재한다.”
---「4. 버마 시절」중에서
에릭 블레어로 하여금 사직하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양심의 가책이었다. “그는 마침내 제국주의를 단지 갱단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그런 제국주의를 위해 일하고 있음”을 자각한 것이다. 버마에서 마주쳤던 얼굴들, 즉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수감자들, 사형수들의 방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내가 거칠게 다루었던 아랫사람들, 내가 모욕을 줬던 늙은 농부들, 내가 화날 때 두들겨 팼던 하인들과 일꾼들의 얼굴들”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가 거기에서 맡았던 역할은 “압박 시스템의 톱니바퀴 중 하나”였다는 것을 그는 명료하게 자각한다. “치명적인 전제군주제”를 위한 그 일이 그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그런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그래서 그의 이상과는 매우 거리가 먼 일에서 자신이 성장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가 어떻게 그토록 맹목적으로 될 수 있겠는가?
버마는 그에게 다시 회복하기 힘들 정도의 트라우마를 안겼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 입장에서라면 정확히 나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그런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는 일이 나는 아주 싫었다.” 그는 정말로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했으며, 그의 미래는 전부 그가 버마에서 깨달은 새로운 사실들에 의해 좌우된다.
---「5. 가난 부인」중에서
12월, 그는 1928년 1월 1일부로 사직서가 수리되었다는 확답을 받고 획기적인 경험을 할 준비를 한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그는 “극단적인 환경에 처한, 사회의 밑바닥 인생, 즉 거지, 부랑아, 범죄자, 창녀”와 같이 생활하면서 밑바닥까지 내려갈 결심을 한다. 그가 그런 경험에서 글감을 구하고 싶어 한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 중 가장 하등한 인간들” 곁에서 자신을 정화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결심은 그를 접시닦이로까지 몰고 간다.
---「5. 가난 부인」중에서
1932년 11월 19일, 그는 에이전트인 무어에게 세 개의 이름 목록을 제안했다. “필명에 관해서, 제가 방랑 시절에 늘 썼던 이름이 하나 있는데, 버튼P. S. Burton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름이 별로 그럴듯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은 이름들은 어떨지 의견 부탁드립니다. 케네스 마일스Kenneth Miles, 조지 오웰George Orwell, 루이스 올웨이스H. Lewis Allways. 저는 조지 오웰이 제일 좋습니다.”
그렇게 해서 1932년 11월 19일, 조지 오웰이 탄생했다.
‘오웰’은 사우스올드의 남쪽으로 6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 입스위치를 가로지르는 강 이름이다. 이웃에 살았던 여자친구인 엘리너는 에릭이 그 도시로부터 돌아온 날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앞으로 조지 오웰이란 이름을 쓸 거요. 왜냐하면 영어로 발음이 잘 되는 이름이거든.” 한편, ‘조지’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작가 조지 기싱George Gissing에 대한 열정에서인지, 왕족 이름들에 대한 취미 때문인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큰 소리로 “안녕, 조지!”라고 외치던 메이블의 남편의 습관 때문인지 모르지만), 한 번도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다.
---「6. “나는 조지 오웰에게 꼼짝도 못한다”」중에서
그는 그 전선에서 지냈던 것이 자신의 인생 중 가장 의미 없는 시기라는 판단이 서자, 몹시 슬펐다. “나는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 민병대에 참가했는데 지금까지 거의 싸워보지도 못했고, 일종의 허수아비처럼 자리를 지킨 것에 불과했다. 내 밥값도 못했고, 한 거라고는 추위와 수면 부족으로 고통받은 게 전부였다.” 이런 인식은 블레어의 내면에 혁명을 일으켰다. 말하자면, “예전의 모든 것과 완전히 다른,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올 경험과도 완전히 다른, 일종의 공백기”였으며, 그에게는 유일무이한 경험이 되었다. 평등을 실현할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믿음을 굳건하게 만든 것은 스페인에서였다. “거기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예감을 경험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을 사회주의로 이끄는 것, 그들이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뛰어들게 만드는 것, 즉 사회주의의 ‘신비주의 신학’은 바로 평등의 개념이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는 계급 없는 사회를 의미하거나, 또는 전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민병대에서 보낸 몇 달은 나에게는 큰 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스페인 민병대는 일종의 계급 없는 사회의 축소판이었기 때문이다.”
---「7. 블레어 동지」중에서
블레어는 좌파 신문기자들이 사실을 왜곡 보도함으로써 영국인들이 스페인에서 일어난 일들의 전모를 그대로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그들과는 돌이킬 수 없는 적대관계가 되었다. 게다가 그는 그들이 그런 짓을 멈추지 않는다면, 다음번 책에서도 영국 언론의 거짓말과 그들이 생략해버린 내용들을 부록으로 담겠다고 그들에게 알린다. 조준사격을 당한 좌파신문들의 체면을 세우는 유일한 방법은 오웰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뿐이었다.
---「7. 블레어 동지」중에서
1940년 12월, 블레어는 처음으로 BBC 방송에 출연해 ‘프롤레타리아 작가’에 대해 말했는데, 작가와 정치 참여의 밀접한 관계를 주장했다. 라디오에서, 혹은 신문에서, 그는 계속해서 “모든 글쓰기는 프로파간다다”라는 주장을 하면서, 순수 탐미주의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날 것을 촉구했다. “프로파간다는 모든 책의 심장부에 숨어 있다. 예술 작품은 어느 것이든 각각의 의미와 주제, 즉 정치적, 사회적, 혹은 종교적인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
---「8.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볼 장 다 본 시대다」중에서
그는 친소 정치 선전으로 잠들어 있던 영국에서 자신의 반스탈린주의가 어떤 가혹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는 자신이 쓴 기사들 중 가장 신랄한 것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리기 위한 은밀한 검열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가 볼 때, “러시아와 스탈린에 대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는 것”은 지적인 정직함의 문제였다. 그는 좌파 신문기자와 영국 지식 계급을 경계하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몇 년 내내, 소련체제나 그 밖의 다른 어떤 체제에 대해 비굴한 아첨꾼으로 혹은 정치 선전꾼으로 행동하고 나서,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의 지적 정직성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마시오. 한 번창 녀는 영원한 창녀입니다.”
그는 정보국이 편집자들의 재량권에 개입하는 것을 인정할 수 가 없었다. “이런 종류의 간섭은 불안한 징후다.” 조지 오웰은 좀 더 큰 표현의 자유를 요구한다. “상대가 듣고 싶어 하지 않은 것이라도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다.
---「8.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볼 장 다 본 시대다」중에서
나는 생각한다. 작가의 첫째 의무는 자기 본연의 모습을 잘 보존하는 것이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시의적절하지 않다”거나 이런저런 불길한 영향력을 “본의 아니게 행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거짓말을 하고 사실을 은폐하거나 주관적인 감정을 왜곡하도록 강요당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와 병행해서, 나는 완전히 비정치적인 문학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으며,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특정한 입장에 서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거나 바람직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9. 아무것도 죽지 않는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