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는 예수 전승의 문학적인 구체화를 반영하고, 교육적인 내용과 더불어 예수에 대한 기독교의 설교를 보충하며, 구약성서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해석을 예시한다. 이 모든 것이 신학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내러티브에 들어가 있다. 그 내러티브는 예수에 대한 메시지를 원근 각처에 있는 신앙 공동체에게 널리 전달하고자 고안된 것이다. 어느 시점에서 구전 복음은 예수의 사역에 대한 다소 불충분한 개요를 지닌 채 예수의 수난에 확고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는데, 이 구전 복음에 예수의 어록과 그의 생애에 대한 일화들이 덧붙여졌고, 또 예수에 대한 교회의 묘사를 더 충실히 하려고 보충되었다. 마가가 한 일은 복음 선포와 예수에 대한 가르침을 하나의 기록된 설명으로 결합해서 이 과정을 어느 정도 표준화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가는 우리가 “복음서”라고 부르는 문학 장르를 탄생시켰다
---「1장 “서론: 예수에서 복음서로」중에서
예수 전승의 핵심 목적은 초기 교회의 신앙에 내용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라는 케리그마로 정형화된 문구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지녔던 신앙의 내용 중에서 가장 기초적이며 가장 잘 입증된 것 가운데 하나다(살전 4:14; 고전 15:3-8; 고후 5:15; 롬 4:25). 하지만 신앙고백으로서 이 문구에는 십자가 처형을 받고 다시 살아난 주님으로 선포되는 그 인물이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전제되거나, 적어도 제기된다. 예수의 수난과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으로 높이 올림 받음은 예수의 지상 사역과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언자로서의 예수의 생애 및 메시아로서의 사명과 구속을 위한 죽음은 신약성서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사무엘 뷔쉬코그(Samuel Byrskog)는 “케리그마, 곧 현존하는 주님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과거의 예수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므로 초기 교회가 예수의 지상 생활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채, 배타적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을 맞추어 전적으로 케리그마적인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는 주장은 지나친 것이다. 예수 전승에 대한 서술이 없었다면, 예수의 구속적 죽음에 대한 케리그마는 처음부터 초기 교회에게 이해될 수 없었을 것이다.
---「2장 “예수 전승의 목적 및 보존」중에서
우리는 공관복음서 안에서 세 복음서 사이의 문학적인 관계를 밝혀주는 명백한 자취를 간파할 수 있다. 복음서 가운데 하나 또는 그 이상은 다른 복음서에서 자료를 빌려왔다. 하지만 그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그 관계는 지속적인 구전, 이차적인 구술 전달, 서로 평행을 이루는 전승, 아마도 보다 이른 시기와 후대의 판본들에 의해 복잡하다. 거의 확실해 보이는 것은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저술되었다는 것과 나중에 누가와 마태가 마가복음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는 단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마태와 누가가 마가복음 외에도 어떤 자료를 부분적으로 공유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아마도 우리가 “Q”라고 부르는 문서와 다른 다양한 전승을 공유했을 것이다). 그리고 누가가 훗날 어느 시점에 마태복음의 요소를 자신의 복음서에 결합했을 것이다(즉 홀츠만-건드리 이론).
---「4장 “복음서의 문학적 유전학」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교회의 euvagge,lion은 이스라엘 성서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으로서 예수를 통해 오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예수의 탄생과 세례 받음으로 시작되어 그의 대속의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로 끝난다. euvagge,lion을 지속적으로 널리 알리기 위해, 또한 예수에 대한 추가적인 전기 및 교육 자료로 그것을 확대하기 위해 이야기의 전달 수단이 구술에서 기록 문서로 바뀐 것은 당연하고 필수적인 진행 과정이었다. 따라서 아무도 책을 euvagge,lion이라고 이름 붙이는 데 대해 분개하지 않았다. 또한 아무도 euvagge,lion을 사용하는 데 대해 정당하다고 주장하거나 인가받지 않았다. 처음에 euvagge,lion은 대체로 구술이든 기록 문서든, 전달 수단이라기보다 오히려 내용에 대한 사항이었다.
---「5장 “복음서의 장르 및 목표」중에서
나는 사복음서가 정경의 앞부분에 위치하는 것이 분명히 이치에 맞는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우선, 복음서는 율법에 기초한 구약의 경륜과 메시아에 기초한 새로운 경륜 사이에서 전환점을 제공해준다. 그뿐 아니라, 새 언약 모음집 안에 위치하는 덕분에 사복음서는 이 책의 독자들로 하여금 복음적인 에토스에 몰두하게 하며 그리스도 중심의 초점이 깊이 배어들게 한다. 다시 말해 사복음서는 성서가 주님의 복음에 대한 책이라는 사실에 대한 사중 리허설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기독교는 내부에 유대교 포장이 박혀 있는 신-플라톤주의 철학 체계가 아니고, 종교적인 신화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기다리는 독일의 실존주의도 아니며, 종교적인 영역에서 정당화를 추구하는 보수주의적인 또는 자유주의적인 정치 프로그램도 아니다. 오히려 복음서는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임을 보여준다.
---「6장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중 복음」중에서